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가 흐려지면서 동네가 보이기 시작했다
  • 김명지 인턴기자 (.)
  • 승인 2016.01.28 19:29
  • 호수 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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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마을로 유명했던 이화마을과 장수마을이 변화를 모색하는 까닭

2010년 9월, KBS <1박 2일>에서 한 마을 담장의 날개 벽화가 소개됐다. 방송 촬영 도중 이승기가 서서 사진을 찍은 그곳에 이후 수많은 사람의 발길이 이어졌다. 각종 매스컴에서 이곳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이 마을 곳곳에 그려진 벽화가 주목을 받으며 ‘벽화마을’로 유명해졌다. 마을 담장의 벽화 그리기는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공공미술에는 특정한 목표가 있다. 벽화도 마찬가지다. 단국대 커뮤니케이션디자인과 변민주 교수는 국내에서 일었던 벽화 열풍에 대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마을을 재생시키려 한 노력이었다”며 “주민들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 나아가 마을을 지키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평가한다.

ⓒ 시사저널 임준선

이제 서울 하늘 아래만 해도 벽화마을을 꼽아보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그중에서도 특히 종로구의 ‘이화마을’과 성북구의 ‘장수마을’은 사람들의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린, 벽화마을의 상징으로 통하는 곳이다. 이후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만큼 이 마을들도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마을은 2006년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의 ‘아트 인 시티(Art in City)’ 프로젝트를 통해 각양각색 벽화들로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공공미술을 통한 소외 지역의 생활문화환경 개선’을 내세웠던 이 프로젝트는 이화마을의 분위기를 단숨에 바꿔놓았다. 날개 벽화뿐만 아니라 고양이, 물고기, 심지어는 영화 <어벤져스>의 영웅들까지 삼삼오오 담벼락에 모여들었다.

성북구 삼선동의 장수마을은 이와는 조금 다르게 시작됐다. 2004년 주택 재개발 사업 예정구역으로 지정됐으나 수익성 문제로 개발이 미뤄지자 주민과 시민단체들이 직접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발 벗고 나섰던 것이다. 인근 한성대학교 예술학부 학생들의 손길에 힘입어 장수마을의 벽에도 꽃과 담쟁이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겉으로 보이는 예쁜 그림 뒤엔 보이지 않는 불편함이 있었다. 어느덧 마을 주민들의 불만도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변화를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한때 각광받던 벽화가 천덕꾸러기로 변해 있기도 했다.

서울 혜화역 부근 이화벽화마을의 초입 ⓒ 시사저널 임준선

‘쉿, 주민이 살고 있어요’

 

지하철 혜화역 2번 출구에서 나와 언덕을 오르다 보면 만나게 되는 이화벽화마을의 초입은 친절하다. 일목요연하게 짜인 ‘도보여행 코스’ 안내판은 여행자들에게 명쾌하게 정리된 길을 알려주고 있다. ‘쉿, 주민이 살고 있어요.’ 마을을 찾는 외부 사람들에게 주민에 대한 배려를 부탁하는 문구도 눈에 띈다. 관광객으로 인한 소음, 마을 경관 훼손, 쓰레기 무단 투기 등으로 주민들의 불편함이 증가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망한다는 간곡함이 배어 있다.

마을 주민 유희숙씨(80) 역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람들이 오는 것 자체가 싫은 건 아니에요. 큰길가에 아무렇게나 차를 대놓는 식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게 싫은 거죠.” 이에 옆에 있던 김정희씨(89)도 거든다. “공용화장실이 부족한 건지, 사람들이 막 경로당에 와서 볼일을 보고 가는 경우도 많아요. 갑자기 그러면 우리야 당연히 불편하지. 청소 문제도 있고.”

벽화마을이 만들어진 후 크고 작은 피해를 감당하고 벽화를 관리하는 것은 사실상 주민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어떤 벽화는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한껏 유명해졌던 날개 벽화가 주민들의 막대한 불편 호소로 인해 결국 지워진 것이 한 예다.

지하철 창신역 2번 출구에서 나와 오르막과 계단을 거쳐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장수마을은 한적하다. 불과 10여 분 거리에 있는 이화마을이 국내외 관광객들과 조그마한 공방들로 채워져 있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마을 주민들이 담소를 나눈다는 평상은 차가운 날씨에 텅 비어 있었고 골목골목 지나다니는 인적조차 드물었다. 마을에는 고요한 주거지로서의 면모가 분명하게 보였다. 간간이 기간이 지난 ‘장수마을 집수리 지원 사업 신청 접수’나 ‘장수마을 동네 한 바퀴’와 같은 마을 단위 행사 플래카드들이 눈에 띌 뿐이었다. 안정된 침묵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예전 벽화에 대한 주민들의 불편은 흘러나왔다. 이순란씨(70)는 말했다. “자기 집이나 집 주변에 벽화가 그려진 사람들은 다 힘들어 하더라고요. 아닌 사람들도 쓰레기 때문에 고생깨나 했어요.” 그나마 벽화로 인해 마을의 삭막함이 사라졌던 점은 좋았다고 차분하게 말하던 이씨와 달리, 실제 벽화 주변에서 소음에 시달렸던 박순애씨(72·가명)는 단번에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 “이제 그 얘기라면 지겨울 정도예요. 지나가는 사람들은 별거 아닌 걸로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사람들 다녀가면 얼마나 시끄럽고 마음이 불편했던지. 날씨 좋을 때면 더했죠. 벽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 옆 마을에서부터 시작해 여기까지 쭉 내려오니까요.”

두 마을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은 같았다. 주거공간으로서의 마을에 벽화가 그려지며 관광지로서의 가치가 부각됐으나 정작 마을 주민들에게 각양각색의 불편이 생겨난 것이다. 불만은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옮겨갔다. 그리고 실제 두 마을은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방법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 이화마을은 ‘안정된 유지’를, 장수마을은 ‘대안적 변화’를 택했다.

이화마을은 여전히 ‘벽화마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기까지는 마을 주민이 일등공신이다. 낙산공원 부근에서 시작하는 도보여행 코스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낙서로 가득한 벽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누구와 누구의 이름 사이에 ‘하트’ 모양을 그려 넣는 등 낡은 주점 벽면에서나 볼 법한 갖가지 문구가 가득하다. 2층에 사는 정미리씨(56)가 이 집으로 이사를 오기 한참 전부터 이미 그렇게 돼 있었다고 말한다. “다른 집들은 다 안 그렇던데 이 담장만 유독 그런 걸 보면 아마 애초에 낙서가 콘셉트였나 싶어요.”

담벼락에 낙서가 가득하니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정씨는 긍정을 유지한다. “국내외 관광객도 많고, 아이들이 단체 견학으로도 많이 오는데 사람들이 많이 와서 활성화되면 좋은 점이 많죠. 도심 한가운데에 이런 공간이 만들어지는 게 쉽지는 않잖아요.” 겨울이 아닌 때에 그는 직접 집 앞에 화분을 가져다 놓는다. 예쁜 팻말도 걸어놓는다. “그렇게 꾸며놓으면 계단까지 올라와서 사진 찍는 사람이 많아요. 집값이나 이런저런 생활 속 피해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사람들 간에 닫히고 단절된 삶이 아쉬웠던 저에게는 그래도 재밌는 일이에요.”

서울 창신역 부근 장수벽화마을 ⓒ 시사저널 임준선


“벽화마을로만 인식되는 건 반갑지 않다”

마을 주민 한 명 한 명의 힘이 이화마을 벽화들을 안정된 유지 상태로 이끌고 있는 셈이다. 2006년의 프로젝트 이후 이화마을에는 두 번의 큰 보수 작업이 있었다. 한 번은 문화부 차원에서, 한 번은 일부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기금을 마련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어떤 벽화들은 주인의 취향을 따라 바뀌는 등 사업 초기의 일관성에서 이탈하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주민의 손으로 벽화가 관리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변민주 교수는 “마을 주민, 보는 사람 등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공유성’, 동네의 문화를 적절하게 빗대는 ‘상징성’에 좀 더 세심한 고민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라며 “그렇다 보니 주민들에게 불편을 주고 벽화를 관리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마을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직은 완벽하지 않지만 시도 자체로 긍정적일 수 있다”며 “궁극적으로는 벽화를 포함한 갖가지 공공 디자인을 통해 마을의 커뮤니케이션을 완성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화마을은 이제는 벽화만을 위한 곳이기를 원치 않는다. 이화동 쇳대박물관의 최홍규 관장은 “50년이 넘은 마을에 변화는 필요했다”며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화마을이 벽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고무적”이라면서도 “그러나 역사성, 뛰어난 경관을 배제한 채 벽화마을로만 인식되는 것은 반갑지 않다. 1950년대 후반 건립돼 서울시 미래유산으로도 지정된 이화동의 가치가 더 주목받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비슷한 시각, 장수마을은 또 하나의 변화를 겪었다. 마을기업 ‘동네목수’의 집수리 사업과 함께 벽화가 지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을에 거주하며 동네목수에 고용된 이들이 노후한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동네 주민들의 의견에 따른 결과였다. 인근의 한성대 학생들과도 상의해 벽화를 덮었다.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아주 최소한의 공간에만 조그맣게 새로운 그림을 그려 넣었을 뿐이다. 주민들 스스로 선택한 일종의 ‘대안적 변화’였다.

박학룡 동네목수 대표는 “벽화가 그려진 후 적극적으로 불만을 드러내진 않더라도 피해를 호소하는 주민이 많았다”고 말했다. 실제 박순애씨와 같은 일부 주민은 벽화에 대해 부정적인 자세를 숨기지 않았다. 박 대표 역시 “벽화로 인해 주민들의 삶이 질적으로 나아졌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박 대표가 꿈꾸는 마을은 ‘주거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마을’이다. “우리 마을의 벽화는 마을 분위기를 좀 더 산뜻하게 만드는 데 의의가 있었어요. 종종 ‘테마’가 있는 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차분하고 안정적인 주거지로서의 기능 그 자체입니다.”

‘더 이상의 벽화는 없다’는 것이 두 마을의 공통적인 입장이다.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날수록 두 마을에서 벽화가 조금씩 흐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민들은 희망한다. 벽화가 흐려지는 그만큼 동네가 좀 더 선명하게 보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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