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서거] ‘금융실명제 vs 외환위기’ 김영삼 전 대통령의 뚜렷한 명암
  • 이민우 기자 (woo@sisabiz.com)
  • 승인 2015.11.22 10:12
  • 호수 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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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 주도, 과감한 개혁으로 문민시대 열어…측근비리·외환위기 초래 비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0시 20분께 서거했다. 향년 88세.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부터 서울대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는 도중 병세가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다. 2012년 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상도동 자택에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신년인사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사진=뉴스1

22일 오전 향년 88세로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는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린 ‘문민 대통령’이라는 찬사와 측근 비리와 외환위기를 부른 ‘경제실패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함께 따라붙는다.

199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 전 대통령은 문민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하며며 정치개혁을 실시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지 31년 만에 대한민국에 문민시대를 연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강한 개혁을 추진했다. 1993년 고위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1급 이상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했다. 고위 공무원이 재임기간에 재산을 부당하게 증식하지 말라는 취지였다. 그는 자신의 재산도 공개하고 일체의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역사바로세우기 운동도 전개해 1996년에는 일제시대의 상징이던 조선총독부 건물이던 중앙청을 철거했다.

전임 대통령의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역사의 죄를 물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수사에 착수했고, 1997년 대법원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군사반란 및 내란 혐의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확정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내란 및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기소돼 1997년 대법원에서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 원의 형을 확정받았다.

신군부 정권을 청선하기 위한 군(軍) 개혁에도 박차를 가했다. 1979년 12·12 쿠데타를 주도한 이후 군을 장악해온 사조직 ‘하나회’를 해체시켰다. 독재정권 시절 비밀스런 권력의 상징이던 안가를 철거하고 청와대 앞길도 개방했다.

특히 경제 분야에선 금융실명제를 도입한 것이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김 전 대통령은 검은 돈의 뿌리를 뽑겠다며 1993년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다. 금융실명제는 금융거래의 투명성과 형평 과세를 통해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또한 1995년부터 ‘세계화’를 내걸었고, 1996년 9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가입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 달성한 한국인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임기 중 경제 위기를 불러 왔다. 김 전 대통령의 급속한 대외개방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신청을 하면서 큰 혼란을 가져왔다.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고, 실업자들이 양산됐다. 대내외적으로 ‘한국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비난을 받았다. 정권 말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시켜 정국을 혼란으로 몰아간 것도 흠이다.

1997년 2월 정권 말에는 아들인 김현철 씨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국정농단’ 혐의를 받던 차남 현철씨가 체포돼 김 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것은 문민정부 몰락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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