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아의 음식인류학] “새끼 배를 채우덜 못하는데, 인간이 워째 금수보다 낫다 할 것이여”
  • 이진아 | 환경·생명 저술가 (.)
  • 승인 2016.01.07 17:18
  • 호수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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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때 한국의 식량 사정이 좋아졌다는 일부 주장의 오류에 대해

필자 이진아씨는 1992년부터 경실련 환경개발센터의 창립멤버이자 초대 사무국장을 지냈고, 1994년에는 아시아 시민단체인 ‘동아시아 대기행동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던 환경운동 1세대 출신이다. 음식과 환경에 대해 많은 저술과 강연을 해왔고, 세계 음식인류학회 등에 논문을 발표해왔다.

 

“원래 한국인은 거의 제대로 먹고 살지 못했는데, 일본 식민통치 덕분에 식품 생산량이 늘어나 풍요로운 식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런 주장에 대해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굶주렸는지에 대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속에서도 그런 모습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박경리의 <토지>에서 한 농촌의 아낙은 자식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아가, 배고프쟈? 꼬막만 한 새끼 배를 채우덜 못하는데, 인간이 워째 금수보다 낫다 할 것이여.”

 

일제 강점기 때 어마어마한 양의 대일 반출미가 쌓여 있는 모습.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쌀의 상당수를 군량미 등으로 반출했고 대신 인조미를 공급했다. ⓒ 연합뉴스

이런 판에 일본이 식민 통치를 통해 우리를 배불리 먹고 살게 해주었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 관련 학계 안에서 한동안 꽤 돌았던 말이다. 심지어 국내 학자들 중에도 내놓고 말하지는 못해도 이 시기 일본 통치를 통해 한국인의 식량 사정이 좋아졌다는 점을 슬쩍슬쩍 인정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과연 일본의 식민 통치는 한국인의 식생활을 풍요롭게 해주었을까. 그런데 이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분명히 ‘아니다’임을 알 수 있다.

 

20세기는 전 지구적 식량 증산의 해


우선 ‘일본 식민 통치 덕분에 한국의 식량 사정이 좋아졌다’는 주장이 왜 나오는지 살펴보자. 앞세우는 논거는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통계다. 실제로 일본 통치 기간에 농업 생산량과 어획량이 대부분 늘어나는 추세를 보여준다. 또 당시 조선총독부가 이른바 ‘농촌진흥운동’을 통해 품종 개량미를 보급해 수확고를 올린 성과들을 관련 문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측의 공식 자료에서 눈을 떼고, 당시의 사정을 좀 더 깊게 그리고 폭넓게 살펴봐야 한다.

 

이 시기 동안 식량이 증산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딱히 일본이 잘해서라기보다 이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식량이 증산되는 추세에 있었다는 점이 더 근본적인 이유였다. 19세기 말부터 지구는 온난화 주기로 들어가며 태양으로부터 더 많은 에너지가 안정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지구 전체적으로 삼림이 회복되고 농산물·수산물·축산물 등 모든 식량이 증산되기 시작했으며, 그 증가 추세는 20세기 말까지 계속됐다. 일본이 식민 통치를 시작하면서 통계를 본격적으로 실시했다면 일부러 꾸미지 않아도 식량 생산량이 증가하는 것으로 통계가 잡혔을 것이다.

 

또 당시의 문건들을 꼼꼼히 조사해보면 이렇게 온 천지가 풍년이어도 일부 친일파 엘리트를 제외한 대다수 한국인은 그 혜택을 받지 못했고, 특히 대다수의 하층민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훨씬 열악해진 식생활로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나온 리얼리즘 소설이나 수필들은 식량이 없어 비인간적인 삶을 가까스로 이어가거나 혹은 이어가지 못했던 당시 민중들의 모습을 선연하게 보여준다.

 

저렇게 늦게 들어와 가지고는 조밥이나 밀죽이나 정 어려운 사람네는 도토리 같은 것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고는 그만 피로함에 못 이겨 아무 데나 쓰러져 잡니다. (강경애 수필, <여름밤 농촌의 풍경 점점>, 1933)

 

이런 문제가 생기는 이유를 직설적으로 설명해주는 소설 대목도 있다.

 

풍년이 들어도 굶주리기는 일반이다. 소작료와 각황 무리 꾸럭을 치르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설령 남는 것이 좀 있다 해도 그것이 돈이 되지 않는다. 가을이 되면 모든 빚쟁이는 성화같이 조른다. 또는 각항 세금도 바쳐야 한다. 그런데 신곡이 나오면 곡식금이 별안간 뚝 떨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빚 얻어 장리 얻어먹고 지은 곡식을 헐가로 팔아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일 년 내 쌀농사를 지어서는 죄다 팔아버리고 다시 만주 좁쌀을 비싼 금으로 사먹어야 한다. (이기영 소설, <홍수>, 1926)

 

이런 어려움이 극에 달하면 민심이 흉흉해질 수 밖에 없다.

“세상에 가난이란 무슨 웬수인지? 간밤에는 이 근처에 사는 어떤 가난한 마누라가 늦게 쌀을 사가지고 오다가 어떤 몹쓸 놈한테 맞아죽었다는구나!” (이기영 소설, <민촌>, 1926)

 

그리고 극단적으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생존의 가능성을 찾아 조상 대대로의 삶의 터전인 고향을 떠나기도 한다.

비록 남의 것이기는 하나 삼십 평생의 자기의 가진 애를 다 쓸어놓은 이 들판이다. 보리죽에도 굶주리는 자기의 피와 땀은 이 들판에 모조리 다 뿌렸건만 이제 남아 있는 껍질과 뼈는 만주로 가는 수밖에 없다니... 순삼이는 한숨짓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백신애 소설, <가지 말게>, 1937)

 

“일제, 국내 쌀을 군량미로 일본에 빼돌려”


이것은 분명 구한말보다 더 극심해진 참상이었다. 먹고 살 것이 풍족해졌다면 생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 및 당시 일본인 연구자의 공식 문건에서도 위와 같은 상황을 방증해주는 근거가 얼마든지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쌀을 군량미 등으로 쓰기 위해 거의 일본으로 빼돌렸다. 대신 우리나라에는 만주산 콩의 깻묵과 대만산 안남미의 속겨, 고구마 등을 혼합해 만든 ‘인조미’라는 것을 영양가가 많다고 하여 먹도록 했다. 당시 소학교(초등학교) 학생의 식생활 조사에서는 조선인 중에는 결식아동이 많다는 내용도 나와 있다. 이처럼 다각도로 검토하지 않고 통계와 공식 연구 자료만 보고 주장을 한다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음식문화에 대한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새삼 빛바랜 ‘식민지 근대화 논쟁’ 비슷한 것을 들고나온 이유는 이 문제가 ‘음식’이라는 화두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지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음식인류학의 의미가 재조명될 수 있다. 영양학적인 분석, 아니면 문화사적 전파론, 주관적 미식(美食)론 등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그리고 일견 별 상관없는 것으로 보이는 영역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진지하게 탐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동시에 재미있어야 할 것이다. 음식은 우리에겐 정말 융합적인 것으로, 생존의 절실함에서 감각적 쾌락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담고 있는 화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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