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 걸어온 반기문, 청와대行 비단길 걷나
  • 남상훈 세계일보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02 17:59
  • 호수 138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권의 잇따른 러브콜…“반기문에 올인했다 쪽박 찰 수도”

 

 

5월25일 오후 8시10분 제주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포럼 참석차 방한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환영 만찬을 마친 뒤 나가면서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와 악수하려 하자 정 원내대표가 갑자기 귀엣말을 했다. 한 참석자는 정 원내대표가 반 총장에게 “이번 방문기간 동안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만나실 거냐”고 물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반 총장은 정 원내대표의 질문을 외면한 채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충청도 출신 정 원내대표는 당 주류인 친박(친박근혜)의 지원을 받아 원내대표직에 오른 친박 인사다. 그는 5월24일 비박(비박근혜) 김무성 전 대표와 친박 실세 최경환 의원과 비밀회동을 통해 비대위원장 외부영입 등 당 수습책을 전격 합의해 ‘밀실거래’란 당 안팎의 비판을 받았다. 그런 그가 다음날 한가하게 반 총장을 영접하러 한걸음에 달려간 것이다. 마치 친박이 ‘반기문 대망론’에 불을 지피려는 의도로 비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정 원내대표의 제주행은 친박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 아닌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제주도의 초청에 상당기간 확답을 주지 않다가 반 총장의 참석이 알려지자 갑작스럽게 참석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럴 만한 정황이 있다. 정 원내대표는 당초 만찬장의 헤드테이블에 앉을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제주도에 반 총장과 같이 앉을 수 있도록 좌석 배정을 요청해 결국 관철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 원내대표의 제주행은 친박이 반 총장의 대선 출마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 돌출행동으로 보인다. 밀실합의에 대한 여론의 비판을 희석시키기 위해 반 총장과의 친분을 과시하려 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5월25일 제주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주포럼 만찬을 마친 뒤 퇴장하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귓속말을 하고 있다.
반기문, 친박의 정치적 활용에 불만 내비쳐

반 총장은 이날 중견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이 주최한 간담회에서 ‘홍문종 의원이 반기문 총장은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변수가 아니라 상수(常數)라고 한다’는 질문에 “홍 의원과는 1980년대에 미국 유학 시절을 함께한 적 있다. 하지만 최근에 전화통화도 한 적 없다”고 선을 그었다. 친박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여당에선 일부 친박이 호들갑을 떨다 반 총장에게 부정적 이미지만 덧씌워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친박 중진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도 반 총장을 극진하게 대우하고 친박 실세들도 반 총장 영입에 공을 들이고 있는 분위기”라며 “그런데 일부 친박 인사들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기 위해 반 총장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경우가 있어 오히려 역효과를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친박에선 여권 유력 대선주자 부재의 유일한 대안으로 반 총장을 꼽고 있다. 애매한 처신으로 ‘반반(半半)’ 별명이 붙은 반 총장은 마치 친박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확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그는 대선 출마와 관련해 “10년간 유엔 사무총장을 했으니 기대가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겠다”며 “내년 1월1일 오면 한국 시민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는 그때 가서 고민해 결심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 대선 출마를 시사한 것이다.

반 총장은 대권 도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신상 의혹에 대해서도 적극 해명했다. 그는 나이와 체력 문제와 관련, “미국 대통령 나온 사람들이 민주당은 전부 70세(힐러리 클린턴), 76세(버니 샌더스) 이렇다”며 “별문제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가 1년에 하루도 아파 결근했다거나 감기에 걸려 쉰 적도 없다”고도 했다. 내년이면 73세가 되는 그가 고령이란 점을 들어 대통령직 수행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 대해 반박한 셈이다.

그는 정치권의 정쟁을 비판하며 통합을 강조했다. 반 총장은 “누군가는 대통합을 선언하고 나와 솔선수범하고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며 “국가 통합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아주 좁은 커뮤니티 인터레스트(집단 이익)나 파티 인터레스트(정당 이익) 등을 갖고 하는데 이건 정치가 아니라 정쟁이다. 이런 것을 지양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국민이 20대 총선에서 던진 메시지인 협치(協治)를 실천해야 한다는 얘기다.

제주포럼에서 반 총장과 많은 대화를 나눴던 원희룡 제주지사는 반 총장의 행보를 이렇게 분석했다. 원 지사는 “이번 대선 출마 시사는 반 총장의 남은 임기 7개월 동안 국내에서 반 총장의 대망론에 대한 갑론을박이 진행되면서 이슈화되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면서 “적절한 시기에 자신을 여권 유력 대선주자군의 상수로 만드는 선택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친박도 반 총장의 적극적인 자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 친박 의원은 “반 총장의 참모진들은 친정인 외교관으로 채워져 있어 정무적 판단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면서 “그런데 이번 대선 출마 시사 발언은 적절한 수위를 유지한 것 같아 ‘반 총장 주변에 정무적 조언 그룹이 붙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여권 일각에선 친박이 반 총장을 조직으로 자문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도 보내고 있다. 충청포럼 회장을 맡은 친박 핵심 윤상현 의원이 자문그룹을 가동해 반 총장 지원에 나섰다는 소문도 들린다.

非朴 잠룡들, 호락호락 대권 내주지 않을 것

하지만 정치 경력이 거의 전무한 반 총장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전망이다. 반 총장은 추대 또는 무늬만 경선을 원하고 있다. 여권 내 대선주자들의 지지율이 반 총장보다 크게 밑돌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이런 입장에 반대하는 비박 대선주자들의 설득이 넘어야 할 산이다. 김무성 전 대표, 오세훈 전 서울시장, 김문수 전 경기지사 등 비박 대선주자들이 호락호락하게 대권을 내주지 않을 공산이 크다. 원 지사는 “(친박이) 단순히 정치공학적으로 지역이 이렇게 연합하고 어떤 경력을 내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점에서만 출발해서 (대선주자 선택에) 접근한다고 하면 우리 국민의 수준이 무섭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 총장의 본선 경쟁력에 대한 우려감도 여전하다. 여권의 관계자는 “한국 정치가 간단치가 않다. 여야가 치열한 검증과 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다”면서 “대선 출마는 위험도 크고, 상처를 받아서 국가·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정치판이 손상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통 외교관으로 꽃길만 걸어온 반 총장이 혹독한 검증 과정을 견디지 못할 것이란 얘기다. 그는 “혹시라도 대한민국이 그래도 교과서에 실릴 수 있는 국제 지도자이고 자라나는 세대의 존경을 받는 인물인데 과연 대통령으로 써야 맞는 것인지에 대해 여권이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친박 일각에서도 “냉정한 정치 현실을 감안해 반 총장 경쟁력의 거품을 걸러 냈을 때 어떻게 될지를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반 총장에 올인했다가 쪽박을 찰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