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과의 대화] 죽음 불러온 부모의 자녀 학대
  • 배상훈 | 서울디지털대 경찰학과 교수 (프로파일러) (.)
  • 승인 2015.12.31 18:09
  • 호수 1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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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잘 안 먹고 토한다’는 이유로 어린 아들 때려서 살해

2008년 ‘영진’이가 살해됐다. 계모 A씨는 그해 2월5일 저녁 7시30분쯤 집에서 영진이를 여러 도구로 폭행했고, 그렇게 맞아 죽어가는 아이를 방치했다. 다음 날 아침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영진이의 시신을 종이 박스에 넣어 ‘콜밴’을 타고 친정집이 있는 경북 경주시 내남면으로 갔다. 여기서 영진이를 폐드럼통에 넣은 다음 휘발유를 뿌려 시신을 불태웠다. A씨는 밤 10시20분쯤 집으로 돌아와 영진이가 오늘 집 앞 슈퍼마켓 앞으로 오락을 하러 간 후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경찰에 허위 실종신고를 했다. 그리고 MBC 아침 생방송에 출연해 ‘실종’된 영진이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악어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은 사건 당일과 범행 이후 A씨의 행적에 의심을 품었다. 결국 A씨는 경찰의 수사에 덜미를 잡혔고, 잔혹한 범행의 실체가 드러났다. 부검 결과 여섯 살 난 영진이의 직접적인 사인은 내장 파열에 의한 출혈이었다. 얼굴과 등, 머리 등 온몸에 상처가 나 있었다. 영진이의 시신을 불태우고 유기했던 경주시 내남면 마을에서 가진 현장검증에서 A씨는 범행 당시의 모습을 태연하게 재연했다. 검찰은 “밥을 잘 안 먹고 토한다는 이유로 어린 아들을 때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등 그 수단과 방법 등이 잔인하고 반인륜적”이라며 징역 20년을 구형했고, 법원은 상해치사 및 사체 유기 등의 혐의를 인정해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은 자신의 범행을 모두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으며 가족의 탄원 등이 있어 정상을 참작하지만, 이 사건 범행이 매우 중하고 범행 후에도 태연히 아이의 실종신고를 하는 등 범행 은폐까지 시도해 중형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 일러스트 오상민

입양한 딸 빚 독촉 스트레스에 폭행해 사망

2013년 말 B씨는 당시 14개월이던 아이를 딸로 입양했다. 이미 두 명의 자녀를 키우고 있던 B씨는 정부가 지원하는 세 자녀 지원 특혜를 받기 위해 아이를 입양한 것으로 보인다. 가끔 이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곤 했던 B씨는 2014년 10월 채권자의 빚 독촉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자 길이 75㎝에 두께 2.7㎝인 옷걸이 지지대로 넘어지는 아이를 일으켜 세우면서까지 머리·허벅지·종아리·엉덩이·팔 등 전신을 폭행했다. 아이가 양손으로 빌며 잘못했다고 수차례 말했지만 폭행은 계속됐다.

B씨는 분이 풀리지 않자 부엌에서 빨간 청양고추를 1㎝ 크기로 잘라 아이에게 강제로 먹였고 화장실로 데려가 옷을 모두 벗기고는 샤워기로 약 10분 동안 머리 위에 찬물을 뿌려댔다. 결국 아이는 다음 날 오후 4시 병원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전체 혈액의 5분의 1 이상을 잃은 상태였다. 심장 속에도 피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B씨는 살인 혐의와 함께 딸을 입양하는 과정에서 입양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집·사무실·상가 계약서 등을 위·변조해 입양기관에 제출한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 20년을 확정받았다.

2015년 12월12일 인천 연수구에서는 2년여 동안 집에 감금된 채 아버지 E씨와 동거녀 F씨로부터 상습 학대를 당하던 11세 여자 아이가 다세대주택 2층 집 세탁실 창문을 넘어 가스관을 타고 탈출했다.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에 맨발이던 아이는 등 뒤로 손을 묶었던 노끈을 풀고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버지 E씨는 2년 넘게 딸을 집에 가둬둔 채 먹을 것도 주지 않는 등 온갖 가혹행위를 했다. E씨와 F씨는 경찰 조사에서 아이보다 키우던 애완견의 안부를 먼저 걱정했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 아이에 대한 위험 신호가 그 이전부터 감지되고 있었지만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 2011년 아무 이유 없이 무려 65일이나 학교를 결석했고 학교를 두 번이나 옮겼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담임교사가 면담 요청을 하려고 전화를 해도 아버지는 아이의 정신 상태가 온전치 않아 돌봐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다고 변명하며 면담을 거절했다고 한다. 2012년 9월에는 아버지와의 연락도 끊기자 담임교사가 실종신고를 하려고 주변 지구대를 찾았지만 규정상 친권자와 사회복지사가 아니면 실종신고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도 흔한, 그래서 새삼스럽지도 않은 아동학대 이야기들이다. 당장은 모든 언론이 비분강개하고 나서지만 정부 부처 개각이나 국회의원 집단 탈당 정도의 뉴스로도 쉽게 덮여버린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국정을 책임지는 사람이나 여당 대표의 ‘특단의 조치’는 그때마다 반복되리라는 것도, 또 그것이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너무나도 잘 안다. 심지어 2016년도 아동학대 관련 예산이 2015년의 10분의 1로 축소됐다고 한다. 사태 예방을 위해서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정도는 누구나 다 안다. 결국 돈과 인력이 투입돼야 하는 것이다. 언론에 사진 한 번 찍히기 위해 어색하게 어린이집을 방문하는 정부 관료와 정치인들의 모습, 그리고 이들의 립서비스를 언제까지 보고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아동학대 근절을 위한 시민모임 ‘하늘소풍’ 회원들이 의붓딸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B씨가 탄 호송차를 가로막고 사형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샌드백 효과’와 ‘인형 효과’

영진이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자. 우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아동학대 사건의 85% 내외가 친부모에 의해 발생한다. 아동학대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계부모에 대한 그릇된 편견이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가 만들어낸 일종의 보호막이라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영진이 사건은 계모의 개인적 악마성을 넘어 그릇된 가족주의가 만들어낸 아동학대 참화다. 재혼 가족의 경우 초혼 가족과는 다른 가족 관계와 의식, 그리고 행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재혼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계모는 적어도 영진이 아빠와 행복해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존재하는 영진이의 존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위층에는 영진이 조부모가 살고 있었고 주변 이웃들에게도 행복한 가족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친모·친자 관계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강요와 체벌이 시작됐고 갈등의 골이 깊어져갔다. 갈등은 곧 분노로 변했다. 이를 조정하면서 완충 역할을 해야 할 아버지는 방관자로 있었다. 폭력은 처음 사용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사용된 폭력은 단계적으로 확대(escalation)돼, 일정 수준에 이르면 폭력이라는 수단이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에게 무감각하게 된다. 가해자 자신도 어느 정도의 폭력을 피해자에게 행사하고 있는지 느끼지 못할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뼈를 부러뜨리고 온몸에 화상을 입히면서도 이로 인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샌드백 효과’와 ‘인형 효과’가 나타난다. 전자는 가해자의 모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단으로 가장 나약한 존재인 피해자를 선택해 일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현상을 말한다. 후자는 피해자가 아동이거나 지적장애인과 같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 아무 말 없는 인형처럼 가해자로부터 일방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현상을 말한다. ‘샌드백 효과’는 군대 내무반에서의 폭력이나 직장·교실에서 당하는 왕따를 잘 설명하고, ‘인형 효과’는 아동이나 지적장애인에 대한 폭력을 잘 표현하는 개념이다. 생명이 없는 인형은 조각이 나거나 찢겨지면 그만이지만, 어린이의 경우 그러한 폭력을 당하면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사법부 관용적 행태도 문제

이와 같은 아동학대 사건에서 늘 문제로 제기되는 것 중 하나는 사법부의 관용적 행태다. 살해를 하고 잔혹하게 시신을 유기했고, 의도적으로 언론을 이용해 기망을 했는데도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한다”거나 “가족의 탄원이 있었다”는 등의 사유로 ‘정상 참작’을 한다. 검찰이 20년을 구형한 것도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오는데, 법원은 이보다도 더 물러나 5년을 감형해주기까지 했다. 사법부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고 싶다. 이 질문은 두 번째 사건의 재판부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경제적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입양한 후 가혹하게 학대를 하다가 사망하게 만들었는데 겨우 20년 형을 선고했다.

20년 징역형이면 엄청나게 큰 처벌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실제 꼭 그렇지만도 않다. 형량의 절반 정도 기간이 지나면 모범수라는 명목으로 가석방의 대상이 된다. 영진이 계모의 경우 15년 형이니까 8년 정도 지나면 가석방될 수 있다. 물론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죄에 부합하는 충분한 처벌이 이뤄졌다는 전제하에 적용될 수 있다. 우리 사법부는 잔혹한 범죄자에게 지나치게 관용적이다. 지나친 관용은 사회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제도에 대한 신뢰를 깨뜨린다.

세 번째 사건은 우리 사회가 아동학대를 대하는 현주소를 적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CCTV에 나타난 이 아이의 행동을 보면 과거에도 탈출을 시도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전의 탈출이 실패했던 이유가 지나가던 행인이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라는 점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를 잘 아는 아이는 처음부터 목표로 정한 슈퍼마켓을 향해 곧바로 돌진해 들어간 것이다. 이 가게 이전에 다른 슈퍼마켓이 있었지만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직진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 아이는 수년 동안 학대를 당하면서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 계획을 짠 것으로 보인다. 이를 눈치 채고 있던 아버지와 동거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손을 묶어놓았던 것이다. 이 아이에게는 세상 그 자체가 전쟁터이자 감옥이었다. 수년 동안 갇혀 지내면서 학대를 당하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에 체념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을 도와줄 것 같은 슈퍼마켓 주인을 향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질주한 것이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경찰 조사에서 자신도 학대의 피해자라는 변명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보통 친부모에 의한 학대는 세대를 이어 학습된다. 이른바 ‘훈육’이라는 미명하에 물리적 체벌과 정신적 학대가 대물림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학대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가해 부모에 대한 치료와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아이의 아버지가 감형을 받아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았다고 해서 이를 그대로 자신의 아이에게 행할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의지하는 자녀를 가혹하게 학대한 것에 대한 가중 처벌이 필요하다. 제도 개선도 시급하다. 가정 폭력 피해를 당한 아동을 가해 부모로부터 격리해 보호할 수 있는 피해 아동 쉼터는 전국에 37곳밖에 없다. 수용 인원은 250여 명에 불과하다. 11세에 친아버지라는 지옥으로부터 탈출이라니…. 우리 사회는 11세 어린아이에게조차 희망이 없는 사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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