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과 ‘6·25 남침 사과’ 합의까지 됐었다”
  • 이호 | 프리랜서 기자ㆍ다큐 작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5.12.10 00:02
  • 호수 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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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YS가 밝힌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 비화… YS 생전 인터뷰 <上>
1994년 6월18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왼쪽)이 방북 직후 청와대를 방문해 김영삼 대통령을 만났다. © 연합뉴스

MBC 라디오 <격동 30년>을 집필했던 이호 작가는 생전에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가장 오랫동안 인터뷰를 한 작가였다. 이 작가는 본지에 YS의 생전 인터뷰 내용을 기고하면서 “필자는 생전에 YS를 자주 만났고, 만날 때마다 기록을  위해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보관해두었다. 이제 그 숱한 녹음테이프들을 다시 풀어, 생전 YS의 육성을 시사저널을 통해 공개하고자 한다. 그와의 인터뷰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틈틈이 이뤄졌다”고 밝혔다. 시사저널은 이 작가의 YS 인터뷰 내용을 2회에 걸쳐 내보낸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화술은 정말 특별하다. 힘이 있다. 둘러대지도 않고 은유법을 쓰지도 않는다. 필자는 상도동계 인물들과 동교동계 인물들을 두루 만나봤지만 DJ도, 전두환 전 대통령도, 노태우 정권을 포함한 어떤 권력도 YS의 직설(直說) 앞에서는 두 손을 들었다고 했다. 그만큼 YS는 ‘해석의 오류’를 낳을 수 있는 말은 아예 하지 않았다. ‘Y담(야한 농담)’도 곧잘 해서 주위를 웃기곤 했지만, 정론에 들어가면 직설적이었다. 스물여섯 살 최연소 국회의원에서 대통령까지 지낸 정치 9단이라고 하면, 선문(禪問)을 던지듯 아리송한 화법을 구사할 만도 한데 누구를 만나도 대단히 직설적이고 말 속에 계산을 넣지 않기로 유명했다. 정치권의 에피소드지만, DJ가 일대일로 붙어서 말로 이길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 YS라고 했던 것은 유명한 얘기다. 그렇듯 계산을 감춘 언어의 유희 가지고는 YS의 언순이직(言順理直; 말이나 이치가 바르고 옳음)을 당할 수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YS의 전성기 시절 ‘좌(左)동영 우(右)형우’라고 했을 만큼 최측근이었던 최형우 전 의원에게 YS가 일갈했던 말은 지금도 민주계 인사들의 저변에 옛이야기 한 토막처럼 깔려 있다. “최 의원 니는 사람이 좋아서 그런나, 아무나 손잡지 마라. 한국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구별도 안 되게 말하는 사람이 있데이. 머시 그래 복잡할 기 있노. 지역구 하나 달라카는 거 아이가. 빙빙 둘러서 얘기하는 사람치고 속이 음흉하지 않은 사람 없다. 그런 인간은 꼭 사고 친다. 절대 가까이 만나지 말거래이.”

1970년대,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노회한 정객들이 난무하던 그 시대에 이른바 유학파, 호남파, 충청파, 왕사쿠라파, 그리고 은밀히 박정희 정권의 청와대 지원까지 받고 있던 경복궁파까지 제치고 YS가 제1야당의 원내총무를 거쳐 총재까지 됐을 때, 그의 최대 무기는 자금이 아니라 군더더기 없는 설도(說道)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정적(政敵)으로서 맞섰을 때 제명을 당했지만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던 그 유명한 발언도 YS가 아니면 소리칠 수 없는 순백의 저항으로 정치권은 해석했다.

그처럼 YS의 발자취는 술수나 궤변으로 연마된 행보가 아니었다. 차라리 술수를 부리느니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이 그의 이력서를 채우고 있는 민주화운동이었다. 분명 강직하기만 한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내 발음도 영 시원찮제? 나는 옳게 한다고 하는데 갱주(경주)를 국제적인 강간도시(관광도시)로 맹그러야겠다고 그랬다민서 사람들이 웃대?”라고 농을 던질 수 있는 양반이지만 흥정의 계산서를 내밀면서 정치를 한 적은 없는 대인(大人)이었던 것이다.

“DJ의 햇볕정책은 원래 YS 정권 때 나온 용어”

김일성 전 북한 주석 © 조선중앙통신연합

필자와의 여러 번에 걸친 인터뷰 중에서 YS는 먼저 남북 문제에 대해 회고를 했다. 일부 알려진 부분도 있겠지만, 특히 대통령 재임 중에 최고의 정보를 접했던 입장에서 풀어놓는 내용들이어서 놀랍고 충격적인 것이 상당했다. 그중 핵심은 김일성과의 정상회담 관련 내용이었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문득 라이벌 DJ가 생각났는지, 순서 없이 한방 날렸다.

“노벨평화상 공작설 때문에 시끄러벘제? 언론에서도 떠들고 정보 계통에 있었던 김기삼인가 하는 친구가 폭로를 하느니 어쩌니 그라믄서 말이지. 그거는 오래전부터 돌았던 내용이라 특별하지도 않아요. 그런것보다도 내가 여기저기 듣기로 DJ가 최소 5억불을 북한에 줬다고 그래요. 그기 다 국민들한테 나오는 돈인데, 얼마를 줬느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째 돈을 주고 김정일이를 만나나. 그기 있을 수 있는 일이냐 말이야. 이거는 국가의 자존심하고 직결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김정일이가 적의 수괴 아니야. 그런데 대가를 주고 만나? 더구나 정상회담이라 그라믄서. 그라고 태극기도 아니고, 토끼를 그려논 것도 아니고 괴상한 지도를 그려놓고 한민족 깃발이라고. 국민들한테 한 번이라도 물어봤어요? 국민들은 상관없고 저들끼리 만 들어놓은 거 아닙니까? 있을 수가 없는 짓을 한 깁니다.”

노무현 대통령 때도 한반도 깃발은 그대로 사용되었는데요.

“그런 건 노무현이도 마찬가지지요. DJ 때부터 노무현이 때까지 명색이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북한에) 우르르 몰려가서 사진 한 방씩 찍고 와서는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방에 걸어놓고 말이지. 노무현이는 몇 번이나 졸라서 김정일이 겨우 만나고, 그것도 찾아가서 만나고. 그래 놓고 선물도 하나 없이 푸대접만 받고 돌아왔잖아요. 송이버섯 받을라꼬 갔나? 조공 바치는 사람들처럼 무슨 그런 칠푼이 외교가 있어요, 그래.”

YS는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햇볕정책이라는 말도 그래요. 국회 외무통일위원장을 두 번 했던 정재문 의원이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자기가 쓴 책에서도 밝혔던데, 사실대로 말한다면, DJ가 햇볕정책을 마치 자기가 처음 내세운 것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내가 대통령 재임 때 통일부장관을 했던 한완상 교수가 처음 그 용어를 썼어요.”

이에 대해 정재문 전 의원이 전하는 내용은 새로웠다. “DJ 정부가 한반도 평화를 갈망하는 많은 생각 끝에 깊은 통일철학으로 주장한 것처럼 내세우고 있는 ‘햇볕정책’이 실제는 YS 정권 때 나온 용어다. YS 정부의 첫 통일부장관이었던 한완상 교수가 처음 그 용어를 썼다. 그래서 그 일환으로 김영삼 대통령이 형무소에 있던 미전향수 이인모를 북으로 돌려보내고 했던 것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문제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은 YS가 먼저였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현 러시아)을 맨 먼저 방문한 YS가 소련 수뇌급들과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문제를 협의했고(1989년 민주당 총재 시절 방문),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하려고 했던것도 YS가 처음이었다. 당시에는 김일성이 주석이고 북한의 서열 1위였으니까 ‘정상회담’이 맞는 말이다. 그런데 DJ가 만난 김정일은 주석도 아니고 국방위원장일 뿐이다. 더구나 북한의 공식 서열 1위는 김영남 상임위원장이다. 그런데 DJ가 ‘정상회담’을 했다는 것은 난센스다. 외교 용어는 정확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수뇌회담’이라고 제목을 뽑는다.”

만약 각하(당시 필자는 YS를 각하로 호칭했다)께서 재임 중에 김일성을 만났으면 한반도 문제에서 상당히 평화적인 방향으로 큰 진전이 있었을까요?

“틀림없이 있었지요. 그게 사실 내가 재임하면서 있었던 일 중에 제일 안타까운 일인데, 만나기로 한 날을 2주일 남겨놓고 김일성이가 죽었잖아요. 그때 만났으면 김일성이가 굉장히 많은 부분을 반성하고 내가 요구하는 것을 받아들였을 깁니다. 실제로 국군 포로들 문제라든가, 납북 어부들이라든가, 더 올라가서 6·25 남침까지 전부 사과를 하고 돌려보내고 하는 문제가 합의됐었거든요.”

합의가 됐었다는 말씀입니까?

“방북하기 전에 사전 교섭이 있었으니까요. 카터가 평양에서 김일성이를 만나고 돌아와서 내 한테 (김일성이의) 정상회담 부탁을 받고 왔다, 이래 가지고 그기 언제야(*당시 카터가 방북 후 청와대를 찾아 YS를 만난 날은 1994년 6월18일이다), 그때부터 이홍구 통일원장관하고 북한의 김용순 아태위원장이 왕래하면서 정상회담 일정하고 내용에 대해서 폭넓게 협의를 했어요. 그래서 완전히 합의를 한 거지요. 그건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한 게 아니고 당시에 크게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가 다급해서 나를 만나자고 한 거기 때문에 웬만한 건 내가 요구하는 대로 다 듣겠다고 한 깁니다. 그때는 북한의 태도가 완전히, 뭐 180도 달랐으니까요. 근데 지금 김정일이 간뎅이는 DJ하고 노무현이가 다 키워논 건데, 몇 억 불씩이나 갖다 바치고도 국군 포로 하나 구해내지 못하면서 그게 무슨 정상 외교라고, 하여간 희한하고 참 한심해서….”

2000년 6월15일 김대중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 대통령의 평양 출발에 앞서 작별을 아쉬워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카터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기 전에 각하께서는 알고 있었습니까?

“그기 얘기가 좀 있지. 얘기가 좀 긴데, 나도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왜 가는지는 몰랐어요. 나는 카터가 갈 때만 해도 사실 여러 가지로 의심했어. 그때 클린턴이 북한하고 전쟁할라고 그랬어. 바로 연변을 공격할 수 있는 거리에 전함을 띄우고 있었다고요. 근데 김일성이가 아주 전쟁이라면 벌벌 떨고 죽는 거야. 6·25 전쟁 할 때 만주까지 도망친 일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겁을 확 집어먹고 카터를 초청했단 말이에요, 결과적으로. 그래서 나는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던 게 카터고 하니까(* 카터는 대통령 재임 시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했지만, 실제 철수를 실행하지는 못했다), 그런 카터를 의심했기 때문에 클린턴한테 전화를 해서 카터가 간다고 하는데 뭣 때문에 가는 거냐 물었어요. 그런데 클린턴 이야기가 자기도 카터가 가는 게 여러 가지 못마땅하다는 거야. 못마땅한데 미국의 전통적인 것은 전직 대통령이 하는 일에 대해 현직 대통령이 하지 말라든지 이래 못한다는 겁니다. 희한하지. 전직 대통령은 자기 맘대로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카터가 북한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그래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니, 카터가 갈 때 부대사가 있었어요. 이름이 생각 안 나는데(*그는 리처드 크리스텐슨 전 주한 미국 부대사다), 부대사가 우리나라 목포 여자하고 결혼했어. 그래서 한국말을 아주 잘해요, 그 미국 사람이요. 클린턴이 겁이 나서 그 사람을 통역관으로 딸려 보낸다는 거요. 무슨 짓 할지 모르기 때문에 견제하기 위해서. 그래서 즉각 모든 보고를 국무성에 한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요.”

카터가 남북 문제로 가면서 각하한테 연락은 하지 않았습니까?

“했지요. 카터가 가기 전에 나한테 연락이 왔어요. 그전부터 나하고 알거든. 박정희정권 때 나하고 단독으로 만난 적이 있고. 그 사람이 연락이 오기를 자기가 한국에서 하룻밤 자고 평양으로 들어간다, 가기 전에 나를 만났으면 좋겠다, 나도 그게 좋겠더란 말이지. 이 사람이 엉뚱한 소리 할까싶기도 하고. 그래서 내가 청와대로 불러 자기 부인이랑 우리 집사람이랑 네 명이 통역만 두고 점심을 먹었어요. 2시간을 이야기했으니까 얘기가 많았지. 자기가 이북에서 두 번 김일성이를 만나게 되어 있다 이겁니다. 그 결과를 나한테 이야기하고 싶대. 그러라고. 그러고 평양 가서 이틀 자고 한국에 왔어요. 그때 나한테 얘기를 해요. 자기가 오기 전날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했답니다. 자기 부부하고 김일성이 부부하고. 그때까지 김일성이 부인이 누군지 세계가 몰랐어. 김성애라는 이름이 그때 처음으로 세계에 알려진 겁니다. 하여간 거기서 카터가 그랬다는 거요. 김일성이가 겁을 집어먹고 있는 걸 전부 알고 있으니까, 이 긴박한 상황을 풀 수 있는 사람은 남한의 김영삼 대통령뿐이다 그랬다는 거지. 그러니까 김일성이가 ‘당장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게 해주시오’ 그러더라는 거야. 그래서 카터가 협상에는 일가견이 있잖아요. 미국 대통령을 했는데. 차분히 김일성이한테, 정식으로 김영삼 대통령한테 정상회담을 제의하는 거냐, 그랬더니 바로 ‘제의하는 겁니다’ 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보고 우째할거냐고 묻는 깁니다. 그때 나는 흥분하지도 않고 길게 말하지도 않았어요. 내가 ‘그대로 받아들이겠다, 좋다’ 그랬어요. 그러고 대변인 불러서 발표한 깁니다. 그기 세계 뉴스로 나간 거지요. 근데 그날부터 김일성이가 상당히 급하게 서두르는 겁니다, 빨리 만나자고요. 그래서 김용순이가 대표로 판문점에 와서 이홍구 부총리가 통일부장관이었는데 회담을 해서 완전 합의를 봤지요. 날짜까지 다 정해서. 경호까지 경호실끼리 판문점에서 회담을 했고요. 근데 세상에 2주일 남겨놓고 (김일성이) 죽었단 말이에요. 우째 그런 일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참 아쉬워. 그때 김일성을 만났다고하면 한국 역사는 바뀌었을 깁니다.”

각하께서는 김일성 주석을 아들 김정일이 제거했다고 하는 정보는 들은 게 없으십니까?

“그런 이야기는 일본 신문 통해서 봤지요. 우리는 정보보고가 없었어요. 안기부(국정원 전신)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받는데 안기부도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오지 못했어요.”

김일성 주석이 전쟁이 터질까 봐 다급해 했다고 하는 정황을 반추시키는 정보는 사실 당시 유엔군사령부와 외교 채널을 통해 정부 고위층에도 전달되고 있었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국내 일각에서는 단순히 ‘1994년 북핵 위기’라고만 했지만, 정보내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카터가 평양으로 향하기 수 주일 전부터 이미 미국은 항공모함 3척, 전함 33척을 한반도 주변에 결집시켰고, 6월2일부터는 매 시간 한반도 상황을 점검하는 비상체제를 갖추면서 인디펜던스 항공모함과 고속정찰기 SR71을 동원해 북한 상공을 정기 정찰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워싱턴에서는 미군 1개 사단 증파를 협의했었으니까 내부적으로는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에 대비했다는 얘기였다.

북한이 IAEA 사찰단을 내쫓겠다는 협박과 함께 북핵 문제가 불거지면서 촉발된 것이지만, 미국은 단시간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북한을 군사적으로 점령한다는 이른바 ‘작전계획 5027’까지 공개하면서 1차 경고 시그널을 보냈고, 다시 1994년 3월, 핵항공모함인 칼빈슨 호를 일본 요코스카(橫須賀) 기지에 입항시키면서 최후통첩의 시그널을 보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지나고 보면, 섬뜩한 역사의 순간이었다.
(다음 호에 YS 생전 인터뷰 下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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