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 타깃’에게 향하는 분노가 넘친다
  • 김경민 기자 (kkim@sisapress.com)
  • 승인 2016.06.1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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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상대을 향한 분노, 한국 사회를 집어삼키다

#. 5월17일 서울 강남역 10분출구 인근 한 노래방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30대 남성 김아무개씨. 그는 경찰 조사 당시 “여자들에게 항상 무시당해 범행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 5월29일 서울 노원구 수락산 등산로에서는 김아무개씨가 60대 여성의 목ㆍ복부 부위를 과도로 수차례 찔러 숨지게 했다. 그는 취재진에게 자신의 정신병력을 언급하며 사실상 ‘묻지마 살인’ 가능성을 주장했다.

#. 6월3일 수원 권선동에서 길 가던 70대 노인이 30대 여성에게 마구잡이로 폭행당했다. 가해자 김아무개씨는 경찰 조사에서 “세상 사는 게 짜증난다. 기분 나쁘게 쳐다봐서 그랬다”고 진술한 뒤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들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범행 대상으로 ‘쉬워 보이는 상대’를 골랐다는 것이다. ‘소프트 타깃(Soft Target)’ 범죄다.

 

소프트 타깃은 원래 방어능력이 취약한 민간시설을 의미하는 군사용어다. 보통 정부기관이나 공적기관을 대상으로 하는 ‘하드 타깃(Hard Target)’의 반대 개념으로 사용된다. 주로 민간인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테러행위를 의미해왔다.

 

그런데 최근 여성이나 노인 등을 상대로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 피의자가 느낀 분노와 전혀 무관한 대상을 선택했다. 여기에 더해 자신보다 물리적으로 힘이 약하거나 갑작스런 공격에 취약한 이를 대상으로 했다. 그런 점에서 민간을 상대로 한 범죄행위, ‘소프트 타깃’에 대한 공격으로도 볼 수 있다.

 

피해자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피해자학(victimology)에 따르면 피해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가 얼마나 취약해 보이는가는 범죄 발생에 있어서 일정 부분 기여한다고 한다. 범행 대상을 물색하는 잠재적 범죄자가 외형상 자신이 해코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을 1차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대상의 선택이 범행을 저지르는 이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이뤄진다는데 있다. 실제로 최근 묻지마 범죄, 분노형 범죄들의 피해자로 지목됐던 이들은 상대적으로 약자였다. 범죄심리학 전문가인 오윤성 순천향대 교수(경찰행정학과)는 “범죄자가 범행 대상을 선택할 때 아무나 선택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상대의 취약성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대상선택(victim selection)’을 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오 교수는 “강남역 묻지마 범죄나 수원 노인 폭행이나, 여성․노인이라는 약한 상대를 선택한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단순 분노, 정신병 등 범행동기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자신이 해하기 쉬운 상대를 골랐다는 점에서 모두 ‘소프트 타깃’인 셈이다.

 

현재 한국의 여론은 ‘피의자들이 왜 그랬을까’라는 범행 동기에만 주목하고 있다. 묻지마 범죄, 무동기 범죄, 혐오 범죄,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 범죄 등 수많은 용어 사이에 왈가왈부하고 있는 모양새다. 범죄전문가들은 성급한 범죄의 유형화는 왜곡된 사회갈등만 조장할 뿐이라고 말한다. 범행동기는 수사과정에서 다양한 요인을 신중히 고려해 판단할 문제라는 지적이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종합적인 통찰이다. 비슷한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어떤 영향을 받아왔으며 어떤 생활을 했는지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묻지마 범죄자의 특성’에 대해 연구해 온 윤정숙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분노형 범죄의 경우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몰린 사람들, 사회적 안전망 밖에 방치돼있는 사람이 많다”며 “대부분의 묻지마 범죄자들은 개인적․사회적인 이유로 축적된 스트레스를 적절히 풀어낼 창구를 찾지 못하다가, 특정 촉발요인에 반응해 그 스트레스가 터져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프로파일러인 배상훈 서울디지털대 교수(경찰학과)는 “우리는 범죄의 근저에 깔린 ‘분노’를 봐야 한다”며 “이 같은 ‘소프트 타깃’ 범죄가 자꾸 발생하고 또 빠르게 확산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결국 “정신질환자든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이든, 그들을 괴물로 만든 원인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관련기사 링크

고립된 분노가 ‘사회적 테러’를 낳다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39636 

‘분노범죄’ 외로운 당신을 노린다 http://sisapress.com/journal/article/144549

“분노범죄, 개인이 떠안을 수 있는 상황 넘어섰다” http://sisapress.com/journal/article/144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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