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사극’을 바탕으로 비트는 게 정답
  • 하재근 | 대중문화 평론가 (.)
  • 승인 2016.04.0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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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룡이 나르샤>가 증명해 보인 ‘퓨전 사극’의 생존법

50회를 이어온 SBS 사극 <육룡이 나르샤>가 종영했다. 마지막 회 시청률 17.3%를 기록하며 방영 내내 동시간대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시작할 때의 화제성에 비하면, 다소 실망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육룡이 나르샤>는 김영현·박상연 콤비 작가의 작품으로 방영 전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이 두 작가는 <선덕여왕>으로 사극의 새 장을 열었고, <뿌리 깊은 나무>로 더욱 찬사를 받았다. <육룡이 나르샤>는 <뿌리 깊은 나무>의 프리퀄(전편의 이전 이야기를 다룬 속편) 성격이어서, <선덕여왕> <뿌리 깊은 나무>로부터 이어지는 퓨전 사극 3부작의 완결로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런 기대에 비하면 의무방어 정도만 한 느낌이라서 아쉬움이 크다.

SBS 사극 는 정통 사극에 상상력을 가미해 독창적인 세계관을 만들었다. 정통 사극의 스토리의 한계 속에 기존 이야기를 비틀며 열광을 이끌어냈다. ⓒ SBS

<육룡이 나르샤>가 기대를 모았던 또 다른 이유는 이 작품이 다룬 시대와 인물에 있다. 이 작품은 여말선초(麗末鮮初) 시기 조선을 건국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성계·정도전·이방원 등의 이야기였다. 여기에 가공의 인물인 이방지·분이·무휼까지 가세해 육룡의 진용을 꾸렸다. 이보다 앞서 방영한 KBS 정통 사극 <정도전>이 워낙 큰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김영현·박상연 작가가 그려내는 정도전의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에 관심이 모아졌다. 정도전 역에 김명민, 이방원 역에 유아인이 포진한 것도 화제성을 증폭시켰다. 정통 사극의 신화인 <불멸의 이순신>과 극장 흥행 사극인 <사도>의 주역이 동시에 육룡에 캐스팅된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육룡이 나르샤>

사람들은 김명민의 정도전이 주인공일 거라 생각했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점점 부각된 것은 유아인의 이방원이었다. 이 작품은 결국 순수했던 소년 이방원이 무자비한 권력자로 각성해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 드라마였다. 거기에 무협 액션의 성격이 가미돼 ‘고려제일검’ 길태미, ‘조선제일검’ 이방지, 2대 조선제일검 무휼, 실질적인 최고수 척사광 등이 검투를 벌였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밀본’이란 비밀 조직을 세종과 대결하도록 한 것처럼, 이번에는 ‘무명’이란 비밀 조직을 내세웠다.

육룡이 한 명씩 소개되던 도입부만 해도 또다시 희대의 걸작이 탄생하는 것 아니냐는 찬사가 나왔다. 그러나 극의 밀도감이 기대보다 떨어졌고, <뿌리 깊은 나무>의 밀본에 비해 무명은 위력이 약했다. <선덕여왕>과 <뿌리 깊은 나무>에서 시청자들을 열광시켰던 보스들 간의 이념 토론, 즉 미실과 덕만의 권력철학 토론, 세종과 밀본 수장의 토론에 이어 이번엔 정도전과 무명 수장이 토론에 임했지만, 이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 전의 토론 설정은 정말 그런 토론이 가능했을 수도 있겠다는 개연성의 바탕 위에 현대인까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녹여냈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작위적인 토론이 이어져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다.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귀족 권력을 주장하고, <뿌리 깊은 나무>에서 밀본 수장이 사대부 권력을 주장하는 것까지는 공감이 가더라도, 이 드라마에서 무명 수장이 마치 현대 시장주의 경제학자처럼 개인의 욕망을 찬미하는 것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문벌귀족사회를 지탱하는 조직이 너무 생뚱맞은 논리를 폈던 것이다. 그리하여 <뿌리 깊은 나무>의 성취를 이어가지 못했다는 느낌을 줬다.

그러나 이방원이 본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상상을 가미해 독창적으로 묘사한 것이 인기를 끌었고, 특히 마치 게임처럼 여러 명의 영웅이 각각의 캐릭터를 가지고 각축을 벌이는 구도가 누리꾼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최고의 검객 여럿이 난무해 캐릭터 간의 전투력 레벨 차이를 추측하는 유희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방지와 척사광의 액션은 기대에 못 미쳤으나, 무휼이 한국 드라마에서 기억할 만한 유혈낭자 액션 신을 선보여 열광을 이끌어냈다.

퓨전사극만으로는 사극계 지탱할 수 없어

이렇게 기존 역사에 새로운 상상을 덧붙인 사극을 우리는 퓨전 사극이라고 부른다. <조선왕조실록>에 바탕을 둔 정통 사극이 득세하던 시기를 지나, <허준> 때부터 사극에 새 바람이 불기 시작해 2003년 <다모>에 이르러 퓨전 사극 전성기가 열렸다. 그 후 <일지매> <성균관 스캔들> <추노> <공주의 남자>

<뿌리 깊은 나무> <해를 품은 달> <아랑사또전> <기황후> 등이 퓨전 사극 신화를 이어갔다.

지나치게 퓨전 사극이 범람하자 사극에서 역사가 사라져버렸다는 한탄이 쏟아졌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오랜만에 등장한 정통 사극에 폭발적인 호응이 쏟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대세를 바꾸긴 어려웠다. 그 후 <징비록>

<장영실> 등이 기대에 못 미쳤던 이유다. 그런데 힘을 잃기는 퓨전 사극도 마찬가지였다. <야경꾼일지> <화정> <밤을 걷는 선비> <조선총잡이> 등이 큰 호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젠 기존 사극에 새로운 상상을 더했다는 것만으론 시청자가 반응하지 않는다. 퓨전의 신기함은 사라졌다.

<육룡이 나르샤>는 만듦새와 스타일, 내용이 받쳐준다면 퓨전 사극이 여전히 사랑받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비록 애초의 기대에 다소 못 미친 완성도였지만, 그간의 퓨전 사극들을 확실히 뛰어넘었고 여기에 시청자는 반응했다. 어차피 정통 사극이 담을 수 있는 스토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제작업계는 당연히 사극에 새로운 상상을 더하거나 기존 이야기를 비트는 쪽으로 나가게 된다. 퓨전 사극에 등장하는 화려하고 현대적인 요소는 젊은 여성 시청자들을 끌어들인다. 아저씨 위주로 전개되는 정통 정치 사극에 비해 퓨전 사극에서는 아이돌부터 중년 배우까지 폭넓게 활약하면서 시청자층을 넓힌다. OST 수익까지 기대할 수 있어서 제작업계는 더욱 퓨전 사극을 선호한다. 퓨전 사극이 대세일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그러나 퓨전 사극만으로는 사극계를 지탱할 수 없다. 정통이 살아 있어야 비트는 것의 위력이 커지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통 사극과 퓨전 사극은 사극계를 지탱하는 두 개의 축으로 발전해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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