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의 부조리와 잡스의 약점 드러내다
  • 허남웅 | 영화 평론가 (.)
  • 승인 2016.01.28 19:35
  • 호수 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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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기 일보 직전 미국 경제의 지난 10년 담은 <빅 쇼트>와 <스티브 잡스>
ⓒ 롯데엔터테인먼트

미국은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2000년대 후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불거진 금융위기 때문이었다. 그런 미국이 지금은 극적으로 부활했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천재들이 디지털 창의(創意) 산업을 이끌며 바닥을 치던 미국 산업을 이끌었다. 지옥과 천당을 숨 가쁘게 오간 미국 경제의 지난 10년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다. 국내에서 1월21일 동시에 개봉한 <빅 쇼트>와 <스티브 잡스>다.

캐피털회사를 운영하는 마이클 버리(크리스천 베일)는 신용등급이 낮은 저소득층에게 주택 구입자금을 빌려주는 주택담보대출 상품, 즉 ‘서브프라임 모기지’ 자료를 살피던 중 곧 미국의 부동산 거품이 붕괴할 것임을 직감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상환일이 곧 집중되어 있는데 대출 이자만 근근이 내던 이들이 고액의 원금을 갚는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버리는 회사의 보유금 대부분을 미국 부동산 시장의 실패에 투자한다. 가치가 하락하는 쪽에 투자하는 것을 의미하는 주식 용어 ‘빅 쇼트(The Big Shot)’를 감행한 것이다. 버리의 고객들은 말도 안 되는 투자라며 고소 운운하지만, 이에 주목한 이도 있다. 대형 은행 트레이더인 자레드 베넷(라이언 고슬링)이다. 베넷은 소수의 투자자를 선택해 대형 은행과 반대로 투자하게끔 하는 게 특기다. 펀드매니저 마크 바움(스티브 카렐)이 베넷의 제안에 솔깃해한다.

의기투합한 버리와 베넷과 바움은 ‘미국 주택 가격이 폭락하면 그 액수만큼의 보험금을 지급받는 계약’을 통해 무려 20조원의 천문학적인 액수를 벌어들였다. 그래서 <빅 쇼트>는 ‘월스트리트를 물 먹인 괴짜 천재들의 믿을 수 없는 실화’로 선전된다. 하지만 이는 출중한 배우들에 관객의 시선을 돌리려는 홍보 목적일 뿐, 이 영화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문장은 아니다. <빅 쇼트>가 주목한 건 ‘괴짜 천재’가 아닌, 금융위기로 드러난 미국 사회의 ‘믿을 수 없는 실화’와 같은 부조리다.

영화 의 한 장면 ⓒ UPI 코리아


<빅 쇼트>, 월街 견고한 부조리의 실화

<빅 쇼트>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이 말은 월스트리트의 붕괴를 목격했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을 ‘착각’하게 만든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월스트리트는 정말 붕괴했나? 미국 정부는 건전한 금융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대형 금융기업의 탐욕을 바로잡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 결과는? 1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은 골드만삭스는 여전히 건재하다.

무엇보다 주택 시장의 몰락에 대비한 보험에 투자해 큰돈을 벌어들인 ‘괴짜 천재들’의 존재는 부조리한 미국 사회의 시스템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역으로 증명한다. 부조리는 개인들의 욕망이 모여 적정한 수위를 넘을 때 비로소 두드러진다. 그런 상황에서 <빅 쇼트>의 ‘괴짜 천재들’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과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명확하다. 남들과 다른 안목으로 시스템의 맹점을 파악하는 능력은 이 세계를 지탱하는 바르고 건실한 경제를 위해 필요하다. 그렇지만 타인의 불행을 씨앗으로 삼아 배를 불리는 행위는 그렇잖아도 불안정한 경제를 좀먹는 행위에 불과하다.

<빅 쇼트>가 잘 알려지지 않은 ‘실화’에 주목한다면, <스티브 잡스>는 제목처럼 이제는 ‘신화’적인 인물이 된 애플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를 다룬다. 잡스를 다루되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1984년 매킨토시, 1988년 넥스트 큐브, 1998년 아이맥 론칭을 지켜보며 역사적 인물의 면모에 가려진 무대 뒤의 평범한 모습에 관심을 보인다.

<스티브 잡스>, 동굴에 갇힌 잡스의 신화

이는 <소셜 네트워크>(2010)의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머니볼>(2011)의 메이저리그 야구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 빌리 빈 등 실제 인물을 영화로 다루는 데 탁월한 접근법을 보여준 각본가 아론 소킨의 아이디어였다. 아론 소킨이 보건대, 잡스는 신화라는 동굴에 갇힌 인물이다. 애플에서 잡스는 독재자였다. 현재의 모니터가 달린 컴퓨터 형태를 개발한 애플의 공동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세스 로건)은 잡스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쏠리는 것이 불만이다.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기 전 워즈니악은 잡스에게 무대에서 자신의 팀원들을 소개해달라고 읍소하지만, 늘 거절당한다. 잡스의 입장은 확고하다. 프레젠테이션은 혁신적인 제품을 소개하는 자리이지 애플 직원들의 업적을 치하하는 무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치밀하게 애플을, 그리고 자신을 포장한 잡스를 다루기 위해서는 영화에도 완벽한 형태의 구성이 필요했다. 각본가 아론 소킨과 감독 대니 보일이 프레젠테이션 현장을 연극 무대처럼 꾸며 3막의 형태를 취한 건 그래서다. 그 와중에 영화가 관심을 두는 건 무대 앞이 아닌 무대 뒤의 잡스다. 아이콘의 무대에 갇혀 신화화된 잡스를 인간의 자리로 해방시키려는 의도가 짙게 배어 있다.

프레젠테이션을 얼마 앞두고 잡스를 곤혹스럽게 하는 건 오랫동안 존재를 부정해온 딸과의 관계다. 매킨토시 론칭 현장에 찾아온 딸과 엄마와의 설전(舌戰)에서 잡스는 자신이 딸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결국 딸임을 인정하게 되지만, 그 어떤 묘사보다 이 관계가 흥미로운 건 잡스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그가 통제하지 못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매력은 통제의 틀을 벗어난 상황이 만들어내는 예측 불가능한 지점에서 발생하기 마련이다. 잡스 같은 이는 워낙 대외적인 이미지를 철저히 관리한 탓에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약점은 더 커 보일 수밖에 없다. <스티브 잡스>가 잡스와 딸의 관계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이유다. 잡스 자신은 딸과의 관계가 자신의 경력에 오점을 남길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영화는 오히려 딸을 잡스의 구원자 같은 존재로 그린다. 실은 잡스도 인생에서 실패를 경험했다. 매킨토시의 매출이 예상과 다르게 저조하자 잡스는 그가 영입했던 존 스컬리에 의해 애플에서 쫓겨났다. 이 영화가 다루는 넥스트 큐브 프레젠테이션은 잡스가 애플에 다시 복귀하기 위해 세운 전략이었다. 일종의 복수극이었던 셈인데 이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다. 디지털 시대를 이끈 잡스가 신경 썼던 건 ‘안녕’, 즉 소통과 관계의 방식이었다. 그 바탕은 결국 인간이었다. 영화는 프레젠테이션 무대에만 존재했던 잡스를 마지막 순간 건물 바깥으로 나오게 해 인간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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