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2주 만에 최신 패션을 전 세계에서 동시에 입는다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6.01.19 09:42
  • 호수 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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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적으로 성장한 SPA 브랜드, 우리의 옷 입는 문화를 바꾸다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의 세계는 치열하다. 여기 기자 앞에 앉아있는 패션디자이너 성 아무개씨는 “지금도 어렵다”고 말하지만 두타에 매장을 유지하며 옷을 제작해 판다. 20~30대 여성 옷을 주로 만드는데 중국 광저우(廣州)에 있는 편집숍에 수출도 하니 꽤 자리를 잡은 셈이다. 1년 매출을 물으니 10억원이 좀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SPA(제조·유통 일괄형 브랜드)가 매출에 지장을 주나?” “SPA만 없으면 아마 20~30% 이상 매출이 오를 것이다. 우리 같은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들도 직접적으로 지장을 받는 건 맞다.”

누구나 그렇듯 자신의 옷에 대해 프라이드가 강했다. 가격은 10만원대를 유지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원단을 사용하고 디자인에도 노력을 많이 기울인다. 그런데 ‘싸고 질 좋다는’ SPA 때문에 그 역시 저가 제품 쪽으로 선회해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그가 입고 있는 회색 맨투맨 티셔츠가 어디서 많이 본 옷이다. “그거 유니클로 티셔츠 같은데”라는 기자의 말에 SPA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성씨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이 가격에 이 정도 질의 옷은 쉽게 못 입는다.”

의류 지출액 줄었어도 SPA는 급성장

패션 관계자도 이럴진대, 일반인들의 SPA 사랑은 더욱 각별하다. 최신 유행을 즉각 반영해 빠르게 제작하고, 디자인에서부터 생산, 유통, 판매까지 전 과정을 한 업체가 소화하는 SPA 브랜드는 대세다. 가격 대비 성능에 민감해지면서 더 붐이 일어난 느낌이다.대표적인 글로벌 SPA 브랜드인 자라(ZARA) 강남점에는 손님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매장 안에는 다양한 아이템이 구비돼있다. 한 바퀴 돌아다니며 종류를 체크해보면 이랬다. 정장, 드레스셔츠, 티셔츠, 바지, 블라우스, 드레스, 원피스, 재킷, 코트. 여기에 지갑과 구두, 머플러, 가방 등 잡화를 더하면 우리가 살수 있는 모든 것이 거기에 다 있다.

대다수 SPA 매장은 저렇게 구성된다. 있을 게 다 있고 없는 게 없는. 그리고 이 SPA의 국내 확장력은 무섭다. 2005년에 들어왔으니 이 땅에 상륙한 지만 10년 된 SPA는 패션의 매출 사이클과는 조금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보통 ‘옷’은 경기를 탄다. 그런데 SPA는 얼어붙은 지갑도 열게 만든다. 2014년 가계의 의류 소비지출액은 전년 동기와 비교해 금액과 비중에서 모두 감소했다. 2013년 4분기 20만8327원이었던 지출액은 2014년 4분기 20만2251원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SPA 시장은 2013년 2조9000억원에서 2014년 3조4000억원 규모로 확대됐다. 지갑에서 나오는 돈은 줄었지만 그 나오는 돈이 SPA 시장으로 쏠렸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한쪽으로 쏠렸으면 다른 어딘가는 텅텅 비었을 터. 국내 한 중견 패션업체 간부의 말이다. “내셔널 브랜드(본사 직영이나 대리점 영업을 하는 국내 브랜드)는 SPA 때문에 직격탄을 맞았다. 매출이 반 토막 난 곳도 많고 사라진 브랜드가 두 자릿수다. 하나의 브랜드를 새로 론칭하는 데 보통 20억원 정도 든다고 하는데 그게 부담스러워 론칭을 꺼리고 있다. 매출도 매출이지만 패션의 주기가 짧아진 것도 부담이다. 그쪽(SPA)에서 뭔가 빨리 바뀌면 주변 패션산업도 빨리 바뀌어야 된다. 구매의 유행에 올라타야 하니까.”

패션의 흐름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다. 정보를 얻는 플랫폼이 바뀌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가속도를 얻었다. 옷 만드는 사람들은 아마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미울 수도 있다.그들은 지금 더욱 바빠졌고 더욱 예민해졌다. 성씨의 말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하나의 디자인으로 2~3개월을 버텼는데 이제는 한 달도 못 가는 느낌이다. 모델이나 연예인이 자기의 모습을 찍어서 SNS에 시시각각 올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뭘 입었는지 체크하고 바로 구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체크한 옷이 바로 나왔으면 하는 대중의 심리를 SPA는 채워준다. 대중의 트렌드 변화 속도를 그들은 따라잡았다. SPA는 그런 관심이 꺼지기 전에 대량으로 물건을 매장의 매대에 진 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것도 전 세계에서 동시에 가능하도록 말이다. 창업자인 아만시오 오르테가 회장을 세계에서 두 번째 부호로 만든 자라는 “옷을 빠르게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건 정확한 패션”이라고 강조한다. 그들이 강조하는 ‘정확’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고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자라는 데이터를 가장 잘 활용하는 기업 중 하나다.

대중에게 어필하는 기회도 속도전으로

자, 고객이 원하는 인기 제품의 경우 자라는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 의뢰해 만든 프로그램과 RFID칩을 통해 수요를 파악한다. 어떤 종류, 혹은 어떤 디자인의 수요와 공급을 파악해 어느 지역에 부족하고 남는지, 또는 어떤 상품이 인기를 끄는지 정보를 수집해 분석하고 생산에 그대로 반영한다. 정확한 옷을 만든다는 건 이런 의미다. 그렇게 고객이 입고 싶어 하는 옷은 200여 명의 디자이너가 포진한 스페인의 자라 본사에서 기획과 디자인을 거쳐 제작된다. 글로벌 SPA 브랜드가 보유한 ‘반응 생산 시스템’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옷은 동시에 전 세계로 흩어진다. 자라가 전세계 88개국에 자리 잡은 지점으로 초고속 배송할 수 있는 비결은 ‘비행기’ 덕이다. 일주일에 두 번, 신상품을 실은 ‘자라 전용기’는 스페인에서 출발해 전 세계로 향한다. 거리에 따라 하루 이틀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48시간 이내면 ‘전 세계 동시 판매’가 가능하다. 불과 2주 전에 디카프리오가 입었던 집업 후드나 엠마 왓슨이 걸쳤던 카디건의 닮은꼴을 전 세계에서 새끈한 신상으로 받아볼 수 있으니 쇼퍼(shopper)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천국은 없다.

쾌속으로 쏟아지는 신상들을 매장에서 집어 입어보고, 입었던 옷을 어지른 채 옆자리로 옮겨도 누구 하나 눈치를 주거나 따라 다니지 않는다는 점, 그런 작은 부담감을 덜어낸 것만 해도 쇼퍼들에게 이 공간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너무 쏟아지다 보니 때로는 매장에서 빛을 못 보는 제품도 있다. 서울 명동에 위치한 한 SPA업체의 관계자는 상품의 진열과 퇴거도 그만큼 빠르다고 말했다. “들어오자마자 며칠 정도 매장에 걸어놨다가 판매가 저조하다 싶으면 창고로 들어가는 옷들도 있다. 때로는 재고 정리 때가 돼서야 매장으로 나오는 상품도 있다.” SPA의 옷들은 대중에게 어필하는 기회조차도 속도전으로 이뤄진다.

국내 SPA 시장에서는 유니클로와 자라, 그리고 H&M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상대적으로 부진한 국내 SPA 브랜드에 비해 글로벌 브랜드가 강세다. 반응 생산 시스템과 강력한 유통망이 일체화된 점이 첫 번째 이유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좋다’는 평가를 받은 게 두 번째 이유다. 여기에 더해 이들은 각자 분명한 콘셉트를 가지고 있다. 빠른 트렌드를 쫓기 위해, 또는 가성비 높은 옷을 찾기 위해 SPA를 찾는 소비자들도 각 브랜드의 콘셉트를 머릿속에 인지하고 매장을 찾는다. 유니클로는 기본 아이템이 풍부하다, 자라는 다른 SPA 브랜드에 비해 조금 비싸지만 모던한 디자인에 강점이 있다는 식이다. 전문가들도 이런 콘셉트가 브랜드 존재감에 도움이 됐다고 지적한다. “유니클로는 히트텍이나 에어리즘같이 기능성 옷에 초점을 두고, 자라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매장의 옷을 교체하며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H&M은 칼 라거펠드, 이자벨 마랑 등 유명 디자이너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며 ‘고품격 브랜딩’ 전략을 취한다. 3개 업체는 확고한 브랜드 콘셉트로 패션시장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신영경 한국콘텐츠진흥원 주임연구원)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옷이 저렴한 가격으로 거의 매일 쏟아진다. 이런 신상품에 더해 “(국내 소비자들이) 이제는 백화점에 꼭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라는 추호정 서울대교수의 말처럼 자유롭고 편안한 쇼핑 경험이 더해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패스트패션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SPA의 옷은 그렇게 점점 더 많이 우리의 옷장을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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