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나쁜 사람. 그래선 안 되지”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10 13:44
  • 호수 139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YS에 이어 DJ에게 ‘내각제 배신’ 당한 JP의 탄식

김영삼 대통령과 주례회동을 위해 청와대를 찾은 김종필(JP) 민자당 대표. 창당 파트너였지만 2인자로서 JP는 깍듯하다. 3당 합당의 대전제였던 내각제 개헌은 어느새 사라졌다.


 

“나쁜 사람! 벌 받지. 그래선 안 되지.”

김종필(JP) 자민련 명예총재가 내뱉듯이 말을 던졌다. 2001년 8월 수원컨트리클럽, 함께 골프카트를 타고 이동하던 중앙 언론사 논설위원 K씨를 향해서다. “내각제는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K씨의 물음에 대한 반응이었다. K씨의 “어차피 예견됐던 것 아니냐. 그나저나 공동정부를 깰 수도 없는…”이라는 말에 JP는 “왜 못 깨. 참 나쁜~”이라고 여운을 남기며 티박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K씨는 아찔했다. JP가 ‘나쁜’이라고 지칭한 상대가 현직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YS 청와대엔 내각제 단어조차 없어


“라운드 시작 전 JP가 불렀다. ‘임자가 운전하지’라고 했다(박정희 대통령의 JP에 대한 호칭이 ‘임자’였는데 JP는 친밀하게 느끼는 상대를 ‘임자’로 호칭). 할 얘기가 있다는 사인이었다. 그런데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나쁜 사람’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래서 다음 홀로 이동하면서 ‘지난번 총리 공관에서 뵈었을 때는 (내각제를) 자신하지 않았냐’고 다시 얘기를 꺼냈더니 ‘지가 어떻게 (대통령이) 됐는데’라는 힐난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JP의 이날 언명은 자신의 결연함을 신문에 ‘흘려줄 것’을 의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믿는 언론인에게 갑갑한 심경을 토로한 것으로 여겨 보안에만 급급했었다. 최후통첩성 보도를 통해 반전을 바랐는지 하는 점 등은 간파하지 못했다. 김대중(DJ)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나쁜’ 운운도 보안에 신경을 쓴 이유이기도 했다. 2개월여 뒤 JP가 ‘눈치가 그리 없으면서 신문사는 어떻게 다니나’고 놀릴 때 골프카트에서 한 말이 보도를 염두에 둔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9월3일 국회는 JP의 자민련이 가세한 가운데 임동원 통일원 장관 해임건의안을 가결했고, DJ와 JP는 완전 결별).” K씨의 회고다. 내각제 개헌을 명분으로 3당 합당을 추진하고 YS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으나 팽(烹)당했던 JP다. 그런 JP에게 DJ의 배신은 너무 큰 아픔이었다. 사실 대통령 되는 게 난망이었고, 때문에 무정란(無精卵) 정당이라는 비아냥거림을 감수하면서도 현실정치판에 몸담고 있는 JP에게 내각제는 존재 이유요, 명분이었다. 대통령 책임제는 책임제가 아닌 ‘대통령 무(無)책임제’라며 경계한 JP는 내각제가 그나마 대통령제의 해독을 줄일 수 있는 마지막 방편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래서 색깔을 전혀 달리하는 DJ와 손을 잡는 극약처방까지 마다 않았는데 YS 때와 마찬가지가 된 것이다. DJ는 ‘정치는 생물(生物)’이라고 했었다. 살아 움직인다는, 바뀐다는 얘기였는데 내각제 개헌 약속도 예외가 아니었다. JP는 YS에게 당한 경험을 살려 DJ와는 내각제 개헌을 위한 방법·추진 일정 등 세세한 구석까지 명문화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YS와의 경험에 미루어 보더라도 합의 문서라는 게 무의미함을 절감했음 직한 JP였으나 내각제에 대한 집념이 원체 컸던지 전철을 되밟은 것이다. 

 

“내각제 개헌은 생각조차 않았다. YS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미 다 끝난 얘기다. JP가 민자당 대표로 있었지만 단 한 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JP 본인도 짐작했을 것이다. 소수파 대표에 불과하지 않은가. YS가 총재로서 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으니 새삼 신경 쓸 바 못 됐다.” 민주계(상도동계) 인사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당연히 박관용 비서실장이나 정무수석에게 내각제 개헌을 묻는 이조차 없었다. 얘깃거리, 관심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서의 K씨 등 당시 청와대를 출입하던 기자들은 청와대에서 내각제라는 단어가 빈말이나마 등장한 적이 없었다고 술회한다.

 

“사실 퇴임 후 안위를 감안한다면 내각책임제는 현 대통령에게 바람직한 제도다. 굳이 전직 대통령들의 험한 말로를 상기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대통령제를 신주처럼 모시고 그 꿈을 좇아온 대통령에게 내각제를 꺼내는 것은 무모하기까지 했다.” “YS는 자기 입맛에 맞는 후계자를 내세워 원임(原任) 국가원수로서 대접받는 모습만 상상했다. 그러니 모두 입을 다물 수밖에. 게다가 YS에게 패한 DJ가 그 즉시 정계은퇴 성명을 내고 한국을 떠난 마당이다. 정적의 관 뚜껑에 못질까지 된 것을 확인한 셈이다. 당시 YS로선 정치적 걸림돌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꼈을 게 분명하다.” 당시 민자당 및 청와대 관계자들의 회고는 대동소이하다.  

 

노태우 대통령·YS와 더불어 3당 합당을 마무리한 JP는 그 연결고리가 된 내각제 개헌 합의 전말을 생생히 기억한다. YS가 내각제 합의를 감추고, 미루고, 깨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꿰고 있다. 내각제 저지를 위해 민자당 대표인 YS가 평민당 총재 DJ와 기습 회동(1991년 4월), 공동성명을 내던 전후 상황도 또렷하게 알고 있다. 이런저런 등으로 YS의 파약(破約) 가능성을 대충 예감한 듯하다. JP는 중앙일보에 연재한 회고록에서 언뜻언뜻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그러나 직접적은 아니다. JP는 YS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미워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자 “여부가 있느냐. 문서로도 보장할 수 있다”고 했었는데 ‘5·16은 쿠데타’라는 발언을 보고 결별을 예감했다는 식으로 뭉뚱그리고 있다.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후보 추대 위원회’ 명예위원장으로서 YS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선 JP는 또 “대통령이 되시면 총리를 당 출신 가운데서 지명해주십시오. 내각제적 국정운영을 해달라는 말씀입니다”라고 했더니 흔쾌히 수락했다고 전하면서 그러나 총리에 황인성 의원을 임명한 정도가 다였다고 회고한다(황 총리는 JP가 70년대 총리 시절 비서실장). 내각제적 운영은 턱도 없는 기대였다는 것이다. 당대표였던 JP는 YS의 청와대 입성 이후 매주 한 차례 주례회동을 가졌는데 YS에 반대하면 “씰데 없는 소리”라며 묵살하더라고 했다. 단순한 공신(功臣)이 아닌, 민자당 내 일정 지분을 가진 ‘동업자’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1992년 대선 패배 직후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김대중(DJ) 민주당 총재. 이듬해 1월 영국으로 건너갔던 DJ는 2년 반 후 정계에 복귀,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JP와 DJP연합을 이끌어내며 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JP “순발력은 YS, 오기는 DJ 못 따라가”       

 

JP는 그럼에도 2인자로서 YS를 깍듯이 모셨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회고록의 성가를 더 높이는 것은 YS와 DJ 두 사람에 대한 평가 대목으로, 인용할 만하다. “YS는 집중적·단선적이다. 권력의 본성을 감각적으로 느낀다. DJ는 단계적이고 복선적 접근 스타일이다. 그도 권력의 본질에 대한 연구가 깊은데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의심하고 계산하는 측면이 많다.” “YS가 DJ보다 기(氣)가 세다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 않는다. 권력을 쟁취할 때의 DJ를 보면 그 끈기와 오기, 강인함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다만 순발력과 속전속결에서 YS가 앞선다. YS는 틀렸다 싶으면 정면으로 부딪쳐 가부간 결판을 낸다. 그래서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 구속 등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1992년 대선에서 DJ가 당선됐다면 전·노의 청산은 다른 식으로 진행됐을 것이다.” YS와는 혁명 이듬해인 1962년 처음 조우한 이래 대권 가도 등에서 맞닥뜨린 탓도 있겠지만 ‘역시 JP’라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날카롭다. 그러나 문제는 YS·DJ 모두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내각제 개헌’이라는 같은 메뉴로. JP의 한계인지, 운명인지 그랬다.  

 

 

풍운아 JP 

‘풍운아(風雲兒)’는 ‘좋은 때를 타고나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라고 국어사전은 정의한다. 사전은 “부정적(否定的)인 의미와 무관하다”며 “해당 용례가 부정적으로 해석되는 것은 ‘풍운아’ 때문이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는 조선 말기 갑신정변을 주도한 근대화 운동의 선구자 김옥균(金玉均)이나 일본 전국시대 최고의 걸물로 꼽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등에게 풍운아 이름이 붙여지면서 일반에게 부정적으로 각인된 현실을 감안한 것이다. 여기서 ‘부정적’이란 ‘최고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의미까지를 담은 풍운아가 ‘대세’다. 그리고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제격인 인물은 JP(김종필)다. ‘35세 중앙정보부장, 45세 국무총리(11대), 또 국무총리(31대), 9선 국회의원’ 등 역임한 관직 모양새만도 그럴싸하다.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고 막강 정보기관 창설, 20년 집권 여당 창당, 4년 반 동안의 총리 재직과 DJP공동 정부 2대 주주로서 역대 최고 실세 총리를 지내는 등 ‘질적(質的)’ 측면까지 고려하면 이론 여지가 없다. 게다가 대통령은 되지 못했으니 통념상(通念上)의 풍운아에 딱 들어맞는다.

 

YS와 불화를 거듭하던 JP는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하고 자민련을 창당했다. DJ와 손잡은 JP는 DJ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한다.

 

18년 반에 걸쳐 한국을 쥐락펴락한 박정희(PP) 대통령이 떠난 1979년 10월26일 이후 20여 년의 세월이 ‘3김(金)시대’다. JP는 다른 양김-YS(김영삼)와 DJ(김대중)-과 3자 정립(鼎立)시대의 한 축을 이루며 한국 정치를 재단했다. 제13대 노태우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군사정부 시대가 막을 내린 이래 YS와 DJ는 각기 대통령이라는 최고위에 올랐으나 JP만은 예외였다. 가장 지적(知的)이고 신사(紳士)였는지 모르나 소수파의 한계는 뛰어넘지 못했다. 그 혼자만이 가질 수 있던 10선 타이틀도 챙기지 못했다(JP 외에 9선은 YS와 박준규 전 국회의장. JP는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했으나 소속한 자민련이 득표율 3% 등 의석 배분 규정에도 못 미치는 졸전으로 10선 고지에 오르는 데 실패).

그러나 민정·통일민주·신공화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을 출범시켜 YS의 대통령 당선을, DJ와의 DJP연합으로 DJ 대통령을 가능케 했다. 특히 DJ가 대통령이 된 데에는 JP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영남권을 기반으로 한 YS의 경우는 다를지 몰라도 호남 출신의 소수파 DJ가 대통령이 되는 데 JP는 결정적이었다(DJ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39만 표 차로 이겼다. 여권 성향의 500만 표를 가져간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의 ‘기여’와 함께 충청의 맹주 JP가 없었다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란 지적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 않는다). DJP연합이 없었던들 ‘좌파’ 내지 진보정권의 등장이 미뤄졌을 게 틀림없다는 점에서 JP의 존재 의미나 비중은 대통령의 꿈을 이룬 YS나 DJ에 크게 떨어지는 게 아니다. 

 

1987년 대선에 신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던 JP는 “대통령이 되려고 출마한 게 아니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된다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대통령 후보가 없는 정당이어서는 총선을 치를 수 없기 때문에 출마했던 것이라고 했다. 이는 변명이 아닐 터다. PP 시절엔 ‘영원한 2인자’로 몸을 낮춰야 했고, 3김 시대엔 충청이라는 소수파의 한계를 거부하지 않았던 JP의 당연한 현실 인식이었을 게다. 이런 JP가 택한 것은 내각책임제였다. 영호남 극한 대결이라는 정치 상황은 그 당위성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JP는 내각책임제를 고리로 YS와 3당 합당을,  DJ와 DJP연합을 감행했다. 그리고 YS와 DJ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배신(背信)이었다. YS·DJ 모두에게서 토사구팽(兎死狗烹)됐다. 내각제 합의문서는 휴지 조각이었을 따름이다. 청와대의 주인이 된 YS·DJ는 JP를 용도 폐기했다. 이렇듯 다른 양김과 달리 대통령이 되지 못한 JP지만 YS·DJ와 더불어 역사의 한 주역임은 틀림없다. 야당이라는 외길을 걷다 대권고지에 오른 양김과 달리 5·16을 통해 PP 시대를 연 산파(産婆)로서, 장기간의 세월을 산업화의 중심에 섰다는 점에서다. 풍운아 JP는 중앙일보에 자신의 정치역정을 토해냈고 연재된 내용들을 한국 현대사의 가장 귀한 사료로도 평가받는 <김종필 증언록>으로 펴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