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의 히든카드 ‘정봉이’ 등장에 충무로가 들썩인다
  • 이은선│매거진 M 기자 (.)
  • 승인 2016.01.14 18:24
  • 호수 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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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안재홍, <족구왕>에서 가능성 인정…‘포스트 송강호’로 불리기도

동글동글한 몸매에 진돗개처럼 순진한 눈망울, 호돌이 티셔츠와 한껏 올려 입은 ‘츄리닝’ 바지 차림이 트레이드마크인 순수 청년 ‘김정봉’. 그가 <응답하라 1988>(tvN, 이하 <응팔>)의 히든카드가 될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방송이 거듭될수록, 짐짓 진지한 얼굴로 “100원만 주시면 올림픽 영웅들과 하루 종일 보낼 수 있다”며 어머니에게 제안하고,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강동원 뺨치게 멋져질 수 있는 이 남자의 매력에 빠져들었다는 시청자들의 고백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종영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는 ‘<응팔>의 최대 수혜자는 정봉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봉블리’라는 별칭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남자, 출구 없는 매력남으로 보이도록 연기한 배우 안재홍의 힘이다.

<응팔> 이전에 안재홍이 주목받은 것은 영화 <족구왕>(2014년)을 통해서다. 이 영화는 그해에 단연 최고의 화제를 불러 모았던 독립영화다. ‘대학 캠퍼스에서 족구하는 대학생들이 주인공인 청춘영화’가 과연 재미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족구왕>의 운명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 건,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처음으로 공개되면서부터다. 영화제 관객들은 생생한 캐릭터와 유머를 장착한 이 명랑한 청춘영화의 등장에 환호했다.

ⓒ tvN

송강호 “네가 족구왕이냐? 난 반칙왕인데”

부산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불러일으킨 후 불붙은 열기는 이듬해 개봉까지 이어졌다. <명량>

<해적: 바다로 간 산적> <해무>라는 쟁쟁하기 그지없는 여름 영화 3파전이 벌어질 무렵, 비슷한 시기에 ‘여름 영화 4대 블록버스터’라는 타이틀을 스스로 배짱 있게 내걸고 출두한 이 영화 덕분에 독립영화계가 들썩였다. 결과적으로 <족구왕>은 독립영화가 1만 관객도 모으기 힘든 시기에 4만5000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독립영화계 슈퍼스타’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 영화 안에, 찌질하지만 순수한 복학생 ‘만섭’을 연기한 안재홍이 있었다.

“족구 같은 것 하면 여자들이 싫어한다”는 사람들의 비아냥거림에 “남들이 싫어한다고 좋아하는 걸 숨기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한다”고 자신의 단단한 생각을 들려주는 복학생 만섭은 <응팔> 정봉의 전신(前身) 같은 캐릭터다. 남들과 조금은 다른 혼자만의 세상에 사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속 깊은 남자. 혼자 있으면 언뜻 무색무취한 인물이지만 다른 이들과 있으면 트랜스포머처럼 모습을 바꾸는 남자. <족구왕>의 만섭이 짝사랑하는 여자 안나(황승언)와 있을 때는 못난 복학생 같고 친구 미래(황미영)와 있을 때는 듬직해 보였듯, <응팔>의 정봉도 마찬가지다. 엄마(라미란)와 있을 때는 조금 모자란 듯하지만 착한 아들 같고, 동생 정환(류준열)과 있을 때는 듬직한 형 같고, 여자친구 미옥(이민지)과 있을 때는 세상 제일가는 로맨티스트 같은 면모를 발휘한다.

<족구왕>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만섭이 안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백하는 장면이다. 정직한 발음으로 “아이 원 비 어 절크 디스 타임(I won’t be a jerk this time, 이번에는 바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이라 고백하는 만섭. 처음에는 웃기고 덜떨어져 보이기까지 했던 복학생이 급기야 좀 멋있어 보이기까지 하는 장면이다. 올곧고 순수한 만섭을 맞춤옷처럼 연기한 안재홍은 덕분에 <응팔> 제작진에게 발탁돼 정봉 역할을 꿰찰 수 있었다.

명랑한 청춘영화 은 배우 안재홍을 ‘포스트 송강호’로 주목받게 한 작품이었다. ⓒ KT&G 상상마당

자신의 출연작 가장 많이 보는 게 목표

어떤 역할이든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매력으로 소화하는 것은 배우 안재홍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 매력은 안재홍이 독립영화계에서 주목받는 배우가 됐던 첫 계기인 <1999, 면회>(2013년)에서도 물씬 묻어 나온다. 영화는 군대에 간 친구 민욱(김창환), 그리고 그를 면회하러 가는 대학생 상원(심희섭)과 승준(안재홍), 이 세 친구가 함께 보내는 1박 2일에 관한 이야기다.

안재홍이 연기한 승준은 다른 두 주인공에 비해 대사가 많지도 않고, 심지어 대부분의 장면에서 자거나 먹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연출을 맡은 김태곤 감독이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를 때는 그냥 재워버렸던 인물”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안재홍은 극 안에서 승준을 확실하게 부각하는 재주를 발휘했다. 그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졌고, 능청스럽게 먹고 드러눕는 모습은 실제인지 연기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안재홍이 대충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연기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자연스럽게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재홍은 계산이 뛰어난 배우다. 카메라 위치를 여러 번 바꿔 테이크를 반복하더라도 매번 똑같은 순간에 똑같이 연기하고 있다는 건 그와 함께 일한 감독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부분이다. 매끄럽게 보이지만 모든 박자가 정확히 계산된 연기. 이 같은 안재홍의 능력은 선배 연기자들도 단번에 그를 인지하게 만든다. 안재홍에게 ‘포스트 송강호’라는 별명이 붙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사석에서 만난 송강호는 안재홍에게 “네가 족구왕이냐? 난 반칙왕인데”라고 농담하며 그의 연기를 칭찬한 적이 있다.

인간적 매력과 호감을 이끌어내는 능력에 더해 연기력까지 타고난 천생 배우 같지만, 안재홍은 스무 살 무렵까지 자신이 배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대학 입시를 치르고 전공을 정해야 했을 때, ‘어릴 때 비디오 보는 걸 즐겼고 친구들 특징 잡아내 따라 하는 걸 잘했으니 연기를 해볼까’ 하고 막연하게 떠올렸던 생각이 안재홍을 배우의 길로 이끌었다. 대학(건국대 예술학부 영화전공) 때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 공연한 연극 <서툰 사람들>은, 안재홍이 처음으로 연기를 하는 희열을 맛봤던 작품이다. 이후 안재홍은 대학로에서 연극 무대에 오르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오디션을 봤던 첫 영화가 <1999, 면회>다.

안재홍은 자신의 출연작을 보고 또 보는 배우다. 자신이 출연한 것을 제일 많이 본 사람이 될 때까지 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자신의 연기를 객관화해서 자신의 모자란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언젠가는 그가 직접 만든 장편영화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안재홍은 단편 <열아홉, 연주>(2014년)를 연출한 감독이기도 하다. 연기에 연출까지, 매력적인 남자친구부터 친근한 동네 형까지. 안재홍의 스펙트럼은 앞으로 더 넓어질 일만 남았다. <응팔>이 끝난다고 아쉬워 말라. 안재홍은 심은경과 함께 출연한 스릴러 영화 <널 기다리며>로 곧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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