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동’ ‘동성애’란 말 쓰지 말라고요?
  • 유지민 인턴기자 (.)
  • 승인 2015.09.0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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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성교육 표준안’ 비웃는 학생들과 고민하는 교사들

“치마를 입은 채로 체벌을 받을 때 걱정스럽고 기분이 안 좋아요.” “제 후배는 심폐소생술을 배울 때 선생님이 ‘홍콩 보내줄까?’라고 하는 말을 들었대요. 근데 솔직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우리도 다 알아요.” 지난 8월25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한국청소년성문화센터협의회 주관 ‘대한민국 청소년 성교육 정책 바로세우기 대토론회’가 열렸다. 10대들은 1부 토크콘서트에서 학교 내 성폭력과 성교육에 대해 솔직한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그때 일부 어른들이 시끄럽게 해 토론 진행에 차질이 생기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학생들이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하느냐” “허락을 받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이냐” 등의 질책을 쏟아낸 것이다. 여기서도 청소년 성교육에 대한 교육 관계자, 학부모, 학생들 간의 입장 차가 크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이 뜨거운 감자는 교육부의 성교육 표준안으로 인해 한동안 식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초·중·고등학교에 내려진 교육부의 성교육 표준안을 두고 학생들과 일선 교사들로부터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교육부 표준안, 현실 반영 못해”

올해 3월 배포된 교육부의 ‘국가수준 학교 성교육 표준안’은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성차별적 내용을 담고 있어 학부모단체와 교육단체, 성교육단체의 비판을 받고 있다. 8월24일엔 청소년·인권·교육 단체 등이 연대회의를 꾸려 교육부 표준안 철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교육부가 표준안에 따른 성교육 실시, 외부 강사의 표준안 준수 여부 모니터링을 주문하는 등 강제로 성교육 표준안 준수를 명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전국 각지에선 논란의 교육부 표준안에 따라 교사 연수가 진행되고 성교육도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표준안 강제는 교육권 침해라는 지적이 나온다.

토론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직접 교육부의 성교육 표준안을 비판하고 나섰다. 표준안 내용이 교육 현실과 동떨어진다는 것이다. “성교육 시간에 ‘동성애’ ‘야동’ ‘자위행위’ 등과 같은 말을 쓰지 말라고 하는데, 그럼 우리는 어떤 교육을 받으며 공감해야 하나요.” 청소년들 사이에는 이미 성에 대해 ‘알 건 다 안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A양(18)은 “인터넷으로 콘텐츠를 접하기 때문에 성과 관련해 알 만한 것은 다 안다”며 “이미 초등학교·중학교 때 첫 경험을 한 애들도 주변에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13년 실시된 제9차 청소년건강행태 온라인 조사에 따르면, 성경험이 있는 청소년의 평균 연령은 15.6세였다. 특히 성경험이 있는 남중생의 63.7%, 여중생의 56.2%가 첫 성경험을 ‘중학교 입학 전’에 했다. 성교육 시간에 특정 단어 사용을 제한하는 표준안이 현실적이지 않은 이유다.

갑자기 등장한 표준안에 보건교사들은 당황스러운 분위기다. 표준안의 내용이 현재 보건교과서 내용보다 후퇴했기 때문이다. 표준안을 그대로 따르면 교육 현장에서의 올바른 지도가 어려울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우옥영 보건교육포럼 이사장은 “아이들끼리는 잘못된 성 인지를 바탕으로 서로 놀리며 노는데, 교사가 설명을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며 “(표준안이) 충분한 협의나 대안 없이 내려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학생들 수요 못 따라가는 성교육

교내 성교육은 성폭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매우 중요하다. 토론회에서 한 학생은 “선생님한테 성추행을 당해도 어디에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지난 7월 서울 서대문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성추문 사건만 해도 그렇다. 심지어 사건 이후엔 일부 남학생들이 가해 교사를 두둔하며 피해 여학생에게 2차 피해를 준 일까지 발생했다. 성추행 및 성희롱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학생들의 성평등 인식에 대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많은 교육 전문가가 학교 내 올바른 성교육 필요성을 강조했던 이유다.

하지만 초·중·고교의 성교육은 학생들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다수의 고등학생은 교내 성교육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나타낸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B양(17)은 “무조건 하지 말라는 식으로 ‘안 돼요’ ‘싫어요’가 나오는 동영상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생 C군(18)은 “외부 강사가 와도 무더기로 모아놓고 성교육을 하니 자는 애가 많다”고 했다.

성교육에 적극적인 일부 학교는 기관과 연계해 체험형 성교육을 진행한다. 박현이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 기획부장은 “체험형 성교육은 학생들의 질문 위주로 수업해 분위기가 자유롭다. 아이들의 반응과 효과가 좋다”고 밝혔다.

체험형 성교육도 교내에서 성교육 시간이 확보됐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현재 중·고등학교 성교육은 선택교과인 보건교과 내에 5~7차시 정도로 배정돼 있다. 표준안에선 1년에 15시간 이상 성교육을 실시할 것을 정하고 있는데, 보건교사의 수업과 각 교과목 수업에 녹아든 성교육도 포함된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보건교사는 “대다수 학교가 입시 위주로 수업을 해서 수업 시수 확보가 어렵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성교육이 많다”며 “인력 부족, 과다 업무 역시 성교육 현장의 어려움”이라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보건교사는 성고충처리위원회 업무를 도맡지만, 주어진 권한은 없다. 위원장을 맡은 교장·교감 등 주요 보직교사가 성폭력 문제를 일으켜도 조치를 취하기가 어려운 구조다. 또 다른 권력형 성폭력을 낳을 여지가 많은 것이다. 우옥영 이사장은 “이런 문제 해결 없이 어떻게 아이들보고 ‘No’를 외치라고 가르치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학교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성교육이 이뤄지도록 성문화를 개선해나가야 한다”며 “학교 내외의 성교육이 조화를 이루고, 보건교과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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