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공주’의 ‘오빠 띄우기’ 역풍 맞다
  • 이영종│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기자 ()
  • 승인 2016.05.18 11:33
  • 호수 1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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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이 주도한 당 대회 초청 외신들 ‘北 비판 보도’ 쏟아내

북한 노동당 7차대회의 진행 추이에 대북 관측통과 언론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5월9일 오후. ‘평양을 방문해 취재 활동을 벌이던 BBC 기자가 북한에 구금됐다 추방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 대회 취재차 방북 체류하던 윌 리플리 CNN 기자는 자신의 트위터에 ‘북한 당국이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 관련 불경스러운(disrespectful)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루퍼트 윙필드-헤이스 기자를 구금했다가 추방 조치해 지금 공항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라고 전했다.

 

억류 및 추방 소식은 당 대회 취재차 방북한 100여 명의 외신기자들이 북한 당국의 과도한 통제에 분통을 터뜨리던 상황에서 흘러나왔다. 북한 당국은 당 대회 개막날인 5월6일 회의장인 평양 4·25문화회관에 외신들의 출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200m 이상 떨어진 곳에 통제선을 치고 그 밖에 기자들을 머무르게 했다. 김정은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는 상황에 외신의 불만이 쏟아져 나왔고, 일부 내용은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외부에 전해졌다.

 

서울의 대북 부처 당국자는 “결국 터질 일이 불거지고 만 것”이라고 평가했다.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대관식 현장을 보여주려 전례 없이 많은 해외 언론 취재진을 불러들였지만 폐쇄적인 체제의 한계 때문에 일이 꼬여버린 것이란 설명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태의 중심에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이 자리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김정은의 핵심 권력으로 부상했다. 사진은 주석단에서 김정은의 꽃다발을 직접 챙겨주는 김여정(붉은 원)의 모습. ⓒ 연합뉴스

 

김여정, 당 대회 보도 통제 총지휘

 

우리 정보 당국이 파악한 데 따르면, 김여정은 노동당의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맡고 있다. 북한의 주민들에 대한 김정은 우상화 선전이나 체제 관련 대내외 보도를 통제·조정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핵심 부서다. 차관급인 부부장 자리에 앉아 있지만 김여정의 기세를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백두혈통’인 데다, 오빠 김정은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사실상의 최고 실세라는 점에서다. 2011년 12월 김정일 장례식 때 눈물을 짓던 과거의 김여정이 아니란 얘기다.

 

이번 7차 당 대회에서 김정은의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각인시키는 작업을 총지휘한 사람도 김여정으로 파악됐다고 한다. 한 당국자는 “김일성 시절부터 선전선동의 귀재로 불려온 김기남 노동당 정무국 부위원장(전 당비서)이 하던 방식과는 상당히 달라진 선전선동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은 과거 최고지도자의 이미지 연출이나 선전선동 작업을 펼칠 경우 극도로 통제되고 절제된 패턴을 보였다. 당국자는 “1980년 노동당 6차대회의 경우 북한 체제에 우호적인 우방이나 비동맹 언론을 주로 불렀다”며 “서방 외국 언론은 일본 마이니치신문 정도를 초청하는 등 극도로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번엔 미국 CNN이나 영국 BBC 외에 일본과 서방 언론 등 100여 명의 외신을 불러들이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김여정이 과거 오빠 김정은과 함께 스위스 베른국제학교에서 수년간 유학하는 등 서구 문물을 접하면서 이들 언론에 대한 인지도가 있었을 것이란 진단이다. 또 평양에서도 김정은 관련 해외 언론 보도를 꼼꼼히 챙겼을 김여정이 당 대회를 계기로 오빠를 국제사회에 띄우기 위한 공격적인 연출 작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여정의 이런 구상은 역풍을 맞았다. 당 대회 개막 전부터 국제평화재단(IPF) 관계자 및 노벨상 수상자 3명과 함께 평양에서 취재활동을 하던 BBC 윙필드-헤이스 기자는 잇단 보도를 통해 북한 체제를 비판하고 허구성을 폭로했다. 평양의 대표적 놀이공원을 방문해서는 유창한 영어로 김정은 체제를 찬양하던 북한 청년에게 추가 질문공세를 퍼부어 결국 줄행랑치게 했다. 북한 당국의 연출에 의해 준비된 답을 쏟아냈지만 결국 들통나버린 것이다.

 

또 북한이 대표단을 안내한 병원에선 의사나 환자가 연출을 위해 동원된 가짜라는 걸 보도했다. 노동당의 선전선동 파트는 매우 당혹스러운 입장에 처했다. ‘김정은 띄우기’라는 본래 의도와 달리 북한 체제의 이중성만 드러내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북한 선전선동부의 패착은 당 대회 외신 취재뿐이 아니다. 

 

최근 개봉돼 관심을 끌고 있는 러시아 출신 비탈리 만스키 감독의 영화 <태양 아래>도 북한 당국으로선 매우 곤혹스러운 사안이다. 북한 당국의 지원까지 받아 김일성의 생일 준비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던 감독이 북한 체제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쪽으로 제작 방향을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촬영 당시 여덟 살 여자 주인공 진미의 김정은 체제 찬양 장면을 연출하려 억지 눈물을 짓게 만든다는 등의 과정을 몰래 담아낸 것이다. 선전선동부는 감독이 이런 필름을 밀반출하는 걸 막지 못했고, 결국 자충수를 둔 꼴이 됐다.

 

 

‘불경한 보도’를 이유로 추방당한 영국 BBC방송의 루퍼트 윙필드-헤이스 기자가 5월9일 중국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다.ⓒ AP 연합

 

BBC 취재진 구금 등으로 후유증 이어질 듯

 

후유증은 상당기간 이어질 기세다. 당 대회 폐막 이후 평양을 떠난 외신기자들은 SNS 등에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애나 파이필드 특파원은 트위터에서 ‘당 대회 첫날인 5월6일 관련 소식을 한국의 통신사인 연합뉴스를 통해 봐야 했다’고 토로했다. ‘북한 당국의 선전선동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현장을 억지로 봐야 했다’는 것이다. 미국 LA타임스 베이징지국의 줄리 마키넨 기자는 “북한 측 감시원들이 외신 기자에게 ‘질문이 너무 많다’며 문제 삼기도 했다”고 비판했다. 국제 언론단체와 인권단체들이 북한 당국의 취재 통제와 방해에 항의하는 입장을 내는 등 파문이 번지고 있다. 

 

물론 이런 사태에도 불구하고 김여정의 위상엔 변함이 없을 것이란 게 우리 정부 당국과 북한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그만큼 김정은의 신임이 확고하단 얘기다. 대북 정보 관계자는 “평양 당 간부들 사이에 ‘만사여통’이란 말이 유행한다는 첩보도 있다”며 “모든 일이 여정 동지를 통해야 해결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다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김여정 방식의 선전선동 전략에는 다소 수정이 가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서방언론의 선별 초청을 통한 북한 체제 선전이나 유력 언론과의 김정은 인터뷰 등이 추진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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