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머런 총리, 말장난하다 사임 위기에 몰리다
  • 권석하│영국 칼럼니스트 (.)
  • 승인 2016.04.28 18:02
  • 호수 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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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부는 ‘파나마 페이퍼스’ 후폭풍

‘유탄(流彈)이 역사를 바꾼다’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 나는 때도 없는 것 같다. 파나마 페이퍼스(Panama Papers)가 일으킨 영국 조야(朝野)의 소동을 보고 든 생각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지금 기가 막힐 날벼락을 맞고 있다. 하필이면 역사상 최고의 데이터 유출의 출처가 바로 6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조세회피처 신탁회사를 관리하던 로펌 ‘모색 폰세카’이기 때문이다. 캐머런 총리는 요즘 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정치인이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옥스퍼드 대학까지 나와 35세에 하원의원이 됐다. 의원이 된 지 4년 만에 창당 171년 전통의 보수당 당수가 됐다. 그리고는 당수가 된 지 5년 만에 노동당의 13년 장기 집권을 깨고 영국의 총리 자리까지 올랐다. 39세 때의 일이다. 탄탄대로를 걷던 그의 인생이 느닷없이 터진 파나마 페이퍼스 사건에 휘말려 재선한 지 1년도 채 안 돼 사임 위기에 처해 있다.

불운은 겹쳐서 온다는데(禍不單行) 이번 사건은 캐머런 총리가 정치적으로 곤혹스러운 시기에 터져 나왔다. 영국은 EU(유럽연합)를 탈퇴하느냐 마느냐 하는 브렉시트(Brexit) 국민투표를 6월23일 실시한다. 현재 캐머런 내각의 장관 22명 중 5명이 공개적으로 EU 탈퇴를 지지하고 있다. 여기에 자신의 오른팔이자 전직 보수당 당수였던 이안 덩컨 스미스 노동연금부 장관이 장애자 복지 삭감에 반대하면서 사임해 체면이 말이 아니게 구겨졌다. 거기다가 타타 철강그룹이 영국에서 전면 철수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1만5000명이 실업 위기에 직면하고 영국 철강산업 전체가 붕괴될 위기에 처해 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 PPA 연합

영국 여론 “절반의 진실과 홍보성 말장난”

사실 캐머런 총리는 파나마 페이퍼스와 관련해 간단하게 처리될 수도 있었던 문제를 임기응변식으로 쉽게 털고 가려다가 일을 망쳤다. 4월4일 공개된 파나마 페이퍼스에 고인이 된 캐머런의 아버지 이름이 등장해서 기자들이 총리와의 연관 관계를 묻는 질문에 ‘개인사(praivacy)’라는 한마디로 묵살하고 말았는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꼬인 것이다. 의혹이 일파만파 번져가자 총리실은 다음 날인 4월5일 “나는 주식이 없고 역외권 신탁도 없고 역외권 투자도 없다”는 조금 더 진전된 발표를 한다.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다시 4월6일 “총리와 총리 부인과 자녀들은 역외권 투자나 신탁이 없고 장래에도 없을 것이다”라는 성명이 나왔다. 그런데 사실 여기까지가 영국 여론이 분노하는 ‘절반의 진실과 홍보성 말장난(half-truth and spin)’이다. 발표문을 조심스럽게 보면 모든 표현이 현재형이다. 말의 뜻은 현재는 ‘주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식이다. 나중에라도 말꼬리를 안 잡히려고 노력하면서 가능하면 이 정도로 넘어가줬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영국 언론의 표현대로 ‘말장난(words play)’이었다.

악화되는 여론에 견디다 못한 총리실은 4월7일 드디어 과거의 진실을 사실대로 밝힌다. 자신의 아버지의 조세회피지 신탁회사를 통해 1997년 1만2497파운드의 신탁주식을 사서 가지고 있다가 총리가 되기 4개월 전인 2010년 1월 3만1500파운드에 팔아 소득 신고를 하고 세금을 냈다고 발표했다.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탈세를 한 것도 아닌데 처음에 제대로 해명했으면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 결국 영국 사회는 총리의 말장난과 솔직하지 못함에 분노했고 야당 일부에서 사임을 요구하고 나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같은 날인 7일 캐머런은 보수당 당원 컨퍼런스에서 열렬 지지자들을 상대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절대 감정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 영국 정치 지도자답지 않게 아주 감성적인 연설을 통해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했다. 한 언론은 ‘치욕적인 사과’를 했다고 표현했다.

이런 호소에도 불구하고 벌집을 쑤신 듯 총리의 소득세 신고를 공개하라는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실 영국 사회에서 제일 금기 사항이 바로 타인의 소득에 대해 질문하는 일이다. 아무리 공인이라도 소득에 대한 사항은 사태 첫날 젊은 보좌관들이 결정해서 대변인이 ‘개인사’라고 발표한 그대로다. 그래서 현직 총리라고 해도 개인 소득을 공개한 적은 영국 역사상 한 번도 없다.

4월9일은 마침 런던 시내에 집회·시위가 허용되는 토요일이었다. 수천 명이 총리 관저로 돼지 가면을 쓰고 몰려가서 사임을 요구했다. 결국 압력에 견디다 못해 캐머런은 드디어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총리가 자신의 소득 신고 사항을 공개하기로 약속한다. 프라이버시를 죽음보다 더 중요시한다는 영국에서 천지개벽할 일이 생긴 셈이다. 결국 다음  날인 4월10일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캐머런은 총리가 되던 해부터 지난해까지 6년간 소득세 신고 내역을 공개한다.

파나마 페이퍼스 사건과 관련해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영국인들의 시위가 4월9일 런던에서 열리고 있다. ⓒ EPA 연합


캐머런, 총리 재임 기간 소득세 신고 내역 공개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덮일 수가 없다. 소득 신고서류에서 의문이 더 터져 나왔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현금 유산 30만 파운드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20만 파운드도 문제가 됐다. 현직 총리 아버지가 조세회피 지역에 신탁회사를 차려 지난 30년간 영국 정부에 세금 한 푼 안 내고 사업을 했다는 것부터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던 차에, 아들은 부모로부터 50만 파운드(8억원)를 물려받으면서 40%에 해당하는 상속세를 한 푼도 안 낸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물론 탈세를 한 것은 아니다.

캐머런 입장에선 공개할 것은 다 공개했으니 이제 넘어갔으면 하지만 야당에서는 이제 공개되지 않은 2010년 전의 것도 보자고 요구한다. 사실 캐머런 입장에서 보면 조금 억울하다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이 한 일과 아버지가 한 일에는 비합법적인 일이 전혀 없고 당시에는 비도덕적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수 애국주의자의 상징인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마저도 사후 유서에서 밝혀지지만 자신이 살던 지금 시가 3500만 파운드의 런던 시내 최고급 주택가 집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의 회사에 등록해놓아 자식들이 상속세를 한 푼도 안 내게 한 바 있다. 대처뿐만 아니라 역대 총리들 모두 역외 지역에 신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것이 당시는 관례였고 기득권층 누구나 다 그렇게 절세 혹은 탈세를 했다. 결국 캐머런 총리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관례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희생양이 된 셈이다.

최근엔 신문에서 파나마 페이퍼스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90세 생일을 맞아 증손자·증손녀와 같이 찍은 사진이 지면을 뒤덮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사건이 잊힌 것은 아니다. 역사상 최대의 데이터 유출이라는 판도라 상자가 열렸는데 끈질기기로 유명한 영국인이 이것으로 잊을 리 없다. 영국 정부는 국세청·국가범죄수사처·중범죄청·금융감독원의 합동조사팀을 만들어 조세회피 지역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한다. 과거의 예로 보아 몇 년이 걸릴지 몰라도 사건의 바닥까지 반드시 파헤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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