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던 백수, ‘공기업 경영 달인’으로
  • 한광범·하장청 시사비즈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03 18:23
  • 호수 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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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력 사상 세 번째로 연임한 조환익 사장의 경영 성공 비결

‘유일하게 남은 노병(老兵)’. 한국전력 사상 세 번째로 사장직을 연임하게 된 조환익 사장(66)은 자신을 이같이 비유했다. 행시 동기(14회)들 대다수가 공직과 정부 산하기관을 떠난 것과 달리 그는 여전히 현역에서 뛰고 있다. 그가 동기들에 비해 비교적 이른 2001년 차관보 시절 공직을 떠났던 점을 감안하면 역설적이다. 조 사장은 지난 2월19일 서울 양재동 한전아트센터에서 진행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혼자 남아서 일하게 됐다. 조금 특이한 상황이 됐다”며 웃었다. 당초 조 사장의 임기는 지난해 12월 중순까지였다. 그도 연임을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 뒤통수가 아름답게 나갈 생각이었다.”(웃음)

 

ⓒ 한국전력 제공

 


“휴가 잘라먹으면 3대가 저주받을 것”

 

조 사장은 뛰어난 공기업 경영 능력과 사내의 민주적 리더십, 적극적 소통을 통해 안팎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2012년 12월 취임한 후 5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던 한전을 1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켰다. 지난해엔 영업이익 11조원을 넘겼다. 외부에선 서울 삼성동 본사 부지 매각과 저유가 영향이 컸다고 평가한다. 조 사장은 이런 평가가 아쉽다. “외부적 여건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전 가족들의 노력이 저평가되고 있다.”

 

한전이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하자 산업계를 중심으로 전기요금 인하 요구가 나오고 있다. 조 사장은 요금 인하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한국 전기요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제일 싸다. 일본은 한국의 2.5배 수준이다. 자칫 교각살우(矯角殺牛)가 될 수 있다. 국민들에게 선순환하도록 시장을 위해 써야 한다.” 산업계에 대해선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싼 전기요금으로 한국 경제가 경쟁력을 갖춰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부 ‘잘못된 선택’이 고착화돼 있다.” 다만 조 사장은 가정용 누진제는 개선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조환익 사장은 통상 전문가다. 그의 연임에는 이 점도 고려됐다는 평이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이 밝힌 에너지 신(新)산업을 통한 ‘신(新)시장’ 및 ‘일자리 창출’에 한전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조 사장의 생각이다. 그는 한전 직원들로부터도 소탈하고 소통을 위해 노력한다는 후한 평가를 받는다. “막 취임했을 때 직원들이 자존심을 회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취임 구호를 ‘어게인 켑코(Again Kepco)’로 정했다.” 2013년 경영 구호였던 ‘무신불립(無信不立·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도 같은 맥락이다. 조 사장은 소통을 위해 사내 게시판에 직접 글을 쓴다. 개인적인 이야기도 많다. “사장 편지에 잔소리만 실컷 늘어놓으면 직원들은 보자마자 휴지통에 버릴 거다.”(웃음) 지난 2월 중순엔 결혼을 앞둔 딸과 주고받은 편지를 올려 ‘33년 딸바보’ 인생을 고백하기도 했다. 취임 직후엔 자유로운 휴가 분위기 조성을 위한 ‘극약 처방’을 내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휴가를 잘라먹는 사람은 3대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가 보낸 메일 내용이다.

 

조 사장은 한전 이전에도 한국수출보험공사(현 무역보험공사), 코트라(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서 뛰어난 경영 능력을 선보였다. ‘공기업 경영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배경이다. 산업부 고위 관료 출신의 완벽한 변신이다. 그에게도 늘 햇빛만 비친 것은 아니었다. “공직에서 나온 후 ‘대책 없는 백수생활’을 보냈다.” 조 사장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여파가 남아 있던 2001년 차관보를 끝으로 공직을 떠났다. 그는 산업부에서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치며 동기 중 선두주자로 평가받았다. 산업부 후배들과 기자들 사이에선 그의 퇴직을 두고 "장관감인데 아쉽다"는 말이 돌았다. 당시 돌연 사의를 표명한 데 대해 그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판에 박힌 공직생활을 벗어나 다른 인생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거기에 당시 산업부에 인사 적체가 상당했던 점도 고려했다”고 밝혔다. 덧붙여 농담조로 동기들에 대한 배신감도 털어놓았다. “당시 ‘내가 나가면 다른 동기들도 다 따라 나오겠지’란 생각을 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아무도 안 나왔다.”

 

조환익 사장의 당시 차관보 퇴임 후 ‘아름다운 용퇴’에 대해 칭찬하는 기사도 나왔지만, 그런 관심은 일시적이었다. “몇 달 지나고 보니 그냥 실업자일 뿐이었다.” 워커홀릭으로만 살던 조 사장에게는 시간을 보낼 무언가가 필요했다. “책을 보기 시작했다. 강연도 다니고, 기고도 했다. 방송 진행까지 했다.” 새 경험은 변화의 시작이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일반적인 공무원 모습과 달라지게 됐다. 이후의 경영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남다른 소통방식과 리더십이 생긴 것이다.” 조 사장의 백수생활은 10개월간 계속됐다. 그는 이후 한국산업기술재단 사무총장에 취임해 3년여를 근무했다. 조 사장은 이 시기의 능력을 인정받아 2004년 7월 산업부 차관으로 화려하게 금의환향을 했고, 2006년 1월에 공직을 떠났다.

 

그는 2007년 5월 수출보험공사 사장에 취임했다. 조 사장은 여기서 ‘버럭 조바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금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인 별명이다. "사장에 취임했을 당시 수출보험공사는 금융기관인지 수출진흥기관인지 정체성이 애매했다." 조 사장은 그 같은 분위기 해소차원에서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릇된 인식과 틀에 박힌 업무자세 등으로 사기가 저조하고 미래비전이 약했다. 근본적 개혁이 필요했다." 그렇게 체질변화에 성공했다. 이듬해 7월 코트라 사장이 됐다. “코트라에 갔을 때 역시 ‘역사적 사명을 다한 조직’이라는 평이 있을 만큼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는 취임 후 코트라를 시장형 공기업으로 변모시켜 나갔다. 코트라가 직접 해외 바이어를 상대로 한국산 물건 세일즈에 나서도록 했다. 당시는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로 수출 여건이 좋지 않았다. 조 사장은 이때 ‘역(逆)샌드위치론’을 꺼내들었다. ‘일본의 품질 경쟁력과 중국의 가격 경쟁력 사이에서 한국이 끼인 처지가 됐다’는 샌드위치론을 뒤집어 생각한 것이다. “적당한 품질에 적당한 가격을 가진 한국 제품이 일본·중국 제품과 비교해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유럽 공항 탑승교 수출 등 굵직굵직한 계약을 따내며 코트라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중국발 경제위기라는 현 시점에도 역샌드위치론은 여전히 유효한지 그에게 물었다. “어렵다. 엔저(低)로 일본 제품이 한국 제품보다 가격이 싼 경우도 있다. 드론 등 새 IT(정보기술) 분야에서는 중국이 우리보다 앞선다.” 조 사장은 이 시점에 필요한 게 ‘에너지 신산업’이라고 강조했다. “파리협정 체제 안에서 우리가 산업을 만들어야 한다. 스마트빌딩·스마트팩토리·스마트타운·스마트시티·스마트아일랜드 등 해외로 뻗어나가는 사업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 있는 분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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