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자신의 집권으로 3김 시대 종언 기대했던 YS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5.29 21:46
  • 호수 138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DJ는 거짓말쟁이...정계은퇴 선언에 반신반의

2006년 10월10일 낮, 청와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盧統)이 4조5800억원을 북한에 퍼줘 핵을 만들었다”면서 두 사람은 국민 앞에 사죄하라고 몰아세웠다. 북한이 풍계리에서 핵실험을 성공리에 마쳤다고 발표한 바로 다음 날이다. 


盧統이 전직 대통령들의 고견을 듣기 위해 마련한 이날 오찬 간담회는 YS의 독무대였다(최규하·노태우 대통령은 건강상 이유로 불참). 전두환 전 대통령(全統)이 ‘초대해줘 고맙다’며 의례적 인사말을 건넬 때 盧統 왼편에 앉았던 YS는 자신의 재임 시절을 회고하는 듯 혼잣말을 되뇌었다. 그러나 이는 작심 발언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간담회가 시작되자마자 YS의 열변이 터져 나왔다. “대통령이 물러나야 할 엄청난 사안” “북한을 감싸기만 한 노 대통령은 북한 변호사냐”는 등 YS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1시간20여 분에 걸친 간담회는 YS가 좌파 정부의 대북 정책 실패를 규탄하는 자리가 됐다. 그러나 이 거친 발언에도 盧統도, DJ도 반박을 못했다. 북한을 두둔하고 미국의 패권주의를 꼬집던 盧統이나, 대통령 재임 시절 북한을 다녀온 직후(2001년) “북은 핵을 개발한 적도 없고, 개발할 능력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대북 지원금이 핵개발로 악용된다는 얘기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다. 북이 핵을 개발했다거나 개발하고 있다는 거짓 유언비어를 퍼뜨리지 마라, (만약 북에 핵이 개발된다면)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던 DJ로서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DJ는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관계는 발전해왔다”면서 나름의 논리를 전개했지만 YS의 호통에 잦아들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한 적도 없다’ 운운했던 본인의 말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DJ는 YS의 무차별 비판에 충격을 받았는지 일순간 정신을 잃은 듯 몸을 가누지 못해 의료진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가장 싫어하는 이(DJ)의 대통령 당선을 지켜보며 자괴해야 했던 YS로선 DJ를 휘어잡을 확실한 계기를 잡은 셈이었다. 2001년 DJ의 노벨평화상 소식을 들으며 “독재자에게 노벨상은 어불성설”이라며 악담으로 분풀이를 해야 했던 YS다. 그런데 북한의 핵개발 성공이라는 가공할 위협을 맞이한 국가적 위기감과 국민적 분개심이 최고조에 이른 만큼 YS에게는 최고의 호기이기도 했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YS의 발언 수위는 아무리 전직 대통령임을 감안하더라도 과하게 보인다. 그러나 저간의 발언들을 상기하면 盧統으로선 할 말이 없게 돼 있다. “북한 핵문제는 궁극적으로는 평화적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북한도 체제 안정과 경제적 지원을 보장하면 핵무기를 포기할 의사를 확실히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2003년 1월” “북한 핵 주장 일리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2004년 11월, LA 방문 때” “북한은 체제 안전을 보장받으면 핵개발을 포기할 것이다. 누구를 공격하거나 테러를 위해 핵개발을 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2004년 11월 15일 남미 순방 중” “(북한의 핵실험 가능성 질문에)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 중이다-2006년 9월, MBC 토론” 등등).

하여튼 사적 감정과 상관없이 이날 청와대 발언은 ‘역시 YS’라는 평가를 낳게 했다. 국민의 걱정과 참았던 분노를 적절하게 대변해줬기 때문이다. IMF로 쓸쓸히 청와대를 떠나야 했던 YS의 진가를 알리는 계기도 됐다.

제15대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이틀째인 1997년 12월20일, 김영삼 대통령이 ‘동지이자 적’인 김대중 제15대 대통령 당선자와 청와대에서 마주했다.

 

북핵 가능케 한 DJ-노무현 면전서 맹박

사실 ‘YS를 YS답게’ 해준 것은 그가 가장 경계하고 싫어했던 제5·6·7·8·9대 박정희 대통령(PP)과 제15대 대통령 DJ다. YS는 이들과 끊임없는 투쟁과 경쟁을 통해 자신을 담금질했고, 1992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PP·DJ가 없었다면 YS 대통령은 없을지 모른다는 역설마저 나올 만큼 이들은 YS에게 결정적 자극제였다. 역사에 가정(假定)은 부질없음에도 가정이 성립하는 사연은 그럴 정도로 PP·DJ가 YS에게는 의미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지만 PP와 DJ를 같은 선상에 두고 운위하는 것은 의아스러운데, 그러나 양쪽 속내를 살피면 수긍이 간다.

“야당 대변인·원내총무·총재로서 각광 받는 정치인 YS를 짓누른 것은 18년에 걸친 PP의 군사정부였다. 따라서 YS가 PP를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게 없다. 반면 DJ와는 연합해 PP에 대항했다. PP를 이은 全統 7년 동안에도 힘을 합쳐 저항했다. 같은 간판 아래서 대정부 투쟁을 전개했다. YS의 강경 투쟁이 DJ의 목숨을 건지기도 했고, DJ의 적극적 지원으로 YS가 야당 주도권을 장악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는 ‘동지적(同志的) 관계’다.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다투었을 망정 YS의 PP 및 全統과 대결이 목숨을 건 투쟁이라면, DJ와의 대결은 경쟁이라고 해야 한다. 형식상으론 그렇다. 그렇다면 1980년대 이전 YS의 ‘주적(主敵)’은 PP요, 1980년대 중후반까지의 주적은 全統이라고 해야 맞는다. 그러나 이는 겉만 봤을 때 얘기다.” 

비단 박관용 비서실장의 평가 등을 따질 필요 없이 한국정치사를 아는 이들의 한결같은 진단이다. “서로 상대만 없었으면 자신이 벌써 대통령이 됐으리라 생각했던 만큼 이런 ‘주적론’이 과히 틀리지 않다는 것”이다. YS의 주적은 DJ이고, DJ의 주적은 YS라는 단정 아닌 단정은 그래서다.

YS와 DJ는 동지?…‘주적(主敵)’이 적확할 듯

YS에게 DJ는 ‘거짓말쟁이’요, 못 믿을 귀찮은 존재였다. YS가 자신을 거짓말쟁이라고 몰아붙이면 DJ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는데, 자신의 구석구석을 꿰고 있는 YS를 자극해봤자 좋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인지 YS의 ‘거짓말쟁이’에 대한 DJ의 대응은 구차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다른 사람한테 다 지더라도 DJ에게 지는 것은 못 참는 YS였다. 단순히 라이벌 의식이 아니라 거짓말쟁이에게 진다는 게 싫다고 했다. 사실 26세에 국회의원이 돼 승승장구하던 YS에게 DJ는 ‘시골뜨기’였을 따름이다. 그런 DJ에게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역전패를 당했으니 속이 편할 리 없었다. YS는 DJ가 한밤중 대의원들을 개별 포섭한 것을 반칙으로 규정했다. 이후 1987년 대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했다가 하루아침에 뒤집고, 1992년 대선에서 낙선하자 정계 은퇴한다고 해놓고는 복귀하고…. 그랬으니 DJ는 믿지 못할 사람이요, 거짓말쟁이였다.”

“14대 대선에서 190만표 차로 패배한 DJ가 정계 은퇴 선언을 한다는 보고를 받은 YS는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그러나 ‘YS는 YS’였다. 내다보는 눈이 달랐다. ‘잘보레이. 김대중이는 그냥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데이~조용한 시민생활로 돌아가기는 무슨~’. ‘DJ 역시 DJ’였다. YS의 예언처럼 DJ는 영국으로 떠난 지 6개월 만에 귀국, 정계 복귀 수순을 밟는다.”

1987년 야권 대통령 후보 단일화가 최대 이슈였던 즈음 DJ가 YS의 통일민주당을 뛰쳐나가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했을 때 YS 측 ‘후단(후보단일화)’은 DJ를 ‘거짓말쟁이’, DJ 쪽 ‘비지(비판적 지지)’는 YS를 ‘바람둥이’라고 매도했다. ‘거짓말쟁이와 바람둥이’를 저울질하면 어느 쪽이 더 손해일 지는 모르나, 여하튼 엊그제까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간판 아래 서로를 껴안던 모습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들의 ‘유식한’ 표현으로 전략적 제휴를 했을 따름이었던 게 확실했다.

어쨌거나 반독재 투쟁을 함께 하면서 민주화를 일궈낸 두 사람의 공(功)은 역사에 오래 기록될 것이다. 물론 과(過)도 기록된다. 이들이 낳은 많은 것들 가운데는 한국 정치의 병폐로 기억될 부분들도 상당하다. 지역 갈등, 보혁(保革) 대결 등이 그것들이다. 여기에는 YS나 DJ의 상이한 정치 기반이나 성향과 더불어 상반된 성격·스타일도 한몫했는데 YS가 DJ를 ‘쉬운 것도 어렵게 말하고 풀어가는 정치꾼’ 혹은 ‘대통령병에 걸린 대중 선동가’로, DJ가 YS를 가리켜 ‘겉멋이나 부리는 부잣집 철부지’로 비하해서가 아니다. 이런 욕설들은 상대를 끌어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된 것이지만 곱씹으면 그 가운데 YS나 DJ의 진면목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참모들의 면면을 보면 YS와 DJ의 용병술(用兵術)이 그대로 나타난다. 용병에는 용인(用人)과 그가 취한 정책 방향도 엿보인다. YS의 ‘좌(左)동영 우(右)형우’를 비롯, 김덕룡·이원종·서석재와 DJ의 권노갑·박지원·문동환·이영숙 등은 그 자체가 각 진영의 성격을 보여주는 징표다. YS진영이 여일(如一)하다면 DJ 진영에는 변화폭이 크다. 물론 YS도 집권 이후 박관용·황병태 등 브레인을 대거 이식했다지만 DJ 쪽과는 비교가 안 된다. 

DJ 진영에 재야(在野)세력이 폭넓게 포진한 게 지지기반 확충을 위해 운동권을 대거 흡수한 결과라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굴러온 돌’이라고 할 수 있는 박지원(현 국민의당 원내대표)은 한화갑·김경재 등 과거 핵심들을 중심에서 밀어냈다. DJ가 뒤에 있었기에 가능함은 물론이다. DJ를 위해 온갖 궂은일, 험한 과제를 마다 않던 김상현 전 의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DJ의 아호 후광(後廣)을 본떠 자신을 후농(後農)으로 이름하는 김 전 의원은 “DJ가 1971년 신민당 대선 후보가 되는 등에 크게 기여했지만 돌아온 건 외면뿐”이라고 회고한다. 1984년 YS의 단식투쟁 1주년을 기해 민추협이 출범할 때 YS와 손잡은 게 원인이라는 것. ‘동교동계만의 독자 세력을 구축하라’는, 즉 ‘YS와 손잡지 말라’는 DJ의 교시(敎示)를 어긴 게 결정적이었다는 말이다. 

YS의 핵심 중 핵심인 최형우 의원의 아호는 온산(溫山). 본인의 고향에서 따왔다지만 YS가 거산(巨山)인 것과 무관치 않다. 최 의원은 1972년 신민당 전당대회 때 YS가 ‘사쿠라’로 여론의 도마에 오른 유진산 전 당수를 지지하자 ‘그딴 식으로 하다간 대통령은커녕 소통령도 못한다’고 들이받았지만 YS는 끝내 그를 챙겼다. 최 의원은 3당 합당 때도 ‘죽으로(죽으러) 가는 (호랑이)굴에 혼자나 가서 죽지 왜 나를 끌어들이느냐’고 치받았지만 문민정부 시절 2인자로 대접받았다.

 

사람을 무척이나 아낀 YS

“YS는 군사정부 시절 H 의원 등이 정보부 회유 자금을 받은 줄 알면서도 “오죽하면~” 하며 모른 체 받아주곤 했다. 대통령이 됐을 때도 정(情)에 인색하지 않았다.” 박관용 실장의 술회다. 박 실장은 “주돈식 공보수석을 내보낼 때다. 정권 초기의 수석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건의에 대통령은 동의했다. ‘공보처 장관이 어떠냐’고 묻기에 ‘그 자리는 언론인들과 자주 어울려야 하므로 술을 들게 되는데 그것은 곤란하다’고 했더니 그 진언도 이내 수용했다. 그래서 문화부 장관으로 낙착됐다”면서 김정남 교문수석에 대한 ‘좌파 시비’가 아무리 거세도 요지부동이었다고 했다. 

정치에서 조직·선전과 함께 가장 중요한 다른 요소는 돈(자금)이다. YS가 돈에 무심할 정도로 ‘헤펐다’고 한다면 DJ는 정반대다. ‘상고(商高) 출신이라 다른가 보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DJ는 돈에 집착하는 모양새였다. 1997년 대선을 망칠 뻔했던 ‘20억+α설’ 등은 우연이 아니다.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많은 DJ였으나 또 하나의 ‘김(金)’,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와의 연대를 성사시켜 대권 고지의 꿈을 이룬다. YS는 자신의 대통령 취임으로 ‘3김 시대’가 종언을 고(告)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