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지상파 드라마
  • 하재근 | 대중문화 평론가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09 12:01
  • 호수 1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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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시그널>의 성공이 말해주는 장르물 드라마에 대한 오해와 편견
tvN의 에서는 ‘과거 형사’ 조진웅(오른쪽)과 ‘현재 형사’ 이제훈(왼쪽)의 시간을 뛰어넘은 무전기 교신이 사건 해결의 단서가 된다. ⓒ tvN

tvN 드라마 <시그널>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김혜수의 복귀작이며 <싸인> <유령> <쓰리데이즈> 등을 통해 수사극의 1인자로 떠오른 김은희 작가의 신작으로 주목받은 작품이다. <성균관 스캔들>과 <미생>을 성공시킨 김원석 PD가 가세한 것도 화제였다. 그렇게 주목받고 시작했지만 시청률에서는 큰 기대를 갖지 말라고 했다. 김 작가는 tvN 고위 관계자에게 “절대 시청률을 기대하지 말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애초부터 tvN 측에서도 시청률 쪽으로는 어느 정도 포기하는 분위기였다. 왜냐하면 <시그널>은 장르물이었기 때문이다.

시청자 울분 대변하는 ‘사이다’ 같은 드라마

장르물은 글자 그대로 장르적 관습을 따른 작품이다. TV에 많이 나오는 멜로, 로맨틱 코미디, 가족극, 치정복수극 등을 제외한 미스터리 스릴러와 추리 수사극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멜로적인 요소를 빼고 장르의 특징에 집중한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들은 열성팬이 형성되는 대신, TV 드라마의 주요 시청층인 주부나 중년층에게 인기를 끌기 어렵기 때문에 시청률에서 손해를 본다. 때문에 <시그널>에 대한 기대는 낮았다. 그런데 의외로 이 작품은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2월26일 방영된 11회가 평균 10.9%, 최고 13.5%(닐슨코리아, 유료 플랫폼 기준)로 동시간대 1위를 기록했을 정도다. 인터넷 반응도 뜨겁다. 중간에 살인마로 특별 출연한 배우 이상엽은 “시그널에 참여한 것이 영광”이라고 했을 정도로 업계의 찬사까지 받는다.

<시그널>은 경찰 장기 미제(未濟) 사건 담당 팀이 여러 사건들을 하나씩 해결해가는 구성이다. 첫 번째 사건은 아동 납치 살인사건이었다. 15년 전 경찰은 허술한 수사로 무고한 시민을 범인으로 몰았다. 주인공이 진범을 잡으려 하지만, 경찰 고위층은 경찰조직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 재수사를 막는다. 진범을 잡아 유족의 한을 풀어준 후에도 경찰 조직은 주인공을 치하하기는커녕 배신자로 취급한다.

기본적으로 미제 사건의 존재 자체가 경찰의 한계를 드러내는 치부다. 피해자의 억울함을 생각하면 미제 사건을 반드시 해결해야 하지만, 극 중에서 경찰 조직은 자신들의 자존심만을 생각한다. 동료가 한 수사, 선배가 한 수사의 잘못을 드러내는 걸 금기시한다. 그래서 미제 사건이란 판도라의 상자를 열 때마다 주인공은 조직 내에서 불편한 시선을 받게 되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공분과 응원이 생겨난다. 시청자가 그동안 느꼈던 공권력에 대한 불만이 드라마에 대한 응원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또 <시그널>은 범인을 반드시, 그리고 빠른 시간 안에 잡아내기 때문에 시청자에게 ‘사이다’ 드라마란 찬사를 받았다. 최근 SBS드라마 <리멤버-아들의 전쟁>에서는 범인을 잡는 데 20부작이 소요됐을 정도로 전개가 느렸다. 이런 설정이 너무 답답하다며 ‘고구마’란 지적을 받았다. 대신 <시그널>은 2~3회만에 범인이 잡히는 ‘사이다’ 전개를 보여줬다. 예를 들어, 경기 남부 연쇄살인 사건(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2회만에 해결됐다. 실제 모델이 있는 사건들을 통해 공감도를 높이고 빠른 해결을 통해 통쾌함을 주는 식이다. 그런 기적적인 사건 해결을 위해 활용되는 장치가 ‘과거 형사’ 조진웅과 ‘현재 형사’ 이제훈의 시간을 뛰어넘은 무전기 교신이다. 이런 판타지적 장치를 통해서라도 답답한 사건의 해결이 보고 싶다는 대중 정서를 드라마가 풀어준다.

“한국 드라마는 추리하다 삼각관계 만든다”

이 작품엔 사회적 메시지도 묵직하게 담겨있다. 조세형 사건을 모델로 한 극 중 대도(大盜) 사건에서 이 드라마는 진범을 권력자의 자식이라고 상정한다. 그는 절도부터 강간·살인·마약 등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도 법망을 빠져나간다. 과거 형사는 그를 잡지못한 무력감에 20년 후 현재 형사에게 “거기도 그럽니까? 돈 있고, 빽 있으면 무슨 개망나니 짓을 해도 잘 먹고 잘살아요? 그래도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라고 묻는다. 바로 이것이 <시그널>에 표현된 울분이고 시청자가 공감한 지점이다. 미제 사건이란 결국 자본과 권력에 휘둘리고 조직보신에만 급급한 공권력으로 인해 발생한 인재(人災)라는 게 작품의 진단이다. 주인공인 이제훈은 이런 부조리한 공권력 때문에 가족을 잃고 경찰을 불신하게 된 특이한 경찰이다. 그의 분노는 곧 대중의 분노를 대변한다.

<시그널>은 지상파 방송사들이 모두 검토했던 작품이다. SBS에서는 구체적인 편성논의 단계까지 갔지만 불발됐다. 돈 안 되는 장르물이라서 꺼린 것으로 보인다. 장르물은 시청률도 문제지만 협찬 광고와 해외 수출이 어렵다는 게 방송사들이 갖는 인식이다.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려면 사실 재벌 2세의 로맨틱 코미디가 적절하다. 그래서 지상파 방송사는 이런 종류의 드라마를 끊임없이 반복해왔다.

그런데 tvN은 성공 가능성이 작은 걸 뻔히 알면서도 <시그널>이 ‘좋은 작품’이어서 선택했다. 결과는 tvN의 대박이 말해준다. 바로 이런 에피소드는 지상파 방송사와 요즘 잘나가는 tvN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새로운 시도, 다양한 장르를 과감하게 밀어주는 풍토가 케이블TV 장르물의 대성공으로 나타난 것이다.

<시그널>이 설사 지상파 편성을 잡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성공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지상파는 장르물 속에 멜로 설정 등을 집어넣어 잡탕을 만들기 때문에 <시그널>도 과거와 현재 형사 간의 삼각관계, 알고 보니 현재 형사가 과거 형사의 아들이라는 출생의 비밀 등이 추가돼 망가졌을 것이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온다. 이런 지적이 나올 정도로 지상파의 드라마 선구안은 문제라고 대중은 인식한다. 이런 이미지 탓에 젊은 세대 사이에서 지상파 드라마의 인기는 추락하고 있다.

미국 드라마 추리물은 추리만 하고, 일본 드라마는 추리하다 교훈을 준다. 반면 한국 드라마는 추리하다 연애하며 삼각관계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나오는 냉소인데, 바로 이런 사람들이 지금 케이블TV 장르물의 주 시청층이다. 지상파가 지금처럼 주부·중년층의 입맛만 맞춘다면 젊은 시청자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질 게 빤하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로부터 멀어지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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