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대계가 만든 진격의 황금세대
  • 서호정 | 축구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11.05 16:51
  • 호수 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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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철의 U-17 대표팀 돌풍 밑거름에 K리그의 ‘유스 시스템’과 축구협회의 ‘골든에이지’ 프로그램 자리

2002 FIFA(국제축구연맹) 한·일월드컵은 대한민국 축구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점이다. 아시아를 호령한다면서도 막상 세계 무대에만 서면 늘 작아지던 한국 축구는 ‘월드컵 4강’에 진출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4강 신화의 설계자이자 지휘자였던 거스 히딩크 감독은 대회 후 네덜란드로 돌아가며 “한국 축구의 진짜 시험은 지금부터다. 이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미래를 만들어가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개최국의 이점을 등에 업은 반짝 성과로 평가절하되지 않으려면 세계와 경쟁할 지속적인 동력을 마련해야 한다는 뼈 있는 충고였다.

4강 신화의 이면에는 선수들을 소속팀에서 빼 와 6개월 가까이 합숙을 하며 얻어낸 비정상적인 과정이 있었다. 할 수 있다는 희망과 그것을 유지해야 한다는 과제를 동시에 받은 한국 축구는 고민에 빠졌다. 답은 간단했다. 인프라와 시스템을 구축해 좋은 지도자와 선수를 꾸준히 길러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간단한 일이 가장 어려웠다. 결과물을 낼 때까지 꾸준한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빠른 시일 내에 가시적 성과를 내길 바라는 한국 사회의 특성상, 분야를 막론하고 시스템 구축은 늘 시간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만다. 대한축구협회를 중심으로 한국 축구의 구성원들은 히딩크 감독의 충고를 새겨듣고 시스템 구축을 위한 과제를 하나씩 해결해갔다.

10월23일 U-17 칠레월드컵 16강 벨기에전을 앞둔 대표팀 선수들이 티에라스발란카스 경기장에서 공식 훈련에 앞서 각오를 다지고 있다. ⓒ 연합뉴스

조별리그에서 보여준 안정감 인상 깊어

4강 신화가 쓰이고 13년이 지난 2015년 10월. 한국 축구는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칠레에서 열린 FIFA U-17(17세 이하) 월드컵에서 최진철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U-17 대표팀은 조별리그 1위를 차지하며 16강에 가볍게 진출했다. 브라질·잉글랜드·기니와 함께 ‘죽음의 조’에 묶여 성과를 내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2승 1무의 무패 기록으로 예선 2경기 만에 조기 통과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첫 경기에서 ‘축구 왕국’ 브라질을 1-0으로 꺾은 어린 태극전사들은, 기세를 타고 2차전에서도 기니를 1-0으로 꺾었다. 잉글랜드전에서도 시종일관 주도권을 쥔 끝에 0-0으로 끝내며 한국축구 사상 처음으로 FIFA 주관 대회에서 무실점으로 조별리그를 마치는 기록을 썼다. 대회 전 팀의 주축인 장결희가 부상으로 이탈하는 악재를 딛고 오히려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낸 것이다.

비록 10월29일 아침(한국 시각) 열린 16강전에서 벨기에의 역습에 무너지며 0-2로 패배해 U-17 월드컵 최고 성적인 8강을 넘어서는 데는 실패했지만, 조별리그에서 보여준 안정감은 역대 어떤 대회보다 인상 깊었다. 이 성과가 갖는 의미는 2002년 성공 이후 한국 축구에서 가장 큰 도전이었던 시스템 구축에 의해 이런 결과를 얻었다는 점이다. 외국인 감독이나 특출한 스타 한두 명에 의존하지 않고 시스템이 길러낸 지도자와 다수 선수가 한국 축구에 장밋빛 미래를 제시했다. 한국 축구 최초의 백년대계(百年大計)가 맺은 열매는 달콤했다.

21명 중 17명이 프로 산하 유스팀 소속

당초, 바르셀로나 유스팀 소속인 이승우의 ‘원맨팀’인 줄 알았다. 그런데 U-17 대표팀은 대회에 들어서 황금세대임을 증명했다. 브라질전과 기니전에서 골을 넣은 장재원과 오세훈을 비롯해 김정민, 이상민, 유주안, 박상혁, 김진야 등 다양한 선수가 맹활약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돌풍의 밑거름에는 유망주를 길러내는 양대 시스템이 있었다. 바로 K리그의 ‘유스 시스템’과 대한축구협회의 ‘골든에이지’ 프로그램이다. 이른바 ‘투 트랙’ 방식이다.

K리그의 프로팀들이 산하 중·고교에서 수준 높은 교육과 관리로 유망한 선수를 배출하고, 대한축구협회는 그 선수들을 추려내 어린 나이부터 집중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다양한 국제 경험을 제공하며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독일이 20년 전 큰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유스 시스템에 집중 투자하고 권역별 훈련센터를 마련해 전국의 인재를 관리하며 지난해 브라질월드컵에서 우승한 전략과 닮아 있다.

과거 한국 축구의 인재 육성은 극소수의 엘리트에 집중됐다. 차범근·최순호·황선홍·이동국·이천수·박주영 등 탁월한 유망주가 배출되긴 했지만, 뛰어난 레벨의 선수가 무더기로 나온 세대는 드물다. 1~2명의 에이스에 의존하는 축구는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됐다. 최대한 많은 유망주가 양질의 교육을 균일하고 지속적으로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한국 축구 피라미드의 최상부에 있는 프로축구부터 손을 볼 필요가 있었다. 수억 원대 계약금을 주고 학원축구에서 선수를 데려올 게 아니라, 그 돈을 투자해 직접 키우는 방식이 채택됐다. 프로구단 포항 스틸러스, 전남 드래곤즈 정도가 운영하던 유스 시스템은 2009년부터 전 구단 U-18팀(고등학교) 의무 보유 규정으로 확대됐다. 2013년부터는 U-18팀뿐만 아니라 U-15팀(중학교), U-12팀(초등학교)까지 확대됐다. 올해 창단한 2부 리그의 서울 이랜드를 제외한 22개 프로구단이 유스팀에서 양성하고 있는 선수는 총 2284명이다.

이들은 프로구단이 임명한 감독들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는다. 과거 문제가 됐던 학부모 회비로부터도 자유롭다. 프로 구단이 운영하는 수준 높은 시설과 관리를 통해 선수가 성장한 것이다. 여기에 투자되는 비용은 연간 130억원 규모다. 프로축구연맹은 프로 산하 유스팀끼리 시즌 동안 지속적으로 치르는 K리그 주니어리그를 연다. 프로선수들처럼 매주 1~2경기씩을 소화하며 경기 운영 능력을 키운다. 과거 토너먼트 대회 일색이던 한국 학원축구는 승리에 목을 맨 경기 운영으로 기본기와 창의성을 지닌 선수들을 사장(死藏)시킨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프로 산하 유스팀들은 진학을 위한 눈앞의 성적이 아니라 프로선수가 될 수 있는 기량 향상에 초점을 맞춰 리그전을 치르면서 이전과는 다른 세대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번 U-17 월드컵에 참가한 21명의 선수 중 17명이 모두 프로 산하 유스팀 소속이다. 엔트리의 81%에 해당한다. 지난 2009년 대회 당시 7명(33%)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증가다. 그만큼 현재 한국 축구의 인재 양성이 프로 산하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골든에이지 1세대가 이번 U-17 대표팀

대한축구협회가 운영하는 골든에이지 프로그램도 큰 동력이다. 대한축구협회는 한·일월드컵 수익금을 바탕으로 파주NFC 외에도 전국 3개 지역에 트레이닝센터를 마련했다. 천안축구센터(충청·강원), 목포국제축구센터(호남), 창원축구센터(영남)가 그것이다. 이들 광역권 트레이닝센터 구축으로 전국의 유망주들을 모아 실시하는 훈련이 가능해졌다. 이때부터 각급 대표팀이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2009년 U-20 대표팀과 U-17 대표팀이 세계 8강에, 2011년과 2013년 U-20 대표팀이 16강과 8강에 각각 올랐다. 대한축구협회는 2013년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축구 강호의 유소년 육성 정책 사례를 분석해 한국형 정책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골든에이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연간 25억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골든에이지의 1세대가 바로 U-15 대표팀부터 수혜를 얻은 이번 U-17 대표팀이다.

골든에이지는 3단계 피라미드형 훈련 및 선발 방식의 모델을 갖춘다. 1단계로 21개 시·도 지역센터에서 지역 지도자와 축구협회 파견 지도자에 의해 월 2회 교육이 진행된다. 여기서 검증된 유망주들은 2단계 교육으로 넘어가 5개 광역센터에서 축구협회 전임(專任) 지도자에 의해 연간 2회 전술 위주 훈련을 실시한다. 마지막 3단계는 축구협회 영재센터인 파주NFC에서 진행된다. 연간 2회 합숙훈련을 통해 기술과 전술을 심화한다. 이 과정이 매년 진행되면서 연령별 유망주를 파악하게 된다. 기존 상비군 체제는 400명가량의 선수를 파악했지만, 현재 골든에이지는 그 10배가 넘는 4500여 명을 대상으로 한다. 더욱 풍부해진 인재풀에서 검증된 선수들로 구성된 대표팀은 집중적인 국제 경험을 제공받는다. 이용수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사실 우리와 유럽의 유망주들 간에 기술 차이는 적다. 문제는 경기 운영 능력과 경험인데, 다양한 국제대회 참가를 통해 해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대표팀 멤버들도 독일·프랑스·멕시코 등에서 유럽과 남미, 북중미 강호들과 경기를 치렀다. 그 경험이 이번 조별리그에서 뛰어난 안정감을 발휘하는 원천이 됐다.

 

 

10월28일 벨기에와의 16강전에서 패배한 후 낙담한 이승우와 함께 그라운드를 떠나는 최진철 감독. ⓒ 연합뉴스
이번 FIFA U-17(17세 이하) 칠레월드컵 대회 전까지 대한민국의 U-17 대표팀은 선수만 주목받는 팀이었다. 이승우와 장결희라는 바르셀로나 유스팀 소속의 유망주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다. 특히 이승우는 성인 대표팀 이상의 화제를 몰고 다녔다. 오히려 팀을 이끄는 최진철 감독에 대한 기대는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회를 마친 현재는 스포트라이트가 최 감독에게 쏟아지고 있다. 그만큼 대회 동안 보여준 지도자로서의 역량이 인상적이었다.

‘강력한 압박’을 모토로 빠르고 섬세한 공격 전환을 펼친 대표팀의 플레이는 찬사를 받았다. 브라질은 한국의 압박에 걸려 화려한 공격력을 전혀 선보이지 못했다. 감독의 교체 전술도 인상적이었다. 기니전에는 이승우를 대신해 투입한 오세훈이 결승골을 뽑아내며 믿음에 보답했다. 선수들의 눈빛만 봐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정도로 어린 선수들과의 교감 역시 좋았다. 기술적 이해뿐만 아니라 심리적 이해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인 셈이다. 지난해 4월 아시아 예선을 5개월 앞두고 감독을 맡았지만, 이질감 없이 지도할 수 있었던 것도 애초에 최 감독이 전임 지도자로 관리한 선수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감독 최진철을 키운 것 또한 시스템과 투자의 힘이었다. 2002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최진철은 2007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착실히 지도자의 길을 밟았다. 2009년 새로 창단한 프로구단 강원 FC의 코치로 합류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2012년부터 대한축구협회 전임 지도자로 변신했다. 2000년 도입된 전임 지도자 제도는 유소년 육성을 뒷받침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아무리 뛰어난 자질의 선수가 있어도 그들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 지도자가 없다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타플레이어들은 전임 지도자를 거의 맡지 않는다. 처우가 프로팀 산하 코치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진철 감독은 프로에서 부르는 곳이 있었지만, 전임 지도자를 택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밑바닥부터 제대로 단계를 밟겠다는 자신의 의지가 만든 선택이었다. 축구협회도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처우를 대폭 개선했다. 연봉을 높이고 계약도 기존 1년에서 2년으로 늘렸다. 지방 출장비용도 책정했다. 현재 16명의 전임 지도자를 확보했는데, 이들은 각급 대표팀과 광역별 센터의 유망주들을 관리한다. 최 감독을 보좌하는 3명의 코치(김경량, 김정우, 차상광)도 모두 전임 지도자들이다.

유소년 육성 시스템에 힘이 실리면서 최진철팀 코칭스태프는 한마음 한뜻으로 U-17 월드컵을 준비할 수 있었다. 육성 철학도 같다. 김종윤 축구협회 기술연구팀장은 “지난해 초와 올해 약 5개월에 걸쳐 전임 지도자들이 모여 훈련 프로그램을 짤 때 계급장과 나이 떼고 치열하게 토론하더라. 그럴 때 의미 있는 결과물이 나온다”며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감독·코치가 확실히 공유하고 있다는 점은 큰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최진철 감독의 압박 축구를 완성시킨 것은 체력 훈련이었다. 애초에 한국 축구는 유소년 단계는 물론 성인 단계에서도 피지컬 코치의 존재가 없다시피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레이먼드 베르하이엔 코치가 도입한 파워 프로그램이 4강 신화를 뒷받침하면서 피지컬 코치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이번 U-17 대표팀은 전담 피지컬 코치를 두며 폭발적인 체력과 스피드, 기동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재홍 피지컬 코치는 2011년부터 대표팀 선수들을 관리하며 체계적으로 피지컬 관리를 해왔다. 베르하이엔 코치의 이론을 한국적 현실에 접목시킨 이재홍 코치는 중추근육 강화 훈련에 집중하며 체력의 기초를 닦았다. 12세 전까지는 기술적 레벨을, 16세 전까지는 심폐 지구력 강화를, 20세 전까지는 신체적 조건을 완성해야 한다는 유소년 축구의 세계적 기준에 충실한 과정이었다. 이 역시 4년간의 지속적인 투자와 뒷받침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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