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 영화’ 뒤에는 1000개가 넘는 스크린이 있다
  • 이은선│<매거진 M> 기자 (.)
  • 승인 2015.12.17 18:53
  • 호수 1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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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의 독과점과 수직계열화 구조로 사장되는 영화 다양성

"1000만까지 충분히 갈 것 같은데?” “1000만은 어렵지 않을까?” 이른바 ‘대작’ 영화의 언론시사회 직후에는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최근 연말 최고 기대작인 <히말라야>와 <대호> 시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히트작을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이 어느덧 당연하게 관객 ‘1000만명’에 맞춰진 것이다. 그런데 이를 터무니없는 짐작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한 해에 1000만 영화가 몇 편씩 탄생하는 게 공식처럼 돼버렸다.

한 영화가 상영관 60~70% 독점하기도

올해만 해도 한국 영화와 외국 영화를 통틀어 이미 세 편의 1000만 영화가 탄생했다. 여름 극장가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쌍1000만’ 기록을 세운 <베테랑>과 <암살> 그리고 봄 극장가를 뒤흔들었던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이하 <어벤져스2>)이 그 주인공이다. 세 편이 모은 관객 수는 3500만명이 넘는다. 물론 흥행의 가장 중요한 동력은 영화의 만듦새다. 안될 영화를 배급으로 아무리 밀어붙인다고 해서 흥행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흥행 잔치가 마냥 공정하게 벌어진 게임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 시사저널 고성준

앞서 언급한 영화들이 차지했던 스크린 수를 한번 살펴보자. <베테랑>과 <암살>의 최다 스크린 수는 각각 1064개, 1519개였다. <어벤져스 2>는 최다 1843개까지 스크린을 확보했다. 상영 횟수로 바꾸면 하루에만 이 영화가 전국적으로 1만 번 이상 상영됐다는 얘기다. 이렇게 모은 <어벤져스 2>의 하루 최다 관객은 115만명이었다. 어떤 영화가 한 달 내내 극장에 걸려 있더라도 만들기 힘든 수치를, 이처럼 어떤 영화는 단 하루에 만들기도 한다. 실제로 <어벤져스 2>와 같은 날 개봉했던 다큐멘터리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최다 스크린 수는 21개, 최다 상영 횟수는 40번이었다. 이 영화가 40번 상영됐던 4월26일에는 총 168명이 관람했다.

국내에는 총 2400여 개의 스크린이 있다. 이 중 60~70% 이상의 스크린을 한 영화가 독식하고 있는 상황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가능할까. 답은 점점 심화되는 독과점 구조에 있다. 국내 메이저 투자·배급사인 CJ E&M과 롯데엔터테인먼트는 극장 체인 CJ CGV와 롯데시네마를 각각 계열사로 둔 대기업이다. 한마디로 투자도 하고, 투자한 영화를 자사 극장에 걸기도 한다. CJ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3대 멀티플렉스의 스크린 점유율은 해마다 상승하고 있다. 2012년 89%, 2013년 91.4%, 2014년 92%를 기록했다. 이들 세 극장의 관객 점유율은 무려 96%를 차지한다.

멀티플렉스 극장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투자와 배급을 함께 담당하는 쇼박스와 NEW 역시 자사가 투자한 영화를 우선적으로 배급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요즘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관객을 최대로 모을 수 있는 최적의 배급 시기를 고려해 개봉 날짜를 결정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기업이 투자·배급한 화제작이 개봉하는 주에는 다른 영화들이 모두 몸을 사려 개봉을 당기거나 늦추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우리보다 영화산업이 앞선 할리우드의 경우는 어떨까. 독과점 및 대기업 수직계열화 구조는 사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것이다. 과거 메이저 영화사들은 한 편의 영화로 최대의 이익을 올리길 원했다. 급기야 직접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해 자사의 체인 극장에 거는 구조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할리우드에서는 이 같은 방식이 1940년대에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일명 ‘파라마운트 판례(Paramount case)’에 따라서다. 이는 1948년 뉴욕 법원이 메이저 영화사 중 하나인 파라마운트가 제작과 배급 그리고 상영까지 하는 것을 불법이라고 판결한 사례다. 자사의 영화 상영을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1980년대 들어 규제가 서서히 완화됐지만 현재 AMC엔터테인먼트·리걸엔터테인먼트 등 미국 주요 멀티플렉스 체인은 메이저 스튜디오와 직접적 연관이 없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이 같은 시장 상황에서 돌파구로 삼은 건 직접 배급, 즉 ‘직배’다. 해외 시장에 눈을 돌려 직접 그 나라에 들어가 배급을 하는 경우들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각국의 수입사에 일정 금액을 받고 영화를 판매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개념이 공고해졌다. 전 세계 어떤 관객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즐길 수 있는, 볼거리가 풍부하며 보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오락영화가 주무기다. 국내에는 마블과 픽사를 소유하고 있는 월트디즈니, 20세기폭스, UPI(유니버설픽처스는 해외에서 UIP로 표기하지만 국내에서는 UPI로 표기한다), 워너브러더스가 있다. 볼거리와 스타 배우들로 무장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여전히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강세다.

지금은 영화가 관객을 결정하는 시대

한때 영화계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던 스크린쿼터는 이런 직배사의 공격적 배급 및 외국 영화의 흥행 공습에 대항하는 자구책이었다. 처음부터 한국 영화까지 스크린 독식 경쟁에 뛰어든 건 아니었다는 뜻이다. <왕의 남자>(2005년)와 <괴물>(2006년) 같은 1000만 영화는 지금 보면 소박하기까지 한 수준인 300~700개가량의 스크린 수 안에서 흥행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2010년대 들어 그 룰이 깨졌다. 2012년 <도둑들>(쇼박스)과 <광해, 왕이 된 남자>(CJ E&M)가 한국 영화 최초로 스크린 수 1000개를 넘어선 것이 그 시작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과열이 점점 더 심해지는 양상이다.

영화 한 편이 전체 스크린의 60~70%를 차지하는 기형적인 구조는 200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문제로 제기돼왔지만 아직까지는 이를 제지할 법적 근거가 없다. 이런 구조라면 계속해서 영화의 규모가 수입과 흥행을 결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매년 ‘1000만 영화’가 쏟아지는 것은 영화적 완성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영화 시장 구조에 따른 결과에 가깝다. 영화는 상품이고 산업이기 이전에 문화다.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는 문화의 미래는 어둡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는 극장에 왜 없는가’를 한 번쯤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는 시대가 아니라, 영화가 관객을 결정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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