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핵무기 7개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 40kg 추출 보유”
  • 이영종│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1.12 13:31
  • 호수 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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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 개발비 최대 14억2100만 달러로 추정
2013년 2월14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제3차 지하 핵실험의 성공을 축하하는 ‘평양군민연환대회’가 열리고 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새해 벽두부터 김정은의 핵 도박이 국제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이번엔 판이 커졌다. 2006년 10월 첫 시도 이후 3차례에 걸친 핵실험은 플루토늄과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4차 시도에선 차원이 달라졌다. 핵분열 방식의 원자탄보다 위력이 최대 수백 배 강한 것으로 평가되는 핵융합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문제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 수준이나 진척 정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번엔 핵실험 준비 관련 정황까지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 함경북도 풍계리 실험장 지하갱도 입구와 주변은 한·미정보 당국의 대북 감시 리스트 1순위다. 이상 징후가 포착되면 키홀(KH-12) 첩보위성이 집중 감시에 들어간다. 핵실험 때는 갱도를 수백 m 파고 실험 장비를 설치한다. 또 콘크리트로 매설하는 과정도 거친다. 퍼낸 흙의 양이나 차량·인력의 움직임으로 진척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는 게 대북 정보 관계자들의 말이다. 북한은 깜짝쇼를 위해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다. 중국이나 미국에 사전 통보를 하던 관례도 깨뜨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 성공 주장을 놓고 전문가들이나 관련단체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정부나 국가정보원까지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서 혼선은 가중되고 있다. 인공 지진의 강도 등을 토대로 수소탄이 아닐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지만 더 이상의 판단 정보가 없는 상황이라 단정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이 완성도 높은 수소탄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기정사실화해서 대응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시간문제일 뿐 결국 성공 단계에 접어들 것이란 판단에서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1960년대 소련 최대의 듀브나 핵연구소에 핵물리학자를 파견하면서 시작됐다는 게 우리 정보 당국의 설명이다. 당시 소련에 갔던 북한 핵물리학자 최학근은 1986년 12월 원자력공업부장으로 임명돼 자체적인 핵 개발을 총지휘하기도 했다. 이런 방식과 자체적인 교육을 통해 양성된 북한의 핵 관련 전문 인력은 현재 고급 인력 200여 명을 포함해 3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북, 핵 관련 전문 인력 3000명에 달해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은 이들을 위해 별도의 과학자타운을 만들어 집단 거주시키는 등 각별하게 챙기고 있다. 대동강변에는 고층 아파트를 새로 건립해 김일성대학교수나 과학자 등 핵 관련 인력을 무상 입주시키는 것으로 북한 관영 매체들은 전하고 있다.

자체적인 핵 설계 기술 개발이 이뤄지기 시작한 건 1965년 구(舊)소련에서 IRT-2000으로 불리는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면서다. 1970년대에는 연구용 원자로의 출력 확장 기술을 자체 개발했고, 1990년대에 접어들어 핵연료 확보에서 재처리에 이르는 이른바 핵연료 주기 완성에 매달렸다. 그렇지만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 국제사회가 의혹을 제기하자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핵합의를 체결해 경수로발전소와 경유 제공을 대가로 핵 개발을 동결할 것처럼 기만했다. 결국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가 평양을 찾아 농축우라늄 핵 개발 의혹을 제기하자 북한은 같은 해 12월12일 핵 동결 해제 및 핵시설 가동을 선언했다. 이어 이듬해 1월10일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는 등 핵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또 2006년 10월9일에는 첫 번째 핵실험을 감행했다.

북한의 핵 개발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해방 직후 서울대 교수로 있다가 1946년 5월 월북해 김일성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도상록 교수(1903~1990년)다. 그는 원자력 이론서 30여 권을 집필하고 핵 가속장치를 개발해 김일성대학에 설치하는 등 북한 핵 개발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 북한은 평가하고 있다.

함경남도 함흥 출생인 도 교수는 일본 도쿄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졸업후 개성 송도중학교 교원 시절에는 ‘헬륨수소 분자의 양자역학적 취급’ ‘수소가스의 양자역학적 이론’이란 논문 두 편을 미국 학술지에 발표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어 중국 창춘(長春)공업대학, 서울대에서 근무했다. 월북 후에도 그는 핵물리학 분야 등에서 14개의 새로운 과목을 개척하고 4만 쪽에 가까운 교재를 직접 집필하는 등 왕성한 연구 활동을 했다.

김일성 주석은 그의 연구실을 세 차례 찾아간 것으로 알려진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그를 끔찍하게 챙겼다고 한다. 1980년 10월 노동당 6차 대회 때 도 교수를 당대회 대표로 임명했고 3년 후에는 ‘인민과학자’ 칭호와 김정일 명의의 표창장을 줬다. 노환으로 교단에서 더 이상 가르칠 수 없게 되자 김정일은 대학교수직을 유지한 채 자택에서 핵 관련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했다.

북한이 1960년대 들어 핵 개발을 위한 초보적인 준비에 착수했다는 분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김일성이 그보다 훨씬 전부터 핵 개발 구상을 구체화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다. 미국의 핵폭탄 투하로 일본 제국주의가 단박에 항복하고, 조국이 해방되는 걸 목도하며 김일성이 핵무기의 위력을 실감했을 것이란 얘기다. 도상록에 대한 김일성의 각별한 배려에서도 이런 점을 엿볼 수 있다.

한 국가가 핵 개발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자금 외에 최고지도자의 의지라는 3대 핵심 요소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김일성과 김정일의 대(代)를 이은 집착이 북핵 개발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진단이 가능하다. 아버지 김정일로부터 핵을 넘겨받은 김정은은 집권 5년 차에 접어든 현재까지 핵 물질 양산과 소형화·경량화에 공을 들여왔다. 현재는 핵무기 7개를 만들 수 있는 40㎏의 플루토늄을 추출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 당국은 추산하고 있다.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이 2003년 1월10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이후 13일 만에 최전선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제230군부대를 시찰했다. © EPA 연합

우리 정부와 관계당국의 판단오류

김정은 체제 들어 북한은 핵 개발에 더욱 집착하며 엄청난 투자를 진행 중이다. 핵에 대한 김정은의 유별난 관심은 그의 정책 노선에서도 드러난다. 김정은이 2013년 3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내놓은 ‘경제·핵병진 노선’이 그 핵심이다. 핵 보유로 재래식 무기에 투입될 군사비를 덜 수 있게 됐으니 이를 민생경제에 돌리겠다는 게 그가 내세운 명분이다. 하지만 국방비 비중은16.0%(실제는 은닉 예산 포함 30% 수준)에서 2014년 15.9%로 겨우 0.1%포인트 줄어드는 데 그쳤다는 게 예산결산 과정에서 확인됐다. 북한의 공식 자료를 통해 봐도 효과는 미미하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김일성이 1962년 12월 당전원회의에서 채택한 경제·국방 병진 노선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말한다. 핵 개발에 엄청난 돈이 드는 데다 국제사회의 정치·경제적 압박으로 경제가 만신창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관계 당국의 북핵 개발비 추정 자료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북한의 첫 핵실험 직후 당국은 한 발의 핵탄두 개발에 2억9000만~7억6400만 달러의 직접 비용이 들어갔을 것으로 판단했다. 여기에 추가로 생산한 플루토늄까지 포함하면 북한의 총 핵 개발비는 5억600만~14억210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북한은 또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1979년 평안북도 영변에 발전출력 5MWe급의 제1원자로를 착공해 1986년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정부는 북한이 이 원자로 건설에 5700만~1억7000만 달러를 썼다고 본다. 또 사용 후 핵연료를 방사화학실험실에서 재처리해 한 발 분량(6~8㎏)의 플루토늄(Pu-239)을 생산하는 데는 2400만~7300만 달러가 소요됐을 것으로 판단한다.

경제난에 시달리는 북한 상황을 감안하면 엄청난 돈이다. 북한 주민들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구호를 내걸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몰래 핵 개발에 박차를 가한 1990년대 후반에는 대량 아사(餓死) 사태가 속출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핵 개발에 천문학적 돈을 쏟아부은 김정일 체제에 대해 비판이 쏟아졌다.

핵 개발 자금 마련을 위해 불법 무기거래와 위폐 제조, 마약 거래 및 가짜 담배 생산 등이 동원됐다. 미국 의회조사국(CRS)은 북한이 연간 10억 달러 규모의 위폐·마약 등 범죄적 거래로 5억 달러의 수익을 얻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개성공단 북한 근로자의 임금이나 지금은 중단된 금강산 관광 대가도 한몫했을 것이란 견해를 제시한다.

북한의 핵 개발 과정은 한마디로 ‘기만을 통한 확보, 협상을 통한 확산’으로 요약된다. 1990년대 초반 핵 개발 의혹이 제기되자 북한은 “핵을 가질 의사도 없고, 능력도 없다”고 국제사회를 속였다. 또 핵 개발에 성공한 후에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할 것처럼 협상 테이블에 나서 시간벌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합의와 파기를 반복하면서 결국 4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와 관계 당국은 북핵을 ‘조잡한 형태의 핵무기’ 정도로 폄하하거나 부정확한 정보에 근거해 판단오류를 범했다. 예상보다 빠르고 집요한 김정은 체제의 핵 개발 드라이브를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북핵 대응의 첫 단추는 핵 개발과 관련해 믿을 만한 정보를 파악하는 일이다. 진단이 정확해야 처방도 제대로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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