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리더십] 호한융합의 개방성으로 세계 제국 건설
  • 김경준 |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 (.)
  • 승인 2016.04.0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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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수도 장안, 세계 최대의 국제도시로 자리매김

2대 38년으로 단명한 수나라에 이어 등장한 당나라의 창업 군주이자 내정·외치의 기초를 확립한 수성 군주 당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599~649)은 부계가 한족, 모계가 선비족 혼혈인 배경을 개방적 통치철학으로 발전시켜 중국을 호한(胡漢)융합에 기반한 명실상부한 세계 제국으로 도약시켰다. 당시 이슬람 제국과 함께 세계 2대 강대국이었던 당나라 태종의 연호를 딴 ‘정관(貞觀)의 치(治)’는 전설의 요순시대에 버금가는 태평성대로 일컬어진다.

당태종 초상화

후한 멸망(220년) 후 370년간의 삼국시대와 5호16국,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한족과 북방 민족, 이른바 오랑캐는 자연히 섞이게 됐다. 특히 흉노 계열 유연(劉淵)의 전조(前趙) 건국(304년)에서 선비 계열 북위(北魏)의 통일(439년)에 이르는 130년의 5호16국 시대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이민족이 중국을 통치했던 시기다. 중국 외부의 적에서 내부의 지배 계층으로 변모한 이민족들은 통치체제 안정과 선진 문물 습득을 위한 적극적인 동화 정책을 펼쳐 이민족과 한족 혼혈의 귀족 계급이 등장했고 이세민의 가문도 이에 해당됐다. 당시 선비족의 실력자 독고신의 딸로 수문제 양견의 정비(正妃)인 독고 황후가 이세민의 부친 이연의 이모였다. 수양제 양충과 당고조 이연은 이종사촌이어서 수와 당은 혈연이 깊은 같은 집안이다.

당태종 집권, 이방원의 ‘왕자의 난’과 데자뷰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 실패에 대운하 등 대규모 토목공사의 후유증까지 겹쳐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혼란기에 명문 귀족 출신 장수인 이연이 반란을 일으켜 양제를 퇴위시키고 황태손 양유를 황제로 옹립했다가 양위를 받아 당나라를 건국(618년)했다. 이후 각지의 군벌들을 제압해 군사적으로 평정하는 과정에서 차남 이세민은 탁월한 군사적 재능으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장남 이건성이 황태자로 책봉되고, 4남 이원길과 연합해 이세민을 축출하려는 상황에서 후일 ‘현무문의 변’(626년)으로 불리는 반격을 결행해 두 사람을 살해하고 실권을 장악한 후 28세에 즉위한다. 이는 800년 후 조선 왕조 초기에 왕위를 둘러싸고 이방원이 두 차례에 걸쳐 일으킨 왕자의 난과 데자뷰(기시감)를 가지게 하는데 공교롭게도 당나라 이세민과 조선 이방원의 성씨가 같고 묘호(廟號)도 동일한 태종이다.

당나라는 수문제가 확립한 통치 구조와 수양제가 건설한 대운하라는 핵심 자산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재주는 수나라가 부리고 재미는 당나라가 본 셈이 됐다. 수나라에서 시작된 율령체제와 과거제를 확대 실시해 전문 관료에 기반한 중앙집권체제로 내치의 기반을 다졌고, 대외적으로는 잠재적 위협으로 남아 있던 북방의 돌궐을 복속시키고 서쪽의 탕구트와 고창국(高昌國)을 정복했다. 당의 영토가 대폭 확장되면서 영향력은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 일대의 오늘날 파키스탄까지 뻗어나갔다. B.C. 1세기 한무제 시절 개척됐으나 이후 중국의 혼란으로 쇠퇴했던 비단길이 활성화돼 당나라 수도 장안은 색목인(色目人)으로 불리던 서역인들로 넘쳐났고, 서방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세계 최대의 국제도시로 자리매김했다. 외래 문물에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다양한 종교가 소개되고 해외 유학생들도 대거 유입되면서 사상과 문화에서도 다양해지고 풍요로워졌다. 후대에 소설

<손오공>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현장법사(602~664)가 인도에서 대량의 불경을 가져와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당태종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 신라 출신 원측은 무측천(측천무후) 시대 대표적 승려로 손꼽혔고, <왕오천축국전>으로 유명한 혜초는 황제 현종의 요청으로 기우제를 주관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었다. 당나라 초기에 천태종, 화엄종, 법상종, 정토종에 달마의 선종에 이르는 다양한 종파가 출현하고 점차 종단으로 발전하면서 후일 동북아 지역 불교 확산의 전환점이 됐다. 그 밖에 서방에서 조로아스터교, 마니교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경교(景敎)까지 유입돼 활발하게 포교됐다. 승려를 비롯해 다양한 지식인이 모여드는 세계 제국 당나라의 면모는 외국인 유학생들만을 위한 과거인 빈공과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당나라 300년 동안에 주변국의 유학생 수천 명이 당나라에서 공부했고, 신라 출신 최치원과 최언위가 과거 합격으로 명성을 얻었다.

수나라가 건설했던 강남과 화북을 잇는 대운하는 당나라 번영의 핵심 하드웨어였다. 경제 산업 중심인 양자강 이남의 풍부한 물자를 정치·군사적 중심인 황하 이북 지역에서 활용하기 위한 수송로는 통일왕조의 근본적 숙제였다. 대운하는 진시황도 시도했지만 중단됐던 대역사(大役事)였다. 대운하를 완성한 수양제는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왕조가 멸망했을 정도다. 이를 물려받은 당나라는 남방에서의 보급로를 확보해 북방 돌궐 공략에 성공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방과의 교역로인 비단길을 안정적으로 확보함으로써 세계 제국 도약의 물적 기반을 확보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안시성 전투 그림. ⓒ 연합뉴스


당태종의 유일한 패배, 고구려 안시성 전투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었던 상승장군(常勝將軍) 당태종의 유일한 패배는 고구려에 당한 것이다. 서·남·북 방면의 ‘오랑캐’를 복속시키고 유일하게 동쪽의 고구려만 남아 있던 상황에서 공격에 나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수나라 참패를 교훈 삼아 철저히 준비하고 원정에 나서 초반에 승기를 잡았지만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이 지휘하는 고구려에 결정타를 맞고 패퇴했다(645년). 전쟁에서 얻은 병에 시달리다 4년 후인 649년 51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태자에게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도록 유언했다고 전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한고조 유방에게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고 육가가 간언하는 대목이 있다. 당태종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후 말에서 내려 천하를 다스렸던 걸출한 영웅’으로 유비의 덕성과 조조의 기량을 겸비했다는 평을 얻었다. 특히 정적이었던 맏형 이건성의 사람 위징을 중용하는 포용력을 보였다. 쓴소리를 골라서 했던 위징을 비롯한 신하들과의 문답이 오긍이 편찬한 <정관정요>에 전해지면서 후대의 귀감이 됐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어 의관을 단정히 할 수 있고, 과거 역사를 거울로 해 천하의 흥망과 왕조 교체의 원인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기의 장단점을 분명히 한다. 나는 세 종류 거울로 허물 범하기를 방지했으나, 지금 위징이 세상을 떠났으니, 거울 하나를 잃은 것이다.”(<정관정요> 임현(任賢)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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