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의 한숨
  • 윤길주 편집국장 (.)
  • 승인 2015.09.02 17:2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지인 이 한숨을 푹푹 쉬면서 하소연합니다. 딸이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겠다는데 상대가 실업자라는 겁니다. 이 친구는 서울 가산동(옛 구로공단)에 있는 조그만 IT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답니다. 딸이 하도 고집을 피워 오는 10월 결혼식을 하는데 분통이 터져 잠이 안 온다고 푸념합니다. 지인은 만날 때마다 “우리 딸은 영어를 잘해서 CNN만 본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유럽 여행을 한 달이나 다녀왔다”고 자랑하는 ‘딸 바보’입니다. 영화 <타짜>에서 김혜수가 “나 ??대학 출신이야”라고 했던 유명 여대를 내리 4년 동안 장학생으로 다녔다니 그럴 만도 하죠. 그런 딸을 듣도 보도 못한 작은 IT회사에서 알바를 하는 ‘백수’에게 보내려니 부글부글 끓는 거죠. 속으론 안됐다고 혀를 차면서도 위로를 해줬습니다. “아직 젊은데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있겠지요. 길게 보고 용기를 심어주세요.”

#. 며칠 전 후배를 만났습니다. 늘 활달하던 사람이 그날은 우울해 보였습니다. 후배는 꽤 알려진 중견 유통회사 임원이었는데 얼마 전 잘렸다고 합니다. 회사 구조조정 과정에서 유탄을 맞았다더군요. 그는 50대 초반으로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남매를 두고 있습니다. 요즘 퇴직금으로 뭐라도 해볼까 요리조리 알아보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답답한 마음에 부동산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려고 공부 중이라고 하더군요. 빈말이라도 “세상에 할 일은 널려 있다네.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생각해보게”라고 조언해줬습니다. 점심을 함께하고 돌아서는 후배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워 보였습니다.

청년 백수와 실직한 가장.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왜 일자리를 못 잡고, 직장을 잃었는지 사연이야 제각각이지만 결론은 한 가지입니다. 실업자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실업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청년과 어깨에 가족의 생존을 짊어진 가장이 빌빌거리거나 탑골공원을 전전하는 나라가 정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7월 고용 동향’에 따르면 15~29세 청년 실업률은 9.5%로 외환위기 때였던 1999년 이래 가장 높습니다. 하지만 ‘주당 18시간  미만 알바생’ 등을 포함한 서울시 청년 실업률은 31.8%에 달합니다. 청년 3명 중 1명은 백수라는 얘기입니다. 왕성한 활동기인 50대에 직장을 잃고 하릴없이 등산으로 하루를 때우는 가장 또한 수두룩합니다.

난국을 풀어야 할 정부와 정치권은 ‘일자리 몇 만개 창조’ 같은 허황된 구호만 외칠 뿐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자리는 기업이 만드는 것입니다. 기업들의 장사가 잘되도록 분위기를 잡아줘서 일손을 채우도록 하는 게 정부의 역할입니다. 이거 하라 저거 하라 윽박지른다고 해서 이윤에 민감한 기업들이 투자를 늘리고 인력을 채용할 리 없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내년 총선 등 정치 일정을 감안하면 일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크고 번드르르한 치적을 욕심내기보다는 당장 피부에 와 닿는 일자리부터 챙기기 바랍니다. 한숨짓는 가장과 앞날이 꽉 막힌 청년을 조금이라도 줄인다면 그나마 평가받는 정부가 될 것입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