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 선택한 뿔난 미국 시민
  • 김원식│국제문제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2.16 14:26
  • 호수 137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햄프셔 경선 돌풍 일으킨 ‘샌더스’와 ‘트럼프’ 공통점
미국 대선 경선에 ‘아웃사이더’ 돌풍이 불고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 내 경선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버니 샌더스 후보(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후보. © AP연합

“‘아웃사이더’의 반란이다.” “기성 정치권에 염증을 느낀 시민들이 표로 일침을 가했다.”

지난 2월9일, 미국 뉴햄프셔주에서 개최된 대선 예비경선에서 공화당에서는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민주당에선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자 나온 말들이다. 이 둘은 극과 극의 차이를 보이지만, 기존 양당의 정치인 출신이 아니라 이른바 ‘아웃사이더(outsider)’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둘이 불과 9개월여 전에 대선 출마선언을 할 당시만 하더라도 그 누구도 이같은 파란을 일으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부동산 재벌이자 원래 ‘막말의 대명사’로 악명이 높았던 트럼프는 이전에도 미국 대선 레이스 참여를 선언했다가 그만둔 사례가 여러 번 있었다. 버몬트주 상원의원인 샌더스 역시 버몬트주에서는 인기를 얻고 있지만 “미국 자본의 상징인 월가를 없애겠다”고 할 정도로 과격한 공약을 들고나올 당시에는 모두 ‘계란으로 바위 치기’ 정도로 치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변했다. ‘막말의 대명사’ 트럼프가 자신의 광기를 뿜어낼수록 그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무슬림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을 해도, 상대 후보를 여성 성기에 비유하는 등 여성 비하 발언을 해도 그의 지지율은 더욱 올라가기만 했다.

차원은 다르지만 샌더스에게도 비슷한 면이 있다. 그는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소득 불평등이라며 월가 등 독점 자본을 해체하고 그 돈으로 유럽식 전면 무상복지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미국에서는 어쩌면 받아들일 수 없는 공약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돌풍이 일면서 그의 지지율도 더욱 올라갔다. 샌더스는 첫 경선지였던 아이오와주에서 유력한 후보인 힐러리와 거의 동률을 이루는 접전을 벌인 데 이어 뉴햄프셔에서는 무려 60%의 득표율을 얻으며 38%득표에 그친 힐러리를 완전히 따돌리는 이변을 연출했다.

‘진보’ ‘보수’ 양극단의 대표 주자

첫 경선에서 2위에 그쳐 한때 현실적 지지율과는 동떨어졌다는 의혹을 받았던 트럼프도 뉴햄프셔에서 35%의 지지율을 획득해 10%대에 그친 여타 후보들을 압도했다. 극과 극을 보이는 샌더스와 트럼프가 기존 정치인들을 완벽하게 격파한 순간이었다.

이 둘은 각자의 성향 자체가 서로 완벽한 양극단을 대표하고 있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샌더스는 어린 시절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불평등을 몸소체험해 월가와 거대 자본에 대한 개혁 의지를 체질적으로 담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이를 바탕으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축적했고, 기업의 경쟁력이나 자본의 이익을 체질적으로 담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우선 둘 다 생물학적 나이가 70대다. 샌더스는 1941년생으로 만 75세이며, 트럼프는 1946년생으로 올해 70세다. 일반적으로 세대교체를 주장하며 개혁적 공약을 내건 젊은 후보가 선거 돌풍을 일으키는 공식을 이 둘은 ‘노객(老客)의 돌풍’을 일으키며 깨나가고 있다.

선거 자금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 대선은 ‘돈의 선거’로 불릴 만큼 대선 후보가 얼마나 재벌이나 갑부로부터 자금을 많이 얻어내느냐가 당락의 관건이 된다. 트럼프는 이미 그 스스로가 대선 자금으로 다 쓰고도 남을 만큼 부를 보유하고 있어서 이로부터 자유롭다. 샌더스는 역으로 마찬가지 상황이다. 초기 대선자금 문제가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른바 ‘풀뿌리 민주주의’로 일컬어지는 개미군단의 소액 기부가 줄을 이으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오히려 소액 기부자들이 적극적 지지자가 되는 효과까지 낳으면서 샌더스의 지지율은 날개 달린 듯 올라가고 있다. 이 양극단의 아웃사이더는 서로 다른 이유에서지만, 거대 자본의 영향에서 자유롭다는 공통점을 가진 것이 지지율 상승의 또 다른 동인이 되고 있다.

보수 백인과 서민층의 ‘정곡’ 찌른 카타르시스

이들은 연설 기법에서도 닮았다. 트럼프는 ‘막말’로 불리고, 샌더스는 ‘직격탄’으로 불릴 만큼 대중을 사로잡는 연설 스타일을 지녔다는 점도 이 두 사람이 가진 공통점이다. 네거티브 방식의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트럼프는 거침없는 공격성 막말로 대중의 마음을 확실히 사로잡는다. 그가 막말을 하면 할수록 그를 지지하는 공화당계 백인 유권자들은 “속이 시원하다”고 탄성을 내지르며 그를 지지한다. 상대방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고 있는 샌더스도 일단 연설 단상에 올라서면, 거침없는 직설화법으로 명료하게 유권자를 사로잡는다. 한마디로 트럼프는 그동안 보수 백인들이 품었던 불만의 정곡을 찌르고, 샌더스는 그동안 서민들이 품었던 불만의 정곡을 찌르면서 자신의 지지자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 양극단이 가진 가장 큰 공통점은 말 그대로 기존 정치권이나 세력과는 대비되는 ‘아웃사이더’라는 점이다. 샌더스는 버몬트주에서 시장을 역임했고, 상원의원으로 지내고 있지만, 그는 양당 체제의 미국정치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무소속으로 정치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민주당 대선 레이스에서 뛰고 있음에도 그의 지향점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아닌 사회주의 성향에 가까운 무소속이다.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부동산 재벌인 그는 이미 오래전에 무소속으로 대선 출마를 시도할 만큼 공화당과는 인연도 없는 아웃사이더였다. 샌더스와 트럼프는 이렇게 모두 자신들이 기존 정치권 세력이 아니라는 것을 최대 강점으로 내세운다. 이는 그동안 기득권에 얽매여 이권싸움에 여념이 없던 정치권에 실망한 유권자들을 그대로 파고드는 힘이 된다.

미디어에 대한 이 두 아웃사이더의 불만도 유사하다. 막강한 부를 소유한 트럼프이지만, 그는 늘 주류 언론이 자신을 왜곡한다고 비판한다. 최근 미국 보수계 언론인 ‘폭스뉴스(FoxNews)’와의 싸움이 대표적이다. 샌더스 역시 주류 미디어들이 힐러리에게만 초점을 맞출 뿐, 자신의 공약이나 활동은 보도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렇다 보니 샌더스와 트럼프는 모두 이를 만회하고자 이른바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여타 후보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최다의 팔로워를 가진 트위터리안이다. 트럼프는 거의 매일 트위터를 통해 의견을 발표하고 샌더스도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개미군단을 조직한다. 결국 두 아웃사이더는 주류 기득권 정치에 실망한 유권자를 자신들의 지지자로 끌어당기는 묘한 능력을 똑같이 보유한 셈이다.

뉴햄프셔 경선에서 샌더스에게 패한 힐러리 클린턴 후보(왼쪽)와 트럼프에게 진 테드 크루즈 후보. © AP연합

‘초비상’ 동병상련에 빠진 양당 수뇌부

두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자, 가장 초조해진 것은 말 그대로 기존 정치 세력인 공화당과 민주당 지도부다. 두 당 모두 당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 아웃사이더를 경선의 승리자로 발표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트럼프가 첫 경선지인 아이오와에서 2위를 차지하자 내심 안심했다. 여론조사에서 막강한 선두를 차지한 트럼프가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2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민주당 역시 첫 경선지인 아이오와에서 초접전 끝에 간발의 차이로 힐러리 클린턴이 승리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샌더스가 뉴햄프셔에서 무려 20%포인트 이상의 차이로 확고하게 힐러리를 따돌리자, 초비상이 걸린 분위기다.

첫 경선에서 안심한 공화당도 뉴햄프셔에서 트럼프가 확고하게 1위를 차지하자, 이제는 ‘트럼프 돌풍’을 현실로 받아들여야하는 국면을 맞고 말았다. 이에 더해 나머지 공화당 잠룡들이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함에 따라 트럼프에 맞설 대항마도 구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힐러리 대세론에 안주하고 있던 민주당 지도부도 비상이다. 그동안 조 바이든 부통령 등 여러 잠룡들이 대선 레이스 참여를 검토했지만, 힐러리가 대세론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해 일찌감치 꼬리를 내렸다. 그런데 전혀 가망성이 없다고 안심해 ‘언더독’(underdog, 패배자)으로 치부했던 샌더스가 힐러리를 압도해버렸다. 공화당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인종과 성 차별적 막말은 물론 대통령이 돼도 공화당이 전혀 컨트롤할 수 없는 트럼프가 실제로 경선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당의 존재감마저 상실한 분위기다.

민주당 지도부엔 골칫거리가 더 있다. 부상하는 샌더스 돌풍은 고사하고라도 국무장관을 역임한 힐러리와 관련한 스캔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 국무장관 시절 개인 메일서버를 이용해 국가 기밀과 관련된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는 의혹이 사실화되면서 힐러리는 더욱 코너에 몰리고 있다. 힘겹게 샌더스를 경선 과정에서 이겨도 과연 민주당 대선후보로 옹립될 수 있겠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공화당도 마찬가지다. 뉴햄프셔에서 1위에 등극하면서 트럼프 돌풍을 실감한 공화당 지도부도 자칫 이러한 방향으로 대선 레이스가 이어진다면, 트럼프를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언해야 할 상황에 직면하고 만다. 트럼프에 대항할 토박이 공화당 후보가 부상하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경선 레이스 자체가 공화당 아웃사이더인 트럼프의 잔치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해졌기 때문이다.

미국 대선 레이스는 기존 당 외곽의 아웃사이더의 돌풍을 그대로 맞이하고 있는 꼴이 되고 있다. 결국 양당은 모두 자신들의 당 정책과는 전혀 맞지 않는 두 아웃사이더의 돌풍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 동병상련에 빠지고 말았다. 향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2016년 대선을 맞아 미국민들이 기존 정치권을 향해 ‘레드카드’를 던진 것은 분명하다. 민주·공화 양당이 이를 어떻게 돌파해나갈지, 미국 대선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