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범죄’ 외로운 당신을 노린다
  • 김경민 기자 (kkim@sisapress.com)
  • 승인 2015.10.29 16:07
  • 호수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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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멀다 하고 보도되는 분노범죄. 전문가들은 오늘날의 분노범죄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 구조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주문한다. 단순 보복심이나 순간적인 충동에서 발화된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심리적·사회적 극단으로 내몰린 가해자를 품고 있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분노범죄는 현대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제든지 그 피해자 혹은 가해자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우리가 분노범죄를 사회적 범죄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2015년 대한민국은 이른바 ‘분노범죄’로 몸살을 앓고 있다. 분노범죄는 타인이나 사회적 환경에서 자신에게 미치는 스트레스와 상대적 박탈감을 이기지 못한 채 분노가 폭발하면서 폭력적인 행위를 하거나 나아가 방화나 살인 등 극단적인 사건을 저지르는 것을 말한다. 과거 분노범죄는 가정 내 갈등에서 비롯된 경향이 강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묻지 마 범죄’ 등 불특정 다수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고 있다. 누구나 분노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는 공포가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 갈등이 빈번해지면서 현대인 누구나 분노범죄의 표적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은 곱씹어볼 만하다. 연일 대한민국을 공포로 몰아넣으면서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분노범죄를 집중 해부했다.

지난 9월20일 경북 안동시 남선면의 한 아파트에서 주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아파트의 주민 A씨(55)가 집 안에 가스를 틀어놓고 자살하겠다며 소란을 피운 것이다. 그는 방문을 모두 실리콘과 테이프로 밀봉한 채 물 호스와 연결한 보일러 가스 배관을 각 방으로 넣어 가스를 채웠다. 가스가 찬 집 안에서 그는 라이터를 켰다. 1차 폭발이 일어났고 정신이 몽롱해진 그는 가스를 피해 4층 창문 밖으로 투신했다. 이후 한 차례 더 폭발이 일어나면서 그를 구조하기 위해 아파트 실내로 투입됐던 소방대원 한 명이 안면에 2도 화상을 입었다. 가스 폭발을 시도하다 창문 아래로 떨어진 A씨는 다리 골절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 일러스트 임성구

보복 운전·층간 소음 시비가 범죄로

이 사고의 용의자이자 피해자인 A씨는 최초 신고자이기도 했다. 그는 가스 폭발 시도 후 “가스 누출로 숨 쉬기가 힘들다”며 경찰에 출동을 요청했다. 목격자들은 그가 화재를 피해 아파트 아래로 뛰어내린 뒤에도 목에 감긴 노끈을 조이려 했다고 말했다. 겉보기에 이 사건은 층간 소음이 불러일으킨 여느 분노범죄와 다를 바 없었다. 목격자들은 A씨가 투신하기 전 “층간 소음이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최근 보복 운전, 아파트 층간 소음 등 과거에는 생각지 못했던 이유로 범죄들이 발생하고 있다. 사소한 시비 혹은 누적된 갈등이 순간적으로 격화되면서 범죄로 비화되는 분노범죄다. 지난 10월1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인 임수경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보복 운전 적발 현황’ 자료에 따르면, 경찰이 보복 운전 통계를 관리하기 시작한 지난 6월1일부터 8월9일까지 발생한 보복 운전 적발 건수는 총 398건에 달했다. 적발된 건수만 봐도 한 달에 약 200건, 하루에만 6건 이상씩 발생했으며, 보복 운전으로 검거된 인원은 408명(구속 5명)에 이른다. 차 경적을 울렸다는 이유로, 차선을 갑자기 변경했다는 이유로 상대 운전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보복 운전 관련 사건·사고는 최근 들어 삼단봉·칼·쇠파이프 등 흉기까지 동반하며 중대 범죄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과거 사소한 이웃 간 갈등 정도로만 여겨졌던 층간 소음으로 인한 다툼도 지난 몇 년 사이 급증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이자스민 의원(새누리당)이 환경부에서 제출받은 ‘최근 4년간 소음 관련 민원 및 처분 현황’ 자료에 따르면, 층간 소음 민원은 2012년 7021건에서 2014년 1만6370건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층간 소음으로 인한 다툼이 폭행·살인으로까지 번지는 경우도 발생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분노범죄 피의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주된 감정은 좌절감입니다. 장기 실업 상태, 지속적 사업 실패 등을 겪으면서 사회 구조 속에서 실패를 맛볼 때, 마음속에 좌절감이 쌓인 상태에서 촉발 인자를 만나면 걷잡을 수 없는 형태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분노범죄는 때론 ‘묻지 마 범죄’ 등 불특정 다수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2012년 8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흉기 난동 사건의 피의자가 현장에서 사건 당시를 재연하고 있다. ⓒ 연합뉴스

홧김에 범행…힘들어도 말할 곳 없는 ‘외톨이’

한국심리상담센터 윤영준 소장은 최근 분노범죄의 피의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주된 심리 상태로 ‘좌절감’과 ‘사회적 소외감’을 꼽았다. 안동 아파트 가스 폭발 사건의 용의자 A씨 역시 그런 경우였다. A씨는 평소 자주 만나는 친구도, 연락하는 친척도 없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그는 2년 전부터 11평 남짓한 이 아파트에 혼자 산 것으로 알려졌다. 이웃 주민들은 평소 그를 거의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층간 소음 문제로 인한 갈등도 표면화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A씨는 왜 자신이 분노한 원인으로 ‘층간 소음’을 지목했을까.

한국범죄심리학회 전대양 교수(가톨릭관동대 경찰행정학)는 “‘층간 소음’은 그의 감정을 폭발시킨 ‘촉발 요인’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용의자가 스스로 경찰에 신고했다는 점에서 주변에 자신의 상태를 알리려는 심리를 강하게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극단적이긴 했지만 결국 ‘누가 날 좀 봐달라’는 사인이라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분노범죄를 저지른 피의자들 가운데 많은 경우에서 이 같은 심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난 5월 발생한 층간 소음으로 인한 폭행 사건의 변호를 맡은 임영화 변호사는 “(피고인은) 평소 불만 사항이 있어도 속으로만 쌓아두고 있었다”며 “차라리 일찍 갈등을 표면화했다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분노범죄가 새로운 범죄 유형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분노범죄가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이유는 그 기저에 사회 구조 속에서 느끼는 깊은 좌절감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발생하는 분노범죄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말다툼, 보복 운전 등 범죄의 1차적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들은 대개 ‘촉발 인자’인 경우가 많다. 사건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평소 피의자 내면에 쌓여온 더 큰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 울산에서 발생한 ‘묻지 마 범죄’의 20대 피의자는 범행 직전 아버지로부터 “돈 좀 벌어오라”는 핀잔을 들었고, 그에 앞서 오랫동안 실업 상태에 놓이며 불안감이 누적돼오고 있었다. 지난 5월 층간 소음에 불만을 품고 흉기로 이웃에 상해를 입힌 50대 피의자는 가정불화와 사업 실패로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9월20일 경북 안동시 남선면 4층 아파트에서 A씨의 자살소동으로 화재가 발생해 119대원들이 진화 작업 중이다. ⓒ 뉴스1

‘촉발 인자’ 정형화 어려워

문제는 분노를 촉발시키는 ‘촉발 인자’가 정형화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범죄자의 화를 촉발시킨 상황 혹은 상대’가 개인별로 다를 뿐만 아니라, 동일 인물이라도 시시때때로 달라진다. ‘분노’라는 감정이 언제 무엇을 계기로 발생하는지 규명할 수 없기 때문에 분노범죄는 예방하기가 어렵다. 분노범죄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방안이 마련되기 쉽지 않은 이유다.

다만 정신과 전문의들은 ‘홧김에’ ‘순간 울컥해서’라는 말 뒤에 피의자가 놓여 있었던 맥락에 대한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전대양 교수는 “아무런 문제가 없던 사람이 갑자기 화가 나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많지 않다”며 “겉으로 드러난 잘잘못뿐만 아니라 사고가 발생하게 된 배경에 대해 깊숙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분노 유발자’ 처벌?…개인 양심에 맡겨야 


“차량번호 0X0X. 저 아줌마는 끼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끼워줬으면 고맙다고 깜빡이라도 켜는 게 예의 아닙니까.”

“맘에 안 들어서 뒤에서 확 따라붙었습니다. 운전자 얼굴 확인하려고 옆 차선으로 붙었더니 슬금슬금 속도를 늦추네요. 아침부터 성질 건드리네.”

“윗집 정말 시끄러워 못 살겠습니다. 뉴스 보니까 찾아가서 항의하면 오히려 제가 처벌받는다던데, 층간 소음 복수할 방법 없을까요?”

“윗집 향해 천장에 공 던지기, 청국장 냄새 풍기기, 천장에 못 박기(드릴로 박으면 좋아요ㅎㅎ)”

 

인터넷에서는 ‘분노 유발자’를 성토하는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 인터넷 중고 자동차 사이트 게시판에는 차량번호를 가리지도 않은 ‘분노 유발 차량’ ‘얌체 운전 차량’의 사진이 버젓이 올라와 있었다. 블랙박스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아예 동영상이 게재되기도 한다. 이런 글 아래에는 해당 차량을 향한 비난의 글들이 줄줄이 달려 있다. 대부분 ‘분노 유발 운전자’에 대한 혐오가 담긴 댓글이다.

생활정보 공유 블로그에는 층간 소음 복수하는 법에 대한 글이 돌아다니고, 어느 중소기업에서는 아예 ‘층간 소음 복수 상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천장에 스피커를 달아 위층에서 일정 정도 이상의 소음이 발생하면 위층에 그대로 진동과 소리를 되돌려주는 보복 상품이다.

인터넷에 ‘분노 유발자’를 성토하는 글을 올리는 이들 가운데는 상대방에 대한 법적 처벌을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이 ‘분노 유발자’라 부르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정신적·물리적 고통을 가했다는 이유에서다.

층간 소음으로 고통받는 쪽이 법정에 서면 가해자가 되는 현 상황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소음진동피해예방시민모임 강규수 대표는 “지금은 층간 소음을 처벌할 법적 장치가 없어서 층간 소음으로 갈등이 발생하면 소음에 항의한 사람이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소음 역시 폭력이므로 일상 소음 규제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분노 유발자’에 대한 처벌은 가능할까. 현실적으로 ‘분노 유발자’에 대한 법적 제재는 불가능하다. ‘분노 유발자’가 처벌 대상이 되려면 그가 고의적으로 분노 유발 행위를 했으며 그로 인해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사실상 입증이 어려운 부분이다.

보복 운전의 경우 그 책임 소재를 따지기가 더 힘들다. 대다수의 ‘분노 유발’은 운전 미숙으로 인한 경우가 많은데, 미숙함은 법적 처벌의 근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법무법인 더샘 김광삼 변호사는 “사고 가해자 혹은 ‘분노 유발 피해자’가 주장하는 근거가 보통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기준에 의한 경우가 많아 처벌 근거로 삼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 현직 교통경찰관은 “분노 유발자라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서는 남을 배려하고 공중질서 및 규정을 준수하려는 태도를 가지는 등 개인의 양심에 기대하는 것 외에는 현실적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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