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관계가 찢어내는 부자의 인연을 좇다
  • 이은선│매거진 M 기자 (.)
  • 승인 2015.09.16 20:30
  • 호수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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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이 끌고 가는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 <사도>

사도세자를 말할 때 언제나 먼저 언급되는 것은 그의 죽음이다. 아버지가 뒤주에 가둬 죽인 아들. 그토록 비극적인 사연이 ‘사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500년에서 이만큼 극적인 가족사는 찾기 어렵다. 이 끔찍한 비극을 경험하며 성장한 사도세자의 아들이 훗날 성군으로 이름을 떨친 정조가 됐다는 사실 역시 복기할수록 흥미로운 대목이다.

극적인 소재인 만큼 영조와 사도의 비극은 수십 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미디어를 통해 재연됐다. 1979년 방영한 MBC 드라마 <안국동 아씨>, 마찬가지로 MBC에서 1998년 방영한 <대왕의 길>, 지난해 SBS에서 방영한 <비밀의 문> 등 TV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만 해도 여러 편이다. 이렇듯 언뜻 낡고 닳은 소재로 보이는 사도의 사연을 2015년에 불러오면 어떤 이야기로 펼칠 수 있을까.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왕의 남자>(2005년)에서 폭군 연산마저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던 이준익 감독. 그는 <사도>를 통해 영조와 사도라는, 왕가의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을 건져 올린다.

ⓒ (주)쇼박스

영화는 사도가 뒤주에 갇힌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결코 평범한 부자 관계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영조와 사도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 과정을 짚는다. 사료에 근거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감독의 해석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데, 이준익 감독은 왕가의 법도와 권력으로 얽힌 부자 관계가 얼마나 기이하게 엉킬 수 있는지 그 나름의 인과관계를 따라가 보는 것에 주력한다. 당연하지만 영조가 임금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완벽주의자인 아버지가 버거운 세자

영조는 재위 내내 친어머니가 천민 출신이라는 데서 기인한 정통성 논란과 형 경종의 독살 의혹에 시달려야 했다. 이 영화는 그 사실에 충실해 캐릭터를 만들었다. 영조(송강호)는 그 어떤 작품이 그린 영조보다 콤플렉스가 강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집요하리만큼 학문에 매진하는 것은 물론 매사에 흐트러짐 하나 없는 품위를 유지해 신하들에게 애먼 트집을 잡히지 않으려 애쓴다.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엄격한 잣대는 아들 사도(유아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됐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사도는 태어난 이듬해 세자에 책봉돼 세자 수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왕조를 통틀어 최연소 기록이다.

부자간의 갈등은 사도가 15세에 아버지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면서 심화된다. 영조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됐던 당파 싸움을 봉합하기 위해 평생에 걸쳐 완성한 탕평책을 사도는 부인한다. 영조는 걸핏하면 임금의 자리를 내려놓겠다는 양위 의사를 밝힌다. 대리청정과 양위 파동을 거치며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태생이 호방한 성격에 학문보다는 무예에 조예가 깊던 사도는 어떻게 해도 아버지의 기대를 채울 수 없음에 괴로워한다. “자식이 잘해야 애비가 산다”고 믿는 영조는 사사건건 아들의 숨통을 조인다.

사도의 어머니 영빈은 사도가 뒤주에 갇혀 죽은 게 아니라 의대증(衣帶症)에 걸려 죽었다고 했을 정도로 그가 용포를 입는 것을 기피했다는 기록도 있다. 영화에도 그러한 사도의 모습이 등장하지만 <사도>는 기록을 재연하는 사이사이에 ‘왜’를 건져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영화에서 사도는 단순히 왕위에 부담을 느껴 기행을 일삼거나 불량한 행실을 타고난 인물이 아니다. 처음에는 임금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세자였고, 고운 심성으로 생모 영빈과 할머니인 대비를 기쁘게 한 효자였으며,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려는 인간이었다. 다만 임금이 아닌 아버지의 인정을 애타게 갈구한 아들이라는 자리가 홀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슬픔과 고통을 안겼다.

반면 영조는 영화에서 사도보다 훨씬 복잡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듯하다가도 자신의 뜻대로 하고 싶어 하고, 아버지와 임금 사이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콤플렉스의 화신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결국에는 궁 안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기어이 아들을 죽인 아버지였다.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복잡한 속내를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풀어내는 것이 <사도>가 해결해야 할 수많은 과제 중 하나였을 텐데,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그 해답을 충실히 내놓았다.

<사도>는 영조와 사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에게 저마다 확실한 명분을 쥐여주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영화다. 특히 작품마다 주체적 여성상을 빚어 넣었던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 안에서도 궁 안의 여성들에게 각자 맡은 바 역할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도록 했다. 혜경궁 홍씨(문근영)는 궁궐에 불어닥치는 피바람 안에서 훗날 정조가 될 아들의 목숨만큼은 지켜야 하는 강인한 여인으로, 영빈(전혜진)은 사도를 향한 애끓는 마음을 안고 있으면서도 세손을 살리기 위해 아들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해야 하는 비운의 어머니로, 인원왕후(김해숙)는 사도를 몰아세우는 영조에게 팽팽하게 맞서며 갈등을 빚는 대비로 등장해 영조와 사도 사이의 갈등을 한층 입체적으로 만든다. 구중궁궐에 갇혀 화려한 무술과 자극적 애정행각으로 포장하기 바빴던 최근 한국 사극영화들을 돌이켜볼 때 비극을 불러온 권력 관계와 각자의 명분을 충실하게 들여다보려는 <사도>의 시도는 반갑다.

<사도>는 웰메이드 영화의 거의 모든 조건을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배우들의 연기는 그들 필모그래피에서 새로운 정점으로 기억될 만하다. 이 영화에서 영조가 얼음이라면 사도는 불이다. 서릿발과 불꽃이 팽팽하게 맞부딪치는 기운을 만든 것은 영조를 연기한 배우 송강호와 사도를 연기한 배우 유아인의 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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