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리더십] 유럽이 세계 중심으로 부상하는 계기 만든 칼리프
  •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5.20 17:20
  • 호수 1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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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룬 알 라시드, 개방과 포용정책으로 이슬람제국 전성기 구가

사라센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뤘다고 평가 받는 하룬 알 라시드는 어린 시절 동화책으로 접하게 되는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千一夜話))의 등장인물로도 친숙하다. 유대인의 토착 신앙으로 출발했던 기독교가 로마의 개방성과 보편성을 흡수해 세계 종교로 발전한 것처럼, 이슬람도 아라비아 사막의 신흥 신앙으로 출발해 이슬람제국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면서 오늘날 15억 인구의 종교로 발전했다. 

 

하룬 알 라시드는 정치·종교적 통합과 개방을 바탕으로 이슬람제국 문화·예술·과학의 전성기를 열었고, 이슬람 세계의 문명을 중세 유럽에 전해주면서 근대 이후 유럽이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영국에서 메소포타미아에 걸쳐 있던 로마의 권역은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과 동로마제국의 후신 비잔틴제국의 동유럽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정치적 분리는 종교적으로도 연결돼, 기독교는 프랑크와 밀접한 관계를 구축한 로마의 가톨릭과 동로마제국 황제가 수장인 정교회로 분화됐다. 후일 기독교·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로 성장하는 이슬람교가 이 시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됐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고대 문명이 시작된 후, 그리스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헬레니즘 세계가 형성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이 로마로 편입되는 과정에서도 아라비아는 여전히 변방이었다. 사막지대로 농경이 어려워 인구밀도가 낮아 정복할 가치가 적어서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소규모 씨족들이 산재돼 생활하는 원시적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로마제국이 등장하고 아라비아 반도가 동방무역의 통로로 활용되면서 무역중개 기능이 발달하고, 선진 농경기술의 전파로 오아시스 지역을 중심으로 소규모 농업이 시작되면서 문명시대의 물질적 기반을 확보했다.

 

 

 

이슬람 정통성 명분으로 아바스 왕조 설립

 

서로마의 패망과 비잔틴의 위축이 아라비아 지역에 가져온 일종의 정치적 공백상태는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의 힘을 강화시켰고, 오아시스 도시들이 본격적으로 발달하는 계기가 됐다. 사막 토착 신앙에서 성스러운 지역으로 간주됐던 메카도 이 시기에 도시로 발전했다. 교역과 농경의 확대로 도시가 생겨날 정도의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통합과 발전은 지지부진했다. 부유한 상인과 전통 부족장들이 정치와 행정, 사법을 독점하고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 하는 낙후된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고 사회적 갈등은 심화되던 이 시기에 무함마드라는 인물이 나타났다. 

 

610년 40세에 동굴에서 명상하면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그는 당시 다신교의 성지이자 정치적 중심지인 메카에서 유일신 알라의 말씀을 전파하며 ‘신의 명령에 대한 복종’을 뜻하는 이슬람의 원리에 따라 살면서 사회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다가, 메카의 토착 세력과의 정치투쟁에서 밀려나 622년에 메디나로 추방됐다.

 

메디나에서 그는 여러 씨족을 묶은 움마(Umma)라는 종교 공동체를 기본단위로 사회를 조직하는 강력한 제정일치 체제를 만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630년 메카로 입성해 아라비아 지역을 평정했다. 632년 무함마드의 사후 추대 방식으로 선출돼 칼리프로 불린 제정일치의 군주인 후계자들은 적극적인 대외확장에 나서서 650년까지 불과 20년 만에 동쪽의 페르시아에서 서쪽의 이집트와 리비아까지 정복했다. 

 

외형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내분을 야기하기 마련. 제정일치에서 추대 형식으로 선출되는 칼리프의 속성은 소규모 공동체 사회에 적합했으나, 대형 제국에는 걸맞지 않았다. 실제 3대와 4대 칼리프가 연이어 암살되는 혼란이 발생했다. 이 와중에 시리아 총독 무아위아가 칼리프가 되면서 세습제의 90년 우마이야조(661~750)가 시작됐고, 이 시기에 북쪽의 아프가니스칸, 서쪽의 모로코에 이어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에스파냐까지 정복해 3개 대륙에 걸친 판도를 완성했다.

 

8세기 대외확장이 일단락되자 다시 내분이 심화되는 혼란기에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의 가계인 아바스 가문이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실권을 잡았다. 종교적 정통성을 명분으로 출발한 400년의 아바스 왕조(750~1258년)는 지역 종교의 소규모 공동체로 출발해 거대 영토국가로 성장한 판도에 어울리는 개방적 정책과 제도를 실시해 이슬람제국을 성립시켰다. 피정복지에서 아라비아인의 특권과 원주민에 대한 차별을 폐지하고, 종교적 관용정책을 채택해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물론 제정일치 체제의 특성상 포교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나, 개종자에게 세금혜택을 주는 정도의 유인책 이외에는 이교도의 거주와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했다.

 

앞선 우마이야 왕조가 사막의 왕이라는 개념에 머물러 있었다면, 아바스 왕조는 종교적 보편성의 범위를 확장해 다민족 다문화를 포용하는 국제질서의 중심이었고, 786년 아바스 왕조의 5대 칼리프에 등극한 하룬 알 라시드(763~809)는 관용과 개방정책을 시행해 이슬람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는 신분과 인종의 차별 없이 이민족과 이교도를 관직과 학술계에 진출시킨 개방정책으로 사회 다방면에 걸쳐 역동성과 다양성을 확충해 이슬람제국의 문화가 지역과 종교의 협소함에서 벗어나 세계문화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화학·천문학·물리학·수학 등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자연과학을 흡수하고 발전시킨 성과가 서유럽에 전해지면서 르네상스의 바탕이 됐다.

 

중국의 제지 기술 유럽으로 전파시켜

 

아바스 왕조 초기에 당시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으나 세계사에 큰 영향을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 외 지역에서는 최초의 제지공장이 세워지고, 정보의 공식 문서가 파피루스에서 종이로 바뀐 것이다. 이슬람제국이 팽창하면서 동쪽의 당나라와 여러 차례의 전투가 벌어지던 와중에 751년 고구려 출신 장군 고선지의 군대와 맞붙은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제지 기술자를 통해 종이 제조 기술이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다.

 

종이는 후한 시대의 환관 채륜(105년경)이 발명해 중국과 인근 국가에선 오랫동안 사용되고 있었다. 하룬 알 라시드의 치세 기간인 794년, 바그다드에 제지공장을 세우고 종이를 대량생산하게 되면서 정부의 공식 문서가 파피루스와 양피지에서 종이로 대체됐다. 그리고 종이는 이집트·북아프리카·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됐다. 유럽에 전해진 종이는 후일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과 결합해 세계사를 바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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