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2'는 ‘민주화’를 관통할 것”
  • 인터뷰어 서영수 감독·정리 김회권 기자 (.)
  • 승인 2016.02.25 18:59
  • 호수 1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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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국제시장>으로 ‘쌍 천만 감독’ 된 윤제균, 그가 말하는 ‘윤제균의 대중영화’

“감독님, 롯데 좋아하시죠?”
“네. 그런데 올해는 롯데 성적이 어떨지….”

부산 출신 기자와 윤제균 감독의 첫 대화는 자연스럽게 프로야구 롯데구단 이야기로부터 시작됐다. 지난해 롯데 성적이 좋지 못했던 데 대해 윤 감독은 속상하다는 듯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윤 감독의 첫 번째 ‘1000만 관객’ 영화였던 <해운대>(2009)에는 그의 부산 사랑, 롯데 사랑이 배어 있다. 직접 사직야구장에서 촬영을 했고, 당시 롯데의 상징이었던 이대호 선수를 배우로 등장시켰다.

“그런 걸 참 많이 물어보신다.” <국제시장>(2015)으로 또 천만 관객을 돌파해 이른바 ‘쌍 1000만 감독’이 되자 사람들은 그에게 실패하지 않는 영화를 만드는 비법에 관해 계속 물어온다. 이번 인터뷰에도 그 질문을 던졌다. “아마 연극영화과를 안 나와서 그런 게 아닐까요. 자기검열에서 자유롭고, 대중영화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자유로움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요.”

윤 감독은 ‘상업영화’ 대신 ‘대중영화’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대중이 재밌어 하는 시나리오를 만드는 작업에 상당 시간을 할애한다. “30명 일반인을 대상으로, 5점 만점에 4점 가까이 돼야 해요. ‘보통’이 3점, ‘재미있다’가 4점, ‘아주 재미있다’가 5점인데, 4점 얻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렇게 4점을 얻는 시나리오가 나와야 영화로 빛을 본다. 그런 대중적 코드 얻기 작업이 아마도 대중적 흥행을 가져왔을 거다. 지난해 1000만 영화였던 <국제시장>은 흥행만큼이나 상복도 많았다. 대종상에서 10개 부문을 휩쓸었다. 그 말 많고 탈 많았던 시상식부터 질문을 던져봤다.

ⓒ 시사저널 이종현

대종상 시상식에서 10개 부문을 휩쓸었는데 그 자리는 바쁘면서 어색했을 것 같다.

좀 난감했었다. 많은 사람에게 축하를 받아야 할 자리였는데 다 아시겠지만 대종상 시상식에 많은 분이 참석을 하지 않아서 상 받으러 앞에 올라가는 게 죄송스럽고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상을 주시는 건 되게 감사한 일이었다. 만든 영화를 좋게 봐주신 거고. 하지만 상황 자체가 편하지만은 않은 자리라 만감이 교차했다.

그런 상황이 초래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부재(不在)고,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라고 본다. 대종상을 주관하는 측도 영화인의 입장에서 일찍 연락을 하고 양해를 구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영화 하는 사람들은 자존심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이고 따뜻한 말 한마디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 못한 과정이 아쉬웠다.

본인이 대종상을 관리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특히 영화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나 같으면 무조건 빌었을 것이다. 내 연출 스타일도 그렇지만(웃음) 내가 연출을 할 때도 그렇다. 톱배우라 자존심이 세고 신인이라 자존심이 약하고, 그런 건 없더라. 배우는 기본적으로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고 감독도 마찬가지다. 10년을 해보니까 그걸 알겠더라. 방법은 오직 비는 수밖에 없더라. 안 된다고 하면 집 앞에서 빌고 와달라고 부탁드리고 그랬을 것 같다.

<국제시장>은 아버지(1991년 작고)를 위한 영화라고 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궁금하다.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물으면 아버지라고 그랬다. 평범한 샐러리맨이셨다. 어릴 때는 과자 사주는 것만 해도 대단해 보였다. 고등학교 때 정년퇴직을 하셨는데, 생각을 해보니 평생 당신을 위해서 여행을 가시는 것도 본 적이 없고 옷을 하나 사시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말 그대로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 어른이 되니 그게 더 커 보였다.

아버지와 친했나.

국제시장에 나오는 황정민과 아들 사이의 관계와 비슷하다. 경상도 스타일에 버럭버럭하고 다혈질이기도 하셨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화를 내도, 제게는 안 내셨다. 아들 바보라고 해야 하나. 겉으로 그래도 저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니 어떤 땐 더 눈물겹다.

속을 썩여드린 적은 없었나?

딱 한 번 있었다. 대학 들어갈 때 3수를 했다. 학교 다닐 때까지 공부를 잘했다. 아버지는 늦게 가진 아들 하나가 공부를 잘하니 얼마나 자랑스러웠겠나. 1988년부터 ‘선 지원, 후 시험’으로 대입 시험이 바뀌었는데, 당연히 서울대를 갈 줄 알았는데 지원하면 떨어졌다. 상실감이 크셨다. 그게 불효라면 불효였다. 그전까지는 저도 참 착했던 것 같다. 나도 지금 초등학교 5학년, 3학년 아들이 둘인데, 내가 어렸을 때처럼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한다. 하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어려웠을 것 같다.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빚이 있었는데 다 갚고 나니까 3000만원이 남았다. 원래 우리 집을 팔고 그 돈으로 그 집에 그대로 전세를 살았다. 전업주부로 평생을 사시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부산 수영시장에서 추어탕집부터 시작해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다. 입주 가사도우미도 몇 년간 하셨다. 나도 대학 4년을 친구 집에서 얹혀살고 알바 해서 생활비를 벌고 그랬다. 작은아버지가 등록금을 도와주셨다.

결혼할 때도 힘들었을 것 같다.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방위를 갔다가 1991년 2학기 때 복학을 했다. 그때 같은 단과대에서 눈에 띄는 여자가 있었다. 신방과 다니는 신입생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신방과 다니는 선배한테 말해서 소개팅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 한 소개팅이었고 첫사랑이었는데 결혼까지 할 줄은 몰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힘들 때 지금 와이프가 많이 사랑해주고 힘이 돼줬다. 그걸 떠나서,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을 못하겠다 싶더라. 난 장남에, 장손에, 외아들에, 홀어머니에, 가진 게 없다. 제사는 내가 다 모셔야 되니 평생 결혼을 못하겠다 싶었는데 이 친구는 변함이 없더라. 내가 볼 땐 장남이 뭔지 제사가 뭔지 그 실체를 잘 몰랐던 것 같다. 하하. 7년을 사귀고 서른 살 때 동네 예식장에서 결혼을 했는데, 600만원을 가지고 시작했다. 결혼할 때가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다.

마음이 아팠던, 묻어놓고 싶었던 그런 게 있었나.

제일 기억나는 게 서울 아현동 10평 반지하에 살 때다. 제사를 내가 지내야 했는데, 그 반지하방에 10명 정도 친척들이 왔다. 명절 포함하면 1년에 6번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사 때마다 싸우는 거다. 그때가 가장 마음이 아팠다. 그 반지하방에서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써보려고 밥상을 펴고 노트북을 펼치면, 난 글을 써야 되는데 옆에서 와이프는 TV를 보니….

그런데 그 시나리오가 입상했다.

그때 태창흥업에서 하는 시나리오 공모전이었다. 상금으로 1500만원을 받았다. 내가 처음으로 영화 일을 시작할 수 있어서 무척 고마웠다.

지금은 그런 일로 안 다투겠다.

지금은 와이프가 되게 잘한다. 자기는 운이 좋기 때문에 옆에 있는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하하.

힘든 젊은 시절을 겪었다. 예전 영화계가 도제 시스템으로 운영됐을 때는 표준계약이 제대로 안 지켜져 영화계에 뛰어든 젊은이들이 힘들었다. 그런데 윤 감독이 <국제시장>을 하면서 제대로 이행했다.

말단부터 전 스태프의 표준계약을 모두 이행한 건 처음이다. 시작은 CJ 쪽에서 표준계약서를 한번 해보자고 이야기가 나왔다. 이 문제는 투자자의 동의가 중요한데 투자자가 하자고 하니까 나도 오케이 했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하기가 쉽지 않다. 예산이 얼마나 오버될지 모르니까. 표준계약서는 심플하다. ‘하루에 12시간 이상 촬영하지 않는다, 12시간이 넘어가면 초과수당을 지급한다, 일주일에 한 번 쉰다, 4대 보험 적용한다’, 이게 표준근로계약서다. 만약 매일 12시간이 넘으면 얼마나 예산이 더 들지 감이 안 잡히는 거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것도 스케줄상 쉽지 않다. 그런데 해보니까 좋더라.

ⓒ 시사저널 이종현


뭐가 좋던가?

일단 12시간 내에 촬영을 끝내야 되니까 내일 뭘 찍을 것인가에 대해 1시간 이상 전날 회의하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12시간 넘어가면 초과수당이니까 촬영 있는 날은 헤드스태프들이 전날 술을 못 먹었다. 전날 1시간만 희생하면 모든 스태프가 행복해지더라. 그걸 아니까 한 달 정도 부산에서 촬영을 할 때 저녁에 헬스를 다니는 스태프도 있었다. 상상이 안 되는 일이 현실이 되니 행복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 쉬니까 부산 주변 여행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아까 표준계약서에 관해 네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여태까지 생략돼 있는 거였다. ‘인간적으로’가. ‘인간적으로 12시간만 촬영하자, 인간적으로 초과수당 주자, 인간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은 쉬자.’ 거꾸로 말하면 그동안 인간적이지 않게 찍었던 거다. 앞으로 JK필름에서 하는 영화는 무조건 표준근로계약서대로 갈 거다. 일반적인 작품이면 1억~2억원, 큰 작품은 3억원 정도가 오버되는데, 그러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일각에서는 <국제시장>을 두고 “동시대의 아픔을 외면했다” “역사 미화다”라고 보기도 했다.

2편을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정리해보니까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의 화두는 ‘산업화’였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이 ‘민주화’다. 섞여 있기도 하지만 크게 보면 그렇더라. 처음 할 때부터 <국제사장> 1~2편을 같이 찍고 싶었다. 배우들과는 이야기가 됐다. 당장이 될지 몇 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감독으로서 덕수와 그의 가족이 민주화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 이야기를 해보고 싶으니까 배우들에게 도와달라고 빌었다. 하하.

그래도 1편에서 민주화 같은 부분을 조금이라도 담고 갔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일부러 뺐다. 철저하게 정치적인 걸 뺐다. 비하인드지만 원래는 정주영 회장도 나오고 남진도 나오고 앙드레 김 선생도 나온다. 시나리오 처음 쓸 때는 젊은 DJ와 YS를 만나는 버전도 있었다.

많은 에피소드를 넣고 싶었는데 못 넣은 건가.

못 넣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시간이, 러닝타임이 정해져 있으니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그리고 가족영화가 되길 바랐다. 할아버지부터 손녀가 한 영화관에서 같이 보는 영화이고 싶었는데 정치적인 걸 넣기가 그랬다. 대신 2편은 시각이 좀 다를 거다. 좌도 나오고, 우도 나오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이 말씀으로 대답을 드리고 싶다.

좌우의 이념 논쟁에 감독들이 두려움을 가지는 것 같다.

이번에 우리나라가 이데올로기에 예민하다는 걸 알게 됐다. 정말로 잘 몰랐다. 영화를 두고 신구(新舊)에 대한 논쟁이 있을 것 같다는 예상은 했었다. 예를 들어 젊은 세대들이 “우리 세대도 지금 무척 힘들다”는 그런 식의 논쟁 말이다. 그런데 우파  영화로 포지셔닝되면서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 당시에 열심히 살았던 소시민의 이야기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적인 우파 영화로 갔다. 이 영화는 문재인 대표도 봤다. 문 대표와도 만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게 왜 논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이게 다 내 팔자”라는 덕수(황정민 역)의 독백에는 감독도 동의하나.

난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운명을 거스르려고도 하지 않는다. 물 흐르는 대로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 대사가 나온 건 영화 속 사람들이 그 당시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지 않나. 그게 운명이라고 순응하고 최선을 다하는 그런 모습을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내 팔자라고 한다면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야지 계속 핑계만 대는 그런 건 싫었다. 저는 세상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because of’(~때문에), 다른 하나는 ‘in spite of’(~그럼에도 불구하고). 핑계가 많아지는 건 도움이 안 되더라. 영화도 마찬가지다. 감독들 중에서는 ‘because of’가 있지만, 그래도 저는 후자가 되고 싶었다.

대기업들이 계열사의 영화, 투자한 영화 등에 스크린을 할애하고 공정하지 못한 경쟁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제가 현업에서 느끼는 건, 사실 일반 관객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 회사의 작품을 밀어주는 게 쉽지 않다. 왜 그러냐면 극장이 다 독립법인이다. 극장의 점주는 극장에 들어온 관객 수로 인사 평가를 받는다. 관객이 많이 들어와야 하고, 그러다 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극장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시스템이 개발돼 있다. 안 되는 영화를 열어달라고 해도 극장 점주의 실적과 관련되기 때문에 안 해준다.

실적과 무관한 압박도 있지 않을까.

거의 없는 것 같더라. 보통 예매율에 따라서 극장의 수가 많아지고 적어지고, 거기에 인지도·선호도 등의 마케팅 지표가 추가된다. 대기업들이 데이터를 축적해놨는데, 인지도와 선호도를 대입하면 예매율 예상치가 나온다. 그런데 그 오차가 정말 적다. 거의 맞는다. 첫 주 극장 수가 계산돼 나온다. 그러면 첫 주에 얼마 정도 나오고 최종 관객이 얼마 정도 될 것인지 딱 나온다.

<국제시장>은 어땠나.

잘될 거라는 평가는 많았는데, 솔직히 1000만명까지는 아니었다. 최대 700만~800만명 정도였다. 이슈가 되고 그러니 1000만을 넘지 않았나 생각한다. 특별한 축복이다.

최근 개봉된 <히말라야>를 제작할 때 직접 연출하지 않고 각색에만 참여했다.

<히말라야>는 오랫동안 준비된 작품이다. 감독을 결정해야 할 때 난 <국제시장> 후반부 작업을 하고 있어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배우들도 스케줄이 다 있고 하니까 황정민씨한테도 다른 감독 모시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윤 감독은 ‘휴먼’을 말하지만 이를 두고 ‘신파’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신파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는다. 항상 생각을 하고 있다. 세상에 욕 들어먹고 기분 좋은 사람은 없지 않나. 욕하는 사람 없으면 그게 웰메이드(well?made) 영화일 거다. 욕하는 사람이 없는 그날까지 영화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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