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격 사태 9일째 북한 개성 시내는 평온했다
  • 개성=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승인 2015.09.09 15:46
  • 호수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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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시내 단독 르포 남북 고위급 회담 성사 후 첫 북한 방문

새벽 6시30분 일산 킨텍스 출발. 오전 8시30분 남측 남북출입사무소 도착. 오전 9시 휴전선 건너 북측 남북출입사무소 통과. 오전 9시30분 개성공단 지나 북측 검문소 통과 후 개성 시내 진입. 오전 10시 민속여관 도착 북측 조불련과 회담. 11시50분 민속여관 내 식당에서 오찬. 오후 1시 북측 남북출입사무소 도착. 오후 2시 남측 남북출입사무소로 귀환.

2015년 8월29일 토요일, 기자의 하루는 긴박했다.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8월20일 남북 간 포격이 오갔던 휴전선을 향했다. 당시 한반도는 군사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전쟁 발발 가능성이 거론될 만큼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았다. 불과 9일 전의 일이다. 8월25일 새벽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극적으로 합의가 이뤄지면서 남북 간 화해 무드가 조성됐다지만, 북한 내부 분위기가 어떤지는 확실치 않았다.

북한 개성 시내에 위치한 ‘민속여관’ 내부 모습. 실개천을 사이로 한옥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 시사저널 안성모

두 가지 측면에서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우선 포격 사태 후 첫 북한 방문의 주인공이 됐다는 점이다. 당초 포격 사태로 인해 방북 일정이 무산될 줄 알았다. 남북 간 고위급 회담이 성사돼 대화의 물꼬가 트이지 않았다면 방북 허가 자체가 나지 않았을 수 있다. 우리 문화재 반환을 논의하기 위해서라는 비정치적인 방문 목적도 통일부가 어려운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남측에서 개성공단이 아닌 개성 시내를 방문하는 것은 올해 들어 처음 있는 일”이라고 남북한 관계자가 말했다. 그동안 남북 관계가 경색 국면을 이어오면서 문이 꽁꽁 닫은 채 열리지 않은 것이다. 이 또한 43시간 동안 이어진 마라톤회담이 성과를 낸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포격 사태 이후 최초의 방북, 올해 들어 첫 개성 시내 입성은 그래서 출발 전부터 잔뜩 기대감이 부풀게 했다. 한편으로는 방북 중 어떤 상황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북한 개성 시내에 위치한 ‘민속여관’ 내부 모습. 실개천을 사이로 한옥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 시사저널 안성모

북한 ‘평양시’ 실시해 30분 시차 생겨

8월29일 새벽 6시30분쯤 일산 킨텍스에서 방북단 일행이 한자리에 모였다. 타고 온 차는 공영주차장에 주차해두고, 차 한 대에 몸을 실어 도라산역 부근에 위치한 남북출입사무소로 향했다. 8시30분쯤 도착한 남북출입사무소는 한산했다. 건물 2층 휴게실은 빈자리만 가득했다. 기념품과 음료수 등을 파는 매점도 마찬가지였다. 남북출입사무소 관계자는 “근래 들어 북한 방문객이 없다 보니 가게에도 손님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예전과 달라진 게 또 있었다. 바로 시간이다. 남북출입사무소 로비에 들어서자 개성 시각을 알리는 벽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북한은 올해 8월15일 광복절부터 ‘평양시’를 실시하고 있다. 기존 시간보다 30분 늦다. 남북 간에 30분의 시차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개성으로 넘어가는 첫 출경 시간은 우리 시각으로 8시30분에서 9시로 바뀌어 기존보다 30분 늦어졌다. 반대로 남측으로 넘어오는 입경 시간은 30분 빨라졌다.

이번 남북 고위급 회담 때도 ‘30분 시차’로 인해 한 차례 해프닝이 있었다. 남과 북은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고, 준전시상태를 해제하기로 합의한 후 시점을 8월25일 낮 12시로 잡았다. 양측 모두 약속을 지켰다. 그런데 북한이 평양시를 적용하다 보니 우리 군의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이 북한 측의 준전시상태 해제보다 30분 먼저 이뤄졌다.

간단한 교육 후 전날 발급된 방문증명서를 받았다. 통일부장관이 북한 지역 방문을 승인했다는 표식이다. 유효 기간이 하루인 북한 비자인 셈이다. 휴대전화는 가져갈 수 없어 남북출입사무소에 보관해뒀다. 차량의 앞뒤 번호판을 흰색 가림판으로 가리고, 운전석 창 위로 빨간 깃발을 달았다. 차량으로 북한을 방문할 경우 꼭 지켜야 하는 규칙이다.

개성공단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지어 선 트럭 행렬에 합류해 북으로 향했다. 남북 간 대치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공단을 들락거리는 트럭 수도 상당히 줄었다고 한다. 북한 측 남북출입사무소까지 가는 데는 차로 10분가량 걸렸다.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최전선에 위치한 남북한 초소는 불과 몇 십 미터도 안 떨어진 듯 보였다. 남북한의 심리적 거리와는 비교가 안 된다.

이번 방북은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이 초청해 성사됐다.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를 맡고 있는 혜문 스님을 비롯해 5명이 방북 길에 올랐다. 혜문 스님은 오래전부터 조불련과 힘을 합쳐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의 반환에 공을 들여왔다. <조선왕조신록> <조선왕실의궤>, 문정왕후 어보, 대한제국 국새 등 주요 문화재를 돌려받는 등 이미 큰 성과를 올렸다.

민속여관 식당 입구(위)와 책방 내부 ⓒ 시사저널 안성모, ⓒ 시사저널 안성모

개울가 ‘삼삼오오’ 빨래하는 아낙네들

이번 조불련과의 회담도 일본에 약탈된 ‘평양 율리사지 석탑’ 반환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혜문 스님이 위임을 받아 현재 일본 도쿄에서 법정 소송을 벌이고 있다. 오는 9월17일 2차 조정 기일이 잡혔는데, 조불련 관계자가 재판에 참석할 수 있을지 의사를 타진할 예정이었다(24쪽 기사 참조).

검열은 남측보다 까다로운 편이었다. ‘출국’보다 ‘입국’ 검열이 더 깐깐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소지품 검사부터 꼼꼼히 했다. 가방에 든 물건의 용도를 묻기도 했다. 차량 검열도 마찬가지였다. 트렁크 내부까지 세세히 살폈다. 만약 반입 금지 물품이 발각될 경우 벌금이 부과될 수도 있다고 한다.

차금철 서기장을 비롯한 조불련 인사 두 명과 북한 정부 관료로 보이는 다른 두 명의 인사가 마중을 나와 수속을 도왔다. 남북출입사무소에서 함께 출발했던 트럭들은 인근 개성공단으로 줄지어 들어갔고, 우리 일행은 북측 차량의 안내를 받으며 개성 시내로 향했다. 창밖으로 개성 주민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남북 간 무력 충돌이 우려됐는데, 협상이 타결된 사실을 알아서인지 다들 표정이 밝았다. 북측 한 인사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조성됐지만 김정은 위원장(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선군정치로 일이 잘 처리됐다”고 말했다. 남북 고위급 회담의 결실을 김 위원장의 지도력과 연관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거리에는 자전거로 이동하는 주민이 유난히 많았다. 아들을 뒷자리에 태운 채 등교를 돕는 어머니, 자신의 몸보다 큰 자전거를 능수능란하게 몰고 가는 까까머리 중학생…. 길 한편으로는 음료수 등을 파는 노점 형태의 가게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1970~80년대 기자가 생활했던 지방의 한 중소도시 풍경을 보는 듯해 낯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개울가에 삼삼오오 모여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옥수수밭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잎이 바짝 말라 식량 역할을 못할 듯 보였다. 하천 물도 흐름이 시원찮았다. 북측 관계자는 “작년에도 그랬는데 올해도 가뭄이 심하다”고 설명했다. 가뭄 피해는 여전히 풀어야 할 난제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개성공단은 북측 남북출입사무소를 통과하면 별다른 제재 없이 방문할 수 있다. 하지만 개성 시내는 다르다. 개성공단을 지나 도심으로 들어가기 전에 검문소 한 곳을 더 거쳐야 한다. 이곳 검문은 더 철저하다. 남측에서 개성공단이야 자주 드나들지만 개성 시내로 진입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차량 검열을 한 차례 더 받은 후에야 개성 시내 한복판에 있는 개성극장이 보이는 시내로 들어설 수 있었다.

회담은 개성의 중심가에 위치한 ‘민속여관’에서 열렸다.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전통 한옥들이 길게 늘어선 형태로 보존이 잘돼 있고, 운치가 남달라 북한 영화에서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주로 외국 관광객이 머무르는데 식당과 기념품 가게도 함께 있다.

민속여관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에 위치한 건물로 들어섰다. 한글로 ‘책방’, 영어로 ‘BOOK SHOP’이라고 쓰인 간판이 걸려 있었다. 중앙 로비가 책방(서점)으로 꾸며졌다. 왼편에 김일성 전 주석, 오른편에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중앙에 김정은 제1위원장 관련 책이 놓여 있었다. 벽 한쪽에는 북한에서 제작된 영화 DVD와 음악 CD가 가지런히 전시돼 있었다.

이 건물 복도 끝에 위치한 회의실은 고급스러운 대형 테이블에 양쪽으로 의자가 배치돼 있어 회담 장소로 자주 쓰인다고 한다. 회담은 오전 10시부터 1시간30분가량 진행됐다. 중간중간 김정은 제1위원장 체제에서 북한이 중점을 두고 추진 중인 사업에 대한 북측 관계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핵심 키워드는 ‘경제’였다. 북측 관계자는 “‘경제강국 건설’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고 했다.

그 사례로 먼저 평양의 ‘미래과학자거리’를 들었다. 조선중앙통신의 소개에 따르면, 미래과학자거리에는 500여 세대의 초고층 살림집(아파트)과 탁아소, 유치원, 편의봉사망 등 최상 수준의 건설이 이뤄질 예정이다. 이 거리에 들어선 김책공대연구소는 IT(정보기술) 분야를 중점 연구하는 북한 정보화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한다. 김책공대는 북한에서 과학기술 전문가 배출로 유명한 학교다. 북측 관계자는 “평양은 과학기술 중심의 도시가 될 것이다. 과학 전당도 크게 짓고 있는데 오는 10월에 완공된다”고 전했다.

그는 ‘평양국제비행장’이 개장한 소식도 전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평양국제공항 여객터미널 신청사가 7월1일 개장한 것이다. 옛 청사보다 규모가 7배쯤 더 크다고 한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준공을 앞두고 직접 전용기를 타고 공항을 내려다보며 크게 만족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관광 활성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북측 관계자는 백두산과 청천강 지역에 건설되고 있는 발전소 얘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북한은 올해 안에 백두산 지역에 2기, 청천강 유역에 4기의 발전소를 완공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가뭄과 함께 전력 문제도 북한이 풀어야 할 당면 과제로 거론된다. 10월 개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10월’을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오는 10월10일에 당 창건 70주년을 맞기 때문이다.

‘경제강국 건설’과 함께 ‘경제생활 향상’도 강조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 전국 각지에 아이들을 돌보는 육아원과 애육원을 새로 짓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평양시의 육아원과 애육원을 돌아봤다는 조선중앙통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북측 관계자는 “최근 대동강변에 양로원도 하나 새로 지었다”고 전했다. 한옥식 건축물로 김정은 제1위원장이 현지지도를 했다는 평양양로원을 얘기한 것으로 보인다.

회담이 끝난 후 참석자들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어 민속여관 내 실개천을 따라 맞은편 끝에 위치한 한옥집의 대문으로 들어섰다. 별다른 간판 없이 대문 윗부분에 ‘16’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민속여관은 과거 부잣집의 상징으로 여겼던 아흔아홉 칸짜리 고택이었다고 한다. 16번 집은 일반 숙소가 아닌 식당이었다. 개성 전통을 그대로 살려 ‘1인 1상’으로 음식이 나오는 게 이채로웠다. 메인 메뉴는 찹쌀과 인삼을 넣고 닭 한 마리를 통째로 삶은 백숙이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졸깃한 맛이 일품이었다.

1시간 남짓 환담을 나눴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얘기가 오가면서 때로는 진지하고 때로는 웃음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조불련 인사 외에 다른 두 인사는 북한 최고 권력기관으로 거론되는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와 우리의 통일부 역할을 하는 통일전선부(통전부) 쪽 인사인 것으로 보였다.

조불련 쪽 두 인사와 마찬가지로 인민복을 입은 인사가 통전부, 정장 바지에 와이셔츠를 입은 인사가 보위부 관계자로 여겨졌다. 두 인사 모두 주로 이야기를 듣는 데 집중했는데, 자리가 끝날 무렵에는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편하게 술도 한잔하면서 대화하자”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개성극장 앞 광장 주말 인파 북적

토요일에는 남측으로 귀환하는 시각이 평일보다 빠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서둘러 귀경길에 올라야 했다. 민속여관 뒤편으로 고려 500년 사직의 궁궐터인 만월대가 위치한 송악산이 보였다. 만월대는 남북이 발굴조사를 함께 해왔다.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남북 공동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민속여관을 나오자 개성 시내에서는 퇴근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퇴근한 직장인과 하교한 학생들이 개성극장 앞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빨간 머플러를 한 초등학생, 한복으로 된 교복 차림의 여중생, 인민복을 입은 직장인들이 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옆을 소달구지가 지나가기도 했다.

개성공단 입구에는 퇴근 버스를 기다리는 북한 근로자 수백 명이 장사진을 쳤다. 이들을 개성 시내로 태워줄 파란색 버스가 줄지어 서 있는 모습도 진풍경이었다. 북측 인사들은 남북출입사무소까지 배웅을 나왔다. 들어갈 때 깐깐하기만 하던 북측 출입사무소 직원들도 미소를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남북 화해’의 상징이 된 개성은 광복 직후에는 경기도 일원으로 남한 지역이었다. 6·25 한국전쟁 후 1953년 7월 휴전협정 때 북한 지역이 됐다. 어느 쪽이든 마음만 먹으면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곳이다. 남북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위협적일 수도 있고 화기애애해질 수도 있다. 개성 시내를 나와 북측 인사들과 악수하며 나눈 “또 봅시다”라는 약속이 언제 지켜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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