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의 비밀] 보고서 예쁘게 만들려고 야근해야 하나
  • 구병철 | Mercer Korea 팀장 (.)
  • 승인 2015.10.22 14:29
  • 호수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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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는 직장생활 승부처…‘보고서’보단 ‘보고 내용’이 더 중요

#1. 김 과장은 오늘도 밤 10시까지 회사에 남아 있다. 이틀 후에 있을 ‘영업 프로세스 개선’에 대한 보고를 준비 중이다. 보고가 잘된다면 사장님께 올라갈 수 있는 안건이라 한 달 전부터 팀장과 상의해왔다. 수정본만 벌써 열한 번째다. 본사 전략본부에서 줬던 방향과도 맞고 영업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충분히 담았다. 그런데 팀장은 갈수록 고민이 많아지는 눈치다. 이틀 후 보고가 예정된 날 아침, 팀장은 김 과장이 직접 보고하는 건 어떠냐고 묻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저자 직강이 설명하기에는 낫겠지’라는 생각에 직접 보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슬프게도 보고는 실패했다. 본부장은 논리의 근거를 하나하나 묻더니 “타당성이 떨어진다”며 다시 검토하라고 했다. 팀장은 수고했다며 어깨를 토닥였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다시 한 번 해봐야지’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저녁 무렵 술자리에서 같은 팀 이 차장이 한마디 하기 전까지는. 이 차장의 말은 이랬다. 전략본부의 가이드를 본부장이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는 것, 그리고 팀장은 보고 내용에 자신이 없으면 실무자에게 직접 보고하게 시킨다는 것.

 

#2. 박 팀장은 상무와 함께 17층 대회의실 옆방에서 대기 중이다. 여러 개의 작은 모니터 중 하나를 유독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오늘은 사장과 부사장들이 참석하는 경영회의가 있는 날이고, 11시부터 30분 정도 박 팀장의 보고가 예정돼 있다. 무려 두 달간 준비했고 보고서를 몇 번이나 수정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다. 시계는 11시5분. 앞 보고가 조금 늦어지는 분위기다. 화면을 보니 부사장 한 사람이 계속 질문을 던진다. 시간 지연은 늘 있는 일이지만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장은 11시40분부터 점심 일정이 있고, 내일부터는 일주일간 해외 출장을 간다. 앞 차례 보고가 11시30분이 다 돼서야 끝났다. 결국 보고를 하지 못했고 상무는 사장의 스케줄과 차후 경영회의 일정을 바로 확인했다. 2주 후 월요일 아침 7시30분부터 30분 정도를 간신히 밀어넣었다. 남은 2주 동안 보고서는 또 수정될 것이 빤하다. 박 팀장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다음 주엔 아이들과 약속을 몇 개 잡았는데 취소해야 할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상무는 당장 오후에 방으로 오라고 했다. 슬픈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는다.

 

ⓒ 시사저널 임준선

직장 보고는 ‘독자-편집자-저자’ 구조

우리네 기업 보고는 종합예술에 가깝다. 쟁점 포착, 내용의 논리적인 구조화, 논리 입증에 필요한 근거나 데이터를 구성하는 능력, 핵심만 골라 요약하는 기술. 보고서에 쓰이는 기술 외에도 윗사람들의 분위기, 시시각각 변하는 방향, 적절한 보고 시간과 스케줄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의 보고가 잘되기 위한 조건을 모두 갖추기란 쉽지 않다. 내 앞의 보고가 잘 끝났는지 질책을 받았는지도 신경 써야 한다. 오죽하면 보고 전 비서에게 “오늘 사장님 기분이 어때?”라고 먼저 확인하고 보고 결과를 짐작하기까지 할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보고는 직장생활의 꽃이자 중요한 승부처이기도 하다. 상사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하는 업무는 매일매일 열심히 한다고 해서 표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윗사람과 직접 대면하는 그 한순간에 나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역량이 평가를 받는다. 보고가 잘 끝나면 한 주간 기분이 좋고, 반대의 경우엔 한 주간 머리가 아프다.

이런 환경인지라 사장이나 고위 임원의 주된 일은 보고를 ‘받는 것’이고, 실무 임원이나 팀장의 일은 보고서를 ‘고치는 것’이며, 팀원의 일은 보고서를 ‘쓰는 것’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정확히 독자-편집자-저자의 구조와 일치한다.

보고서와 관련한 업무량은 어마어마한데 이게 많아지는 까닭은 세 계층 모두에게 있다. 일단 기업 내 독자는 너무 바쁘다. 외부 미팅이나 현장 방문처럼 오롯이 보고서만 읽고 있을 시간도 없으니 잘 정리된 요약본을 원한다. 이 보고서의 편집자는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다. 이 편집자들은 편집 방향이 일치한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래서 편집 방향도 수시로 바뀐다. 그 탓에 저자는 본문을 다 쓰고 나서도 요약본 만드는 데 하루를 더 소비하고, 수차례의 퇴고 의견을 받아 묵묵히 수정하다가 이 글이 내 글인지 대필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도 있다.

저자가 편집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핵심만 깔끔하게 요약해서 잘 써내면 되지 않느냐고? 정말 뒷목 잡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지적이다. 정말 잘 쓴 글이라 해도 여러 명의 편집자가 조금의 수정도 없이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편집자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한다. 어떤 때는 10번 정도 수정했더니 맨 처음 버전으로 돌아올 때도 있다.

이쯤 되면 보고서 수정은 수정하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직장관과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유체이탈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저자 역시 윗분들의 스타일에 적응하다 보니 점점 보고서에 투입하는 시간을 늘리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일부러 늦게까지 남아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였더니 수정 의견이 줄어드는 경험을 하고 나면, 보고 준비 기간에 정시 퇴근은 생각조차 않는 학습효과가 생긴다.

파워포인트 없앴더니 생산적인 몰입 가능

필요한 건 사실 ‘보고서’가 아니라 ‘보고’ 그 자체, 그리고 생각과 논리가 중요한 분위기와 문화다. 이런 건 위에서부터 강제적인 방법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이미 몇몇 기업에서는 사장의 지시로 이메일이나 구두 보고를 기본으로 하고, 요약한 파워포인트 보고서를 없애고 근거 데이터만 보면서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심지어 이런 문화를 제대로 정착시키기 위해 파워포인트(만악의 근원이다)를 강제로 쓰지 못하도록 했다. ‘아이디어를 보고서에서 밖으로 끄집어내자’가 목적이었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변화를 어려워하더니 점점 장점을 인식했다고 한다. 물론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하니 보고가 더 어려워진 것 같다는 건 함정이다. 하지만 이왕 일에 몰입할 것이라면 더 생산적으로 몰입하자는 취지니 보고서 예쁘게 만드느라 야근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없애진 못하더라도 보고서 양을 줄이려는 시도도 있다. ‘1 page report’가 한때 유행했는데 결과적으로 보고서 업무량을 줄이는 데 큰 효과가 없었다. 해보니 첨부 문서만 수십 장이 붙으면서 정말 1장만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수십 장을 한 장으로 요약하느라 며칠이 걸리면서 편집자들의 펜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보고 한 번에 일희일비하는 우리 직장인들이 기왕이면 내용으로 진검승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좋으련만. 물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금의 저자들(직원)이 후에 편집자(팀장)가 됐을 때 효율적으로 펜을 드는 것이겠지만, 그게 또 어디 쉬울까 싶다. 결국은 이렇게 마무리돼야 할 것 같다. 부탁합니다, 독자(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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