초강대국 FIFA 랭킹이 고작 77위라니
  • 모종혁│중국 통신원 (.)
  • 승인 2015.08.12 19:33
  • 호수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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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자부심 중국인들, 축구 얘기는 꺼려…시진핑 “축구 실력 향상 위해 모든 역량 동원하라”

8월2일 저녁 중국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 시 스포츠센터 스타디움은 대륙 전역에서 몰려온 3만여 치우미(球迷·중국 축구대표팀 서포터스 이름)가 흔들어대는 오성홍기(五星紅旗)로 물결쳤다. 중국 축구 대표팀이 숙적 한국과의 일전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번 2015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대회(이하 동아시안컵)를 앞두고 치우미들은 어느 때보다 기대에 부풀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치우미들은 주심만 사용할 수 있는 호각을 불어대며 광란적인 응원을 펼쳤다. 목이 터져라 “짜요(加油)”를 외쳐댔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한국은 압도적인 경기력을 발휘하며 2-0으로 완승했다. 내용에서도 중국은 완패했다. 볼 점유율에서 44% 대 56%, 패스 성공률에서 79% 대 86%로 현저히 밀렸다.

2014년 3월29일 독일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부인 펑리위안과 함께 독일에 유학 중인 중국 유소년 축구단을 찾아 격려하고 있다. ⓒ EPA 연합

국력 걸맞지 않은 축구 실력, 국가 위신 깎아

중국 축구팬들의 충격이 더 컸던 것은 최근 대륙 전역에서 일고 있는 ‘축구굴기(足球?起·축구를 일으켜 세움)’에 정부와 기업들이 발 벗고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치를 처음 내건 이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다. 시 주석은 14억 중국인들이 공인하는 열성(鐵杆) 치우미다. 일설에 따르면, 베이징(北京) 81중학을 다닐 때부터 축구공을 즐겨 차며 운동장을 누볐다고 한다. 공직에 나서서는 1983년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 현 당서기로 재직하면서 주말마다 베이징에 가서 축구 경기를 관람했다.

지난 2011년 7월 베이징을 방문한 손학규 당시 민주당 대표가 박지성 선수의 사인볼을 선물하자 시 주석은 “중국이 월드컵에 출전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이 나의 세 가지 소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2012년 2월 국가부주석 신분으로 아일랜드를 방문했을 때는 크로크파크 경기장에서 코트를 입고 구두를 신은 채 시축을 했다. 시 주석은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을 한동안 집무실에 걸어놓기도 했다.

2013년 6월, 중국 대표팀이 태국에 1-5로 대패하자 시 주석은 국가체육총국에 직접 전화를 걸어 “모든 역량을 동원해 원인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지난해 3월 유럽 순방에서는 축구계 인사를 만나고 현지 축구 경기장을 찾는 등 적극적인 ‘축구 외교’를 펼쳤다. 중국 역대 최고 지도자 중 개혁·개방의 총설계자인 덩샤오핑(鄧小平)도 축구를 좋아했지만, 시 주석의 이런 열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결국 시 주석은 지난 2월 직접 주재한 회의에서 ‘중국 축구 개혁 종합 방안’ 50개조를 통과시켰다.

이 방안은 축구굴기의 구체적인 청사진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초·중등학교 체육 과목에서 축구를 필수 과정으로 지정토록 했다. 또한 2017년까지 축구학교 2만개를 설립하고 축구선수 10만명을 양성하며, 10년 내 축구 전용경기장을 수백 개 설립토록 했다.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석상에서는 시 주석이 ‘월드컵 본선 상시 출전’ ‘월드컵 개최’ ‘월드컵 우승’이라는 축구에 대한 3대 구상을 언급했다. 4월에는 류옌둥(劉延東) 부총리를 조장으로 한 축구 개혁 영도소조가 출범했다.

이렇듯 시 주석이 축구굴기에 몰입하는 이유는 단순한 취미생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축구가 가진 협력과 희생의 정신, 국가 이미지의 개선 등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중국인은 한 명이면 용(龍)이지만, 두 명이 합치면 사람이고, 세 명이 모이면 벌레(蟲子)’라는 우스갯소리가 회자될 정도로 조직보다 개인을 앞세운다. 이런 문제는 한 가정 한 자녀 정책으로 인해 ‘소황제’로 자란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시 주석은 축구를 통해 이기심이 팽배한 젊은이들에게 협동심을 키워주고 조직에 대한 희생정신을 심어주려 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중국 지도자들은 국력에 걸맞지 않은 중국의 축구 실력이 국가 위신을 깎아내린다고 여기고 있다. 중국은 외교와 경제뿐만 아니라 스포츠에서도 이미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슈퍼파워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은 77위에 불과하다. 이는 다른 구기 종목에서 서구 열강과 치열하게 겨루는 현실과 비교할 때 너무나 초라한 성적이다. 심지어 국내에서 축구 인기가 바닥인 미국조차 월드컵에 단골로 출전하고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시진핑 ‘축구굴기’ 방침에 재벌들 적극 동참

오늘날 월드컵은 올림픽에 결코 뒤지지 않는 세계 최대의 스포츠 제전이다. 1904년 창립된 FIFA(국제축구연맹)는 국제연합(UN)보다 회원국 수가 더 많다. 이 같은 현실은 시진핑 주석과 5억이 넘는 치우미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다. 실제 중국인들은 평소 외국인과 대화할 때 자국 축구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극도로 꺼린다. 불과 월드컵 1회 진출에 3전 3패 무실점만 기록한 자국 대표팀은 중국인들에게 꽤나 부끄러운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나마 유일한 월드컵 진출도 2002년 한·일월드컵 때로, 당시 공동 개최국이었던 한국과 일본이 아시아 지역 예선에 나서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이 운 좋게 티켓 한 장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본선에서 한국과 일본이 4강과 16강 진출의 쾌거를 이룰 때 중국은 조별예선 3전 전패, 무득점 9실점이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얻는 데 그쳤다.

중국은 이미 2008년에 베이징올림픽을 개최했고 종합우승까지 차지했다. 오는 2022년 동계올림픽 개최권도 따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국제적 이벤트인 월드컵을 자국에서 개최해 중국 꿈(中國夢)을 달성하고, 좋은 성적을 거둬 중화민족의 부흥을 만방에 알리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특히나 스포츠는 단시일 내에 모든 민족과 전 계층을 하나로 단결시키는 원동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 주석과 최고 지도부의 의도를 눈치 챈 중국 기업가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해 6월 알리바바그룹은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에 홈을 둔 헝다(恒大) 프로축구 구단의 지분 50%를 12억 위안(약 2252억원)에 인수했다. 중국 최대의 부동산 재벌인 왕젠린(王健林) 완다(萬達)그룹 회장은 지난 1월 스페인 축구클럽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지분 20%를 인수했다. 식품업체인 와하하(娃哈哈)그룹 쭝칭허우(宗慶後) 회장은 지난 6월 여자축구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른 여자축구팀에 100만 위안(1억8700만원)의 격려금을 지급했다. 축구굴기라는 엔진까지 장착한 중국이 세계 축구 무대에서 우뚝 설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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