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경제수석도 빼돌리고 실명제 밀어붙인 YS
  • 박관용│前 국회의장 (.)
  • 승인 2016.02.25 18:18
  • 호수 1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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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통보안 속에 성사시킨 역사적 ‘경제 쿠데타’

정리=김현일 대기자


“저는 이 순간 엄숙한 마음으로 헌법 제76조 1항의 규정에 의거하여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 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반포합니다.”

 

1993년 8월12일 저녁 7시45분, 긴급 국무회의를 마치고 마이크 앞에 선 김영삼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에 금융실명제 도입을 알리는 신호였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역대 정권이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뤄왔었기에 ‘드디어’라는 수식어가 정말 걸맞았다. 대통령은 금융실명제가 개혁 중의 개혁이라면서 분배 정의, 도덕성 확립, 활력 넘치는 자본주의가 꽃피울 것이라고 했다. 또 지하경제가 사라지고 검은돈이 없어질 것이라고 역설했다. “정치인·기업인·공무원 등 모든 국민들이 자신들의 부에 대하여 떳떳하고 정당해질 것”이라는 대목은 검은돈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함축하기도 했다.

 

“하나회 숙청을 개시한 지 보름여가 지난 3월 하순 어느 날 대통령이 내게 불쑥 물었다. ‘실명제는 어떻게 해야 좋겠소?’ ‘선거공약이니 실시해야 하기는 하지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해야 합니다. 조급하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라며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이 양반께서 각오가 단단하신가 보다 하고 있는데 일주일 뒤 얼굴을 보자마자 ‘실명제 실시합니다. 극비리에 추진해야 하므로 팀을 만들어 착수했어요. 그러니 입 닫고 있어요’라고 했다. 비서실장도 모르는 추진팀이라니…. 당혹스러웠지만 더 물을 수도 없었다. 그저 ‘(박재윤) 경제수석 의견은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경제수석은 몰라요. 그 친구는 반대하더구먼’이라고 했다. 그리곤 내게 ‘알고만 있으시오’라는 부연 지시를 내렸다. ‘알고만~’이라는 말이 누가 묻거나 이슈화되면 부인하라는 당부인지 어떤지 헷갈렸지만 되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박관용 당시 비서실장이 전하는 ‘청와대 공조직’에서 금융실명제가 ‘논의’된 전말의 전부다. YS는 이후 청와대 내 어느 누구에게도 실명제를 꺼내지 않았다. 그리곤 3개월이 지난 6월22일 이경식 경제부총리와 홍재형 재무부 장관을 불러 실명제 실시를 위한 철저 준비를 당부한다. 새 정부 출범 11일 만에 육군참모총장 등을 자른 게 ‘친위 쿠데타’라면 이는 ‘경제 쿠데타’였다. 그 위험 부담이 엄청난 국가 대사(大事)를 요리하면서 핵심 참모들도 모르게 전격적으로 해치웠다는 점에서다. 하나회 숙청 때 비서실장도 임박해서야 상황을 간파했는데 경제에는 문외한인 대통령이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경제 문제를 경제수석을 따돌리고 밀어붙인 것은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행보였다.

 

1993년 8월12일, 금융실명제 실시를 위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표하는 김영삼 대통령. ⓒ 청와대 자료사진  

 


“새나가면 목 자른다” 엄명

 

“대통령으로부터 치밀한 준비 당부와 함께 얘기가 새나가면 두 사람(이 부총리, 홍 장관) 목부터 자르겠다는 보안 유지 엄명을 받은 이 부총리는 내게도 시치미를 떼었다. 7월 국무회의 석상에서 내가 ‘잘돼가죠?’라고 넌지시 묻자 그는 ‘무엇을요?’라고 딴전을 부렸고 내가 ‘비밀작업 하는 것’이라고 하자 화들짝 놀랐다. ‘아니 청와대에는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하셨는데…’라며 고개를 젓던 이 부총리는 ‘실장님, 죄송합니다.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하셔서’라며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어쩔 줄 몰라 했다.” 주요 이슈 때마다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YS는 정말 독했다. 대통령의 비밀 엄수 서슬이 얼마나 시퍼렇던지 양수길 당시 부총리 자문관 등 한국개발연구원(KDI)의 3명과 김용진 세제실장(후일 과기처 장관)을 비롯한 재무부 쪽 6명 등 10명이 넘는 준비팀이 50여 일간 작업을 진행했음에도 새나가지 않았다. 실명제안 확정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발표 시기, D-데이였다. 금융실명제 실시에 따른 부작용의 최소화를 위해선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최종 낙착을 본 게 여름휴가가 한창인 8월12일이다. 본래 토요일인 14일이나 그다음 날이 유력하게 검토됐으나 8·15 대통령 경축사가 빛을 잃게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앞당겼다. 단 하루라도 보안 유지 부담을 덜려는 측면도 있었다. H-아워는 은행과 주식시장이 문을 닿는 오후 7시 이후로 정했다.

 

“D-데이를 대비한 대통령 담화 문안까지 마련되면서 걱정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실시에 따른 혼란 등 부작용은 물론이고, 경제수석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인의 소관 임무에서 완전히 따돌려진 사람의 심정이 어떨까 싶었다. 단순한 불신임이 아니라 모욕일 게 분명하지 않은가. 사흘 전인 8월9일 박 수석을 실장실로 호출했다. ‘전할 말이 있는데 다름이 아니라…. 실명제를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어른께서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셔서…’라고 운을 뗐다. 박 수석의 낯빛이 사색이 됐다. 어찌 그렇지 않겠나. ‘박 수석이 실명제에 반대를 하니까 알리지 말라시는데 어쩝니까. 미안합니다. 그런데 왜 반대를 했나요’라고 물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박 수석은 ‘반대한 적 없습니다. 물으시기에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했을 뿐인데요’라고 했다. 직선적(단선적이라는 표현이 적확하겠지만)인 대통령이 즉각 동의하지 않는 박 수석을 실명제 반대로 ‘분류’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경제수석을 ‘물 먹인’ YS였으나 이후에도 1년 4개월을 수석으로 ‘더 데리고 있다’가 통상산업부 장관으로 내보냈다. YS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용인술이다.

 

보안 집착·속전속결에 따른 부작용 우려


“8월12일 D-데이 당일 대통령 발표 직전 법적 절차를 밟기 위한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물론 은행이 문을 닫은 뒤여야 했기 때문에 오후 7시가 됐다. 국무회의 소집 소식이 알려지면 낌새를 챌 우려가 있어서였고 그래서 회의 통보도 오후로 미뤘다. 회의 안건은 금융 관련 논의로 얼버무렸다. 회의가 시작되자 모든 장관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더욱이 바로 하루 전날 공직자 재산등록을 끝낸 장관들이었기에 속이 더 편치 않았을 것).” 

 

황인성 국무총리가 실명제 도입을 인지한 날짜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리는데 총리는 돌아가는 판세를 ‘대충’ 짐작했을 것이라는 게 정설일 정도다. 박 전 실장의 회고는 계속된다.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그러나 비서실장인 내겐 일이 남아 있었다. H-아워 전 수석들에게는 귀띔을 해야 해서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경호실 식당에 오찬 자리를 마련했다. ‘오늘 실명제 의결을 위해 국무회의를 소집합니다. 왜 미리 얘기 못했는지는 짐작하실 테고…. 나나 박 수석이나 이래야 했던 것을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박 수석의 처지를 헤아려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둘러댔다. 하기야 박 수석이 실명제 준비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된 사실은 눈치 빠른 기자들이 발표 이틀 전 집무실에서 망연자실해 있던 박 수석과 이 부총리의 설명을 취합해 기어이 들춰냈었다.” 

 

박 전 실장은 철통보안 덕에 그 민감한 실명제 도입이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된 점을 다행스러워 한다. 권력 내부를 꿰고 있다는 대통령 차남 현철마저도 전격적인 실명제 실시로 본인의 자금 수십억 원이 묶이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 보안에 빈틈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박 실장은 그러나 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보안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 따른 허점과 부작용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는 이런 심정을 “YS가 실명제와 관련해 지하경제니 어떠니 하는 의미를 얼마나 알고 계셨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결심이 서면 무섭게 몰아붙인다는 점이다. 때문에라도 더 잘 보필해야 한다”는 말로 대신했다. 새 정부 출범 이틀째인 2월27일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면서 시작된 YS의 경제 개혁 드라이브는 실명제 실시로 절정을 이룬다. 국민 지지는 치솟았고 어느 조사 결과에서는 95% 지지율을 찍기도 했다. 실명제 실시 1년 후 실명 확인율은 92.4%에 이르렀고(실시 2개월 후에는 81.3%), 가·차명 실명 전환 액수는 6조2834억원, 실명 전환 예금의 국세청 통보는 17만여 건에 3조5000억원 수준이었다. 아직도 법망을 피해 다니는 검은돈과 그 배후가 상당하다지만 그렇더라도 실명제 실시 의미와 평가까지를 어지럽히진 않는다.

 

 

1982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이철희·장영자 금융사기 사건’의 주역 장영자씨. 이 사건은 금융실명제 도입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 연합뉴스

전두환 대통령이 철권을 휘두르던 1982년 2월, 서울 남산 자락에 위치한 사파리 클럽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한국의 고급 승용차들을 총집결시킨 듯 장충동로터리 사방이 정·군·관·재계 거물들이 타고 온 차량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새카만 정장의 경호원 수십 명이 사파리 클럽 주위와 인근 도로변을 경계하며 하객들을 안내했다. 신랑은 이철희, 신부는 장영자. 이(李)는 중앙정보부(현 국정원) 차장 시절 ‘김대중(DJ) 납치 사건’ 실무 총책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전직 국회의원(유정회). 장(張)은 지금도 사채 시장을 말할 때 ‘큰손’의 대명사로 회자되는 여인이다. 대학 시절 메이퀸에 뽑히기도 했던 장 여인은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당시 노인회장)의 동생 이규광(전 헌병감)의 조카이자, DJ의 첫 부인 차용애의 이종사촌 동생이라는 혈연관계가 있다.

 

“요즘 유명 가수나 배우들의 결혼식이 요란하다지만 이들의 결혼식과는 비교가 안 된다. 하객 면면과 캐비아 등 최고급 요리가 나오는 초호화판 접대 등에서. 한국 재계를 뒷전에서 주무르던 커플다웠다.” 당시 결혼식을 직접 지켜본 유일한 언론인 K씨의 회고다. 그러나 초특급 결혼식을 마친 부부의 달콤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3개월 후인 5월7일 검찰에 구속된다.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건설업체들에 특수 자금이니 비밀로 하라며 현금을 빌려준 후 대가로 그 몇 배에 해당하는 약속어음을 받아(어음 할인) 다른 회사에 빌려주는 수법으로 거액을 챙긴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도급 순위 8위였던 공영토건의 약속어음은 1279억원. 빌려준 돈의 9배에 달했다. 이런 식으로 받아낸 총액이 7111억원. 요즘 환율로 환산하면 7조원이 넘는, 당시 한국 GNP(국민총생산)의 10%에 해당하는 천문학적 거액이었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세계적 전문가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의 ‘선진 기법’을 구사한 것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 기술자들이 장 여인을 사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경제는 유통이다”는 금언도 장 여인의 법정 진술 때문에 널리 퍼졌다.  

 

아무튼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은 대기업 부도 사태 등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었기에 세간의 의혹은 청와대로 향하게 마련이었고 정·재계에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절대 권력을 쥐고 있던 전두환 정권이었지만 민심 회유를 위한 대책 수립이 시급했다. 이때 나온 궁여지책이 금융실명제다. 하지만 정·관·재계의 수뇌부는 물론 웬만한 끗발이나 돈푼깨나 있는 사람이면 가·차명(假·借名)으로 ‘검은돈’을 굴리고 있었기 때문에 도입은 난망이었다. 각계 리더들이 합심해도 될까 말까 한데 ‘당사자들’이 자기 발등을 찍는, ‘구린 돈’의 정체가 까발려지는 제도를 달가워할 리 없었다. 그래서 그해의 ‘7·3 조치’는 흐지부지됐고,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8년 금융실명제 준비단이 설치됐으나 역시 보류됐다. 여야를 가리지 않는, 뿌리 깊고 방대한 저항·반발 세력이 포진한 과제를 공개리에, 일개 재무부 과장이 맡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을 터다. 자금의 해외 도피, 주식시장 도괴(倒壞) 등 각가지 그럴듯한 이유가 먹혀들게 마련이었다. 

 

그 지난함 때문에 ‘경제 쿠데타’로 불리는 금융실명제는 공론화된 지 10년 후인 김영삼(YS) 정부에 이르러서야 빛을 보게 됐다. 그로 인해 YS 자신의 아들 현철이 구속되고 간접적으로는 IMF 사태라는 비극을 맞이하기는 했지만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추적, DJ 대북 송금, ‘차떼기 사건’ 적발 등이 가능했고 이후 검은돈을 차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YS에 대한 평가를 높이는 이정표적 치적이다. 물론 검은돈은 여전히 횡행한다. 얼마 전까지도 시중에 나돌던 10만원권 수표나 전·노·DJ 비자금 ‘세탁’ 얘기가 잠잠해진 대신 5만원권 상당 부분이 시중에 풀리자마자 ‘잠적’하고 있다. ‘헌 지폐’의 인기가 높고, 1만장 단위로 묶는 띠지가 없는 돈 상자가 발견되는 등도 추적을 피하려는 시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띠지에 찍힌 출납 은행 담당자의 도장을 추적하면 경로가 드러나므로 검은돈 거래 땐 이를 제거하는 게 우선). 고위 관료나 정치인들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고가의 헬스 특별회원권 등도 따지고 보면 ‘검은 아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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