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쓰나미’ 몰고 온 ‘백인 노동자의 반란’
  • 김원식│국제문제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3.31 18:40
  • 호수 1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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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유권자 투표 참여율 높아지면 ‘트럼프 대통령’ 가능성도 커져

“내가 2016년이나 혹은 그 이후에도 미국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캠페인을 중단한다. 미국은 정치적 쓰나미(tsunami)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이것이 몰려오는 것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

 

미국 공화당의 마르크 루비오 플로리다주 상원의원(45)이 3월15일 자신의 지역구인 플로리다에서마저 같은 당 대선 주자인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70)에게 참패하자, 경선 하차를 밝히면서 지지자들에게 내뱉은 말이다. 이른바 ‘트럼프 돌풍’을 막기 위해 내심 총력전에 나서고 있는 공화당 지도부로서는 플로리다 경선이 트럼프의 돌풍을 순조롭게 저지할 1차 핵심 관문이었다. 트럼프에 대항할 단일 후보를 만들어야 하는 공화당 지도부로서는 이른바 강경 보수파인 티파티(Tea-Party) 세력 등의 후원을 받고 있는 테드 크루즈 텍사스주 상원의원(46)보다 루비오를 정통 보수 세력의 대변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비오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치러진 경선에서 불과 27%를 득표하는 데 그쳤고, 45.7%를 획득해 압승한 트럼프에게 완전히 참패하고 말았다. 당연히 루비오는 스스로 경선 레이스에서 물러난다고 선언했고 공화당 지도부는 트럼프의 확장세가 이제는 ‘돌풍’이 아니라 미국 정치권 전반을 휘어잡는 ‘쓰나미’임을 확인하고야 말았다.

ⓒ EPA 연합

 


反트럼프 진영, ‘크레이지’ 목소리 사그라져

 

여러 막말과 기행(奇行) 속에도 ‘트럼프 돌풍’이 열풍으로 확대하는 순간에도 거의 모든 전문가는 “저러다 말겠지”라면서 결국 현실적으로 경선이 진행되면 돌풍은 사그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대다수 반(反)트럼프 진영에서도 “크레이지(crazy·미쳤다)”를 외치면서 트럼프에 대한 지지 열풍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애써 냉담해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트럼프 돌풍은 경선이 시작되자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열풍으로 이어졌고, 이제는 미국 정치권의 근본을 뒤흔드는 ‘쓰나미’로 확대되고 있다. “크레이지”를 외치던 반트럼프 진영에서도 더는 그러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과연 이 쓰나미의 파고(波高)가 어디까지 솟구칠 것인지를 숨죽이며 지켜보는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불과 6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에 도널드 트럼프는 이제 기행과 막말의 대명사에서 가장 현실적인 공화당의 대선 주자로 우뚝 섰다. 거의 모든 정치 전문가의 예상을 뒤엎은 트럼프 쓰나미는 이제 일반적인 상식마저도 뒤흔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 민주당의 대선 승리는 ‘누워서 떡 먹기’만큼 쉬울 것이라는 예단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민주당의 선두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은 물론 2위 주자인 버니 샌더스 버몬트주 상원의원과의 본선 가상대결 여론조사에서도 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로 백인 노동자층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트럼프이지만, 그동안 이민자를 비롯한 소수 인종에 대한 차별적 발언과 여성 비하의 몰상식한 발언으로 인해 본선에선 최종 득표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판단이다. 하지만 트럼프 돌풍이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쓰나미로 변하면서 이제 이러한 예단도 그저 민주당의 바람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분석이 대두하고 있는 현실이다.

 

민주당 “계산이 잘못됐다”며 긴장


이른바 ‘미니 슈퍼화요일’로 불리는 3월15일 경선에서 민주당의 힐러리는 플로리다와 오하이오,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다. 이들 지역에서 힐러리의 승리는 그녀가 민주당의 주요 지지 세력인 흑인과 히스패닉계 그리고 여성들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음을 그대로 증명했다. 따라서 젊은 층과 진보적 백인 지지층을 등에 업은 이른바 ‘샌더스 돌풍’을 잠재우기에 나름대로 성공한 셈이다. 마찬가지로 주로 블루칼라 위주의 백인 노동자층에서 압도적 인기를 얻고 있는 트럼프도 결국 힐러리와의 본선 대결에선 흑인과 히스패닉, 소수 인종 등의 표를 얻지 못해 힐러리에게 패하고 말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도 ‘트럼프 쓰나미’가 덮치기 전까지의 예상에 그칠 공산이 커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투표율이 낮은 흑인층이나 히스패닉 등 다른 유색인종들보다도 투표 참여율이 월등히 높은 백인층이 ‘트럼프 쓰나미’에 휩쓸려 투표장을 찾게 된다면, 이마저도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2012년 대선에선 전체 유권자의 63%를 자치하는 백인 유권자 중 약 500만명 이상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트 롬니 당시 공화당 후보는 투표에 참여한 백인 유권자들의 59%의 지지를 받았는데, 4%만 더 획득해 63%의 지지만 받았어도 버락 오바마 현 대통령을 이길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오바마는 흑인과 소수 인종에게서 자신의 표를 다 받았지만, 롬니는 백인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트럼프 쓰나미’는 바로 이것을 바꾸고 있다. 예상을 뛰어넘는 여론조사에서의 선두가 실제 경선에서 그대로 현실화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동안 투표장을 찾지 않았던 백인 노동자층이 이제 줄지어 ‘트럼프’를 외치며 투표장으로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투표장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기득권에 얽매인 워싱턴 정치인들을 이제는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어쩌면 트럼프는 이미 고도의 계산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민자 멸시 발언이나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는 구상 등으로 이민자 계층을 대변하는 히스패닉계가 등을 돌리더라도 이를 지지하는 기존 보수 백인층만 투표장으로 나오게 한다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서 백인 투표율은 60%가 넘었지만, 히스패닉계는 간신히 40%를 넘기는 데 그쳤다. 유권자 비율이 월등히 높은 백인층이 5~10%만 더 투표에 참여해도 이를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더 무서운 계산이 깔려 있다. 힐러리에 반감을 표시하면서 이른바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는 샌더스를 지지하는 일부 진보적 백인 노동자층도 결국 힐러리 대 트럼프의 게임으로 본선이 진행된다면,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는 계산이다.

 

실제로 과거 민주당의 핵심 지지 세력이 백인 노동자 계층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현재 많은 백인 노동자들이 트럼프에게 열광하고 있는 현실에서 트럼프의 이 계산 또한 일리가 있어 보인다. 따라서 만약 힐러리와 트럼프가 본선에서 대결한다고 해도 힐러리가 쉽게 이길 것이라는 그동안의 상식과 예단은 이미 ‘트럼프 쓰나미’에 휩쓸려가고 있다.

 

3월19일 미국 애리조나에서 반(反) 트럼프 시위대가 트럼프 차량을 가로막으며 항의하고 있다. ⓒ AP 연합

 


트럼프 당선되면 공화당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때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트럼프 돌풍’은 이제 미국 정치권의 기반을 뒤흔드는 쓰나미로 변하고 있다. ‘미치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독불장군을 자임하는 트럼프의 등 뒤로 줄을 서는 정치인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현실은 ‘트럼프 쓰나미’가 가져온 대세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미 공화당 경선에 참여했던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와 벤 카슨이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고 ‘미니 슈퍼화요일’ 경선이 끝나면서 플로리다와 일리노이 주지사가 트럼프 지지를 선언하는 등 유력 정치인들이 트럼프 진영으로 몰리고 있다. 공화당 지도부는 이제 현실적으로 테드 크루즈 텍사스 상원의원을 트럼프에 대항할 유일한 대항마로 보고 단일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가 경선 지속을 밝히고 있어 이마저도 험난한 상황이다. 공화당 지도부는 일단 7월에 열리는 전당대회 전까지 트럼프가 대의원의 절반을 얻지 못할 경우, 이른바 ‘중재 전당대회’를 통해 후보자를 결정하겠다는 복안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현실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고 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트럼프 쓰나미’의 지금 같은 기세로는 트럼프가 전당대회 전에 대의원 절반 이상을 획득해 게임을 끝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록 트럼프가 대의원 절반을 획득하지 못하더라도 과연 중재 전당대회에서 선두를 차지한 트럼프를 제치고 다른 후보를 옹립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결국, 현실적으로 트럼프가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될 공산이 커졌다는 얘기다.

 

‘아웃사이더(outsider)’이자 ‘이단아’인 트럼프가 공화당의 대선 후보 문턱을 넘어가려고 하자 공화당 주류와 지도부는 정체성의 혼란과 함께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트럼프가 대선 후보가 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동안 공화당 주류와 지도부가 그만큼 국민은 고사하고 공화당 당원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다는 현실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특히, 미국은 개방적인 이민 정책과 무분별한 자유무역으로 인해 추락하고 있으며, 이는 워싱턴의 기존 정치인들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면서 지지를 확대하자, 공화당 주류는 더욱 좌불안석이 되고 있다.

 

어쩌면 문제의 핵심은 과연 트럼프를 대선 후보로 내세워 민주당의 힐러리를 이길 수 있느냐의 우려가 아니라, 만일 이겨서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기존 공화당이 계속 존재할 정체성이 남아 있을지에 대한 우려일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공화당 주류가 트럼프 대선 후보를 혹은 더 나아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공화당의 기존 정체성에 맞춰 통제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두려움이다. 하지만 아직은 트럼프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비호감이 60%를 넘을 정도로 ‘트럼프 쓰나미’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 대통령을 결정하는 유권자의 투표 참여율은 오바마 돌풍이 몰아친 2008년에는 그나마 59%에 달했지만, 2012년 투표율은 55%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트럼프 쓰나미’가 백인 유권자의 투표 참여율을 조금만 더 높인다면 ‘트럼프 대통령’도 현실화할 수 있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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