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홍수 시대에 더욱 기대되는 ‘가족’이란 카드
  • 하재근 | 대중문화 평론가 (.)
  • 승인 2016.02.04 14:36
  • 호수 1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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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여제(女帝)’가 돌아온다. 김수현 작가의 신작 <그래, 그런 거야>가 SBS 밤 9시 주말드라마로 편성돼 2월13일부터 방영된다. 원래 그 시간대에 예능을 편성했던 SBS가 다시 드라마를 부활시킨 것은 김수현 작가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그래, 그런 거야>는 ‘현대인의 외로움을 따뜻하게 품어줄 정통 가족드라마로, 3대에 걸친 대가족 속에서 펼쳐지는 갈등과 화해를 통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가족의 소중함을 경쾌하면서도 진지하게 그리는 작품’이라고 알려졌다. 김 작가는 “이 드라마를 통해 가족의 이름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하고, 갈등을 극복하고, 함께 행복해하고 울고 웃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새삼 가족이란 그 무엇보다 소중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 가치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sbs 제공

이런 설명들은 김 작가가 그녀를 40여 년간 드라마 여제로 군림하게 했던 가장 핵심적인 장르 중 하나인 대가족 드라마로 돌아온다는 걸 알려준다. 여제의 본령(本領)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순재와 함께 컴백하는 것에도 눈길이 간다. 김 작가는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무자식 상팔자> 등 이순재를 내세운 대가족 이야기로 그동안 신화를 써왔다.

김수현의 최근 입지가 조금 불안해진 것도 사실이다. <천일의 약속>(2011)이 20% 고지도 밟지 못했고, JTBC <무자식 상팔자>(2012)로 다시 명성을 회복하는 듯했지만, 2013년 마지막 작품인 <세 번 결혼하는 여자>가 제목이 스포일러라는 지적(주인공의 두 번 이혼, 세 번 결혼이 예고됨)과 함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이번에는 이순재에 강부자까지, 그녀의 성공 보증수표들로 진용을 짰다. ‘드림팀’과 함께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이야기로 돌아온 그녀는 신화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을까?

김수현 작가는 작사가 양인자와 함께 잡지사에 다니던 1968년 문화방송 라디오 드라마 공모전으로 데뷔했다. 양인자는 김수현이 그때부터 천부적인 이야기꾼의 재능을 보였다고 했다. MBC는 1972년부터 김수현에게 일일드라마를 맡겨 ‘드라마 왕국’이란 칭호를 받기 시작했다. 김수현 드라마 방송 시간이면 ‘전화국이 한가해진다’ ‘시체도 벌떡 일어난다’ ‘수도 계량기가 작동을 멈춘다’ ‘택시 손님이 없다’는 등의 속설이 생겨난 것도 이 즈음부터다.

첫 일일극인 <새엄마>에서부터 김수현의 존재감은 드러났다. 과거를 회고하는 신파나 남성 작가들의 사극류가 득세하던 시절에 김수현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다. 또 ‘새엄마=못된 계모’라는 상식을 깨는 파격도 선보였다. 바로 뒤이어 <수선화>로 신인 김자옥을 ‘눈물의 여왕’에 등극시키며 대히트를 기록했다. 대가족 드라마와 함께 김수현의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인 격정적 멜로물이 자리를 잡은 것이 바로 이때다. <수선화>로 김자옥은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1980년대에 그녀는 격정적인 멜로의 구조 속에 개인들의 꿈틀대는 욕망을 담아 산업화 속 한국 사회의 풍경을 그려냈다. 바로 그것이 70%대의 시청률을 연이어 기록한 전설적인 드라마<사랑과 진실>(1984)과 <사랑과 야망>(1987)이다. <사랑과 진실>로 정애리와 원미경이 당대의 스타가 됐고, <사랑과 야망>에선 차화연이 전설적인 스타가 되고 이덕화가 재기했다(이때 김수현의 권유로 이덕화가 가발을 쓰기 시작했다).

김수현 격정 멜로의 계보는 훗날 <청춘의 덫>

(1999)에서 심은하의 “당신, 부숴버릴 거야!”와 김희애의 변신으로 화제를 모은 <내 남자의 여자>(2007)로 이어진다. <내 남자의 여자>는 김수현이 “왜 불륜을 집어넣었는지도 모르겠는 무늬만 불륜인 드라마가 깝깝해서” 직접 집필한 본격 불륜 드라마였다. 이때의 불륜녀 연기로 김희애는 연기대상을 차지했고, 2015년에 tvN <명단공개 2015>에서 뽑은 역대 불륜 연기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소비문화가 만개하고 신세대가 등장하는 1990년대, 김수현은 가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바로 <사랑이 뭐길래>(1991)와 <목욕탕집 남자들>(1995)이다. 이 작품들은 연이어 국민 드라마가 됐다. 이순재는 국민 아버지로 자리매김했고, 특히 <사랑이 뭐길래>는 중국에서까지 인기를 끌어 최초의 한류 드라마로 기록됐다.

SBS 드라마 로 돌아오는 김수현 작가는 연기자들의 대본 리딩 현장에 매번 참석해 호흡을 맞춰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 뉴시스


인간과 사회 그리는 통찰력 녹아 있어

김수현이 드라마 여제로 불리는 것은 그녀의 작품이 단순히 ‘시청률 제조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극적이고 황당한 설정으로 시청률만 올리는 작품들과 달리 그녀의 드라마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이 있다. 그녀는 대가족 안에 당대 사회를 반영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을 포진시켜 각각의 욕망을 그려낸다. 이번 <그래, 그런 거야>에서도 20대 ‘미생’, 30대 맞벌이 부부와 신중년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인간을 그려내는 도구는 ‘말’이다. “내 대사가 싫으면 내 드라마 보지 말라”고 할 정도로 그녀는 자신이 세공해낸 대사에 자부심을 갖는다. 한때 영화 <아바타>를 폄하했다고 해서 비난을 받았는데, 이것도 할리우드 특수효과 이미지보다 자신의 성찰을 담아낸 말이 더 뛰어나다는 자신감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녀는 통속적인 가족과 멜로 이야기 속에 사회적 변화와 각 개인 욕망의 충돌을 다루며 동시에 정확히 반 보 앞서 나가는 감각을 선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2010)에서 동성애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사회 문제에 대해 적절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사랑이 뭐길래>가 한류 드라마가 된 것도 이런 그녀의 통속성과 사회감각의 절묘한 결합 때문이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대가족의 이야기에 새로운 신세대 부부의 사고방식, 그리고 가부장의 권위에 반기를 드는 주부의 각성을 그렸는데, 그것이 우리와 비슷한 전통적 배경 속에서 현대화를 해나가는 중국인들에게 공감을 준 것이다.

물론 김수현의 ‘속사포’ 대사에 식상함을 느끼는 시청자도 있고, 자기복제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그럼에도 김수현의 귀환에 기대가 모아지는 것은 지금이 막장 주말극 전성시대이기 때문이다. <왔다! 장보리>와 <내 딸, 금사월>로 MBC가 ‘막장 왕국’의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정통 가족극에 대한 향수가 더욱 커졌다. 가족 해체, ‘혼밥’(혼자 먹는 밥)의 시대이기 때문에 대가족의 의미가 더 각별해진다. 황당하고 극단적인 인물들을 내세워 마치 게임처럼 쾌속 진행하는 드라마들이 득세하는 이때, 김수현의 방식은 다시 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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