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조폭들의 끝없는 진화
  • 정락인 객원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16 13:50
  • 호수 139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돈 냄새 나는 곳은 어디든지 쫓아가…기업사냥꾼으로 화려한 변신

정부 수립 이후 ‘조직폭력배와의 전쟁’이 숱하게 벌어졌다. 5·16 쿠데타를 성공시킨 박정희 세력은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정치깡패들을 대거 구속시켰다. 당시 악명을 떨치던 ‘정치깡패의 대명사’ 이정재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전두환 군사정권 때는 깡패들을 순화한다는 명분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다. 노태우 정권 때에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조직폭력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펼쳤다. 이처럼 역대 정권에서는 숱하게 ‘조폭 타도’를 외쳤으나 그때뿐이었다. 


조폭들은 시대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신했다. 과거 조폭들은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산다’며 의리를 중시했다. 하지만 21세기형 조폭들은 ‘의리’가 아니라 ‘돈’을 따진다. 돈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고, 돈이 있는 곳을 찾아다닌다. 그러다 보니 돈의 흐름에 아주 민감하다. 도박장을 운영하고, 기업사냥꾼으로 변신해 돈 한 푼 없이 알짜기업을 꿀꺽하기도 한다. 경찰이 조폭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할 정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겉으로는 조폭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조폭들의 변화는 ‘호칭’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폭력을 호구지책으로 삼을 때는 ‘두목’ ‘부두목’ ‘행동대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기업 형태로 바뀌면서 ‘고문’ ‘회장’ ‘사장’ ‘부장’ 등의 호칭으로 바뀌었다. ‘전문경영인’ 등으로 경력을 세탁한 후 서민들의 등골을 빼먹고 있는 것이다. 

 

 

울산지방경찰청은 6월9일 전국 21개 조폭 43명이 개입한 불법 스포츠토토 사이트를 적발했다고 밝혔다.

피 튀기는 전쟁 대신 조직 간 이합집산

 


경찰청은 지난 2월15일부터 5월24일까지 100일간을 ‘생활 주변 폭력배’ 특별단속기간으로 설정하고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벌였다. 그 결과 조직폭력배 1684명을 검거하고, 이 중 214명을 구속했다. 이번 특별단속기간을 통해 조폭들의 새로운 변화도 감지됐다. 


범죄 유형을 보면 유흥가 주점 등 업소를 협박해 금품을 뜯어내거나 조직 간 패싸움을 벌이는 등 전형적인 폭력·갈취가 여전히 비중이 높았다. 그러나 과거에 비하면 그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대신 도박장 운영이나 인터넷 도박 등 사행성 영업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조폭들의 이합집산이다. 기존의 조폭들은 자기 조직의 세를 불리는 데 중점을 뒀다. 조직원들의 숫자가 조직폭력단체의 위상을 결정짓던 시대였다. 또 경쟁 조직과는 끝없는 영역 다툼으로 칼부림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조직들 간 ‘전쟁’ 대신 필요에 의해 ‘협력’하는 행태로 바뀌었다. 과거 집단 패싸움을 벌이던 수준을 넘어 코스닥 상장기업을 인수해 자금을 횡령하거나 사행성 게임 영업장을 운영하면서 법망을 피해 불법 행위를 일삼고 있다. 조직폭력배에 의한 각종 신종 범죄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조폭들이 뛰어드는 ‘돈 되는 사업’은 주류유통, 성인오락실, 카지노, 다단계 사업, 건설업, 사채, 청부폭력, 벤처기업 운영, 상장회사 인수, 프로스포츠 승부조작,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 등 다양하다.
조폭들은 돈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는다. 용역업체 운영은 기본이고 건설이나 재개발지역의 조합 설립, 건설대행사 등에도 개입하고 있다. 특정 지역 개발을 추진하면서 땅 매입, 관공서 허가, 반대 세력 제거 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불법 도박 사이트가 주요 수입원


그리고 사업이 성공하면 개발업체에서 커미션을 먹고, 지역 조폭들에게는 특정 이권을 주고 있다. 건설회사는 개발을 무난하게 해서 좋고, 지역 조폭은 먹거리를 챙겨서 좋다는 식이다. 시중에 떠도는 검은 자금을 세탁한 후 거액의 수수료를 챙기기도 한다.
각종 유치권 분쟁 개입, 대출사기, 확장 운영 등 각종 이권 개입의 필요에 따라 여러 조직이 소규모로 일종의 태스크포스(TF)를 꾸리기도 한다. 실제 광주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최근 검거한 대출사기 일당 가운데는 호남지역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조직폭력단체 2곳이 포함됐다. 경기 북부에서도 2개 조직이 연합해 도박장 운영, 유흥업소 갈취, 보험사기 등을 저지른 것이 확인됐다. 


최근 가장 각광받는 주요 수입원 중 하나는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이다. 울산경찰청은 6월9일 1000억원대 ‘불법 스포츠토토 사이트’를 적발했다. 여기에는 익산의 배차장파 행동대원 강 아무개씨(31) 등 전국 21개 조폭 43명이 개입했다. 


사이트의 총괄 운영자는 울산 재건신역전파 부두목 박 아무개씨(33)로, 현재 해외로 달아난 상태다. 도주한 박씨는 지난해 1월부터 올해 4월까지 중국과 베트남 등에 서버를 두고 해외 축구·농구 경기를 중계하는 도박 사이트를 개설해 강씨에게 회원 모집 총책을 맡겼다. 


강씨는 평소 친분이 있던 조폭들에게 “돈을 쉽게 버는 방법이 있다”며 이들을 하부 모집책으로 끌어들였다. 이렇게 가담한 조폭들은 또 다른 조폭을 영입하는 식으로 울산·대전·수원·전주·포항 등의 전국 조폭들이 참여했던 것이다. 


강씨와 하부 모집책인 조폭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회원들을 모집했다. ‘안전한 놀이터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홍보해서 회원으로 가입하면 사이트 접속 아이디 등을 제공해 도박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강씨는 그 대가로 도박 회원들이 건 돈의 3~5%, 하부 모집책 격인 조직폭력배들은 자신이 모집한 회원들이 잃은 금액의 30%를 도박 사이트 운영자들로부터 배당금 명목으로 받아 챙겼다. 강씨는 또 해외에 서버를 둔 31개의 사이트 국내 운영권을 확보하고 도박을 알선해 1억6000만원 정도를 주머니에 챙겼다. 나머지 조폭들은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3000만원 정도를 가져갔다.
경찰은 이런 수법으로 도박 사이트 운영자들로부터 최소 47억원, 회원 모집책들은 수억원을 챙긴 것으로 보고 있다. 도박 사이트는 사이트 제작 프로그래머, 대포통장 개설·유통책, 대포폰 공급책, 회원모집 총판 등으로 역할을 분담하는 점조직 형태로 운영했다.
인터넷 도박은 점점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데, 불법으로 사설 선물거래 업체를 운영하는 일당과 조직폭력배들이 무더기로 적발되기도 했다. 이처럼 불법 도박 사이트는 조폭들에게는 든든한 자금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인터넷 등에서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고 대출사기를 벌이는 신종 조폭들은 3년간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또 10명 이하 소규모 조직이 75%에 달한다. 과거에 비해 조폭 숫자가 줄어들었다기보다는 은밀하게 활동해 이들을 적발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한 전직 조폭 두목은 “지금은 돈이 없으면 조직을 이끌 수도 없고 생활도 안 된다. 조직들 간에도 세력 다툼에 나서기보다는 연합해서 살길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전주 완산경찰서는 2015년 1월22일 5만원권 1억원어치를 컬러복합기로 위조해 사용한 혐의로 정아무개씨와 허아무개씨 등 일당 4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사채업자와 결탁해 코스피까지 진출

 


조폭들의 ‘기업 사냥’은 교묘하고 치밀하게 전개되고 있다. 지난 2011년 8월 검찰은 기업 사냥에 나선 사채업자와 조폭들을 무더기로 검거했다. 여기에는 코스피 상장회사의 임원 등이 포함됐다. 이들은 단기 사채를 끌어와 기업을 코스피에 상장시킨 후 회삿돈 50억원을 빼돌렸고, 회사는 얼마 후 상장이 폐지됐다.


여기에는 익산 역전파 조직원들이 깊숙이 개입했다. 이들은 빼돌린 돈으로 고급 승용차와 명품 시계를 구입하는 등 초호화 생활을 했다. 이 사건은 기업사냥꾼으로 변신한 조폭과 사채업자가 결탁해 코스닥시장을 넘어 코스피까지 진출한 최초의 사례다. 그 후 조직폭력단체는 끊임없이 기업 사냥에 나섰다.


지난해 12월 검찰은 코스닥 상장사를 인수해 210억여원을 빼돌린 ‘기업사냥꾼’ 등을 구속기소했다. 위조지폐 감별기를 만드는 코스닥 상장사인 S사는 한때 잘나가던 회사였다. 2012년에는 63억원의 순이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범서방파 계열 폭력조직 등 기업사냥꾼의 먹잇감이 되면서 하루아침에 폭삭 망했다. 여기에는 김태촌의 양아들로 알려진 충장OB파 행동대장 김아무개씨(42)와 최아무개씨(48) 등이 관여했다. 


최씨 등은 자본금이 1억원에 불과한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하고, 262억원에 지분과 경영권을 넘겨받는 주식양도 계약을 S사 대표와 체결했다. 인수자금은 사채를 끌어들였다. 이들은 회사를 인수한 후 사내이사와 사외이사를 모두 갈아 치운 후 회사를 제멋대로 운영했다. 사채를 갚기 위해 횡령을 일삼았고, 결국 검찰에 적발됐다. 경영권 양도 후 주가는 반 토막이 났고, 상장폐지까지는 불과 7개월밖에 안 걸렸다. 기업사냥꾼으로 변신한 조폭들은 지금도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고 있다.

 

 

뛰는 경찰 위에 나는 조폭 

 

조폭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공권력의 타깃이 되는 것이다. 자칫 조직이 해체되는 상황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조폭들은 최첨단으로 진화하지만 수사기관은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조직폭력단체 하나를 해체시키려면 최소한 6~8개월은 걸린다. 이들 조직의 운영 체계, 조직원 수, 활동 내역 등을 완벽하게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려면 장기적으로 관찰하고 미행도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시간을 윗사람들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당장 눈에 보이는 실적을 내놓으라고 질책하기 때문에 형사들이 조폭을 손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폭을 깨려면 매뉴얼이 있어야 하는데 경찰에는 아직 그런 것이 없다. 영장을 청구하면 기각되기 일쑤고, 구속을 시켜도 재판 과정에서 금방 풀려난다. 조폭들끼리는 빵(교도소)에 갔다 오면 ‘훈장’을 단 것으로 생각해 대우가 달라진다. 몇 년 교도소에 갔다 오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선 강력계 형사들은 “조폭들의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면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가지고 운영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시스템으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한다. 지금은 경찰관이 한곳에 10년 정도 있으면 다른 곳으로 보낸다. 6년쯤 되면 다른 곳으로 갈 준비를 한다. 과장급 간부도 한곳에 1~2년 정도 있으면 다른 경찰서로 가야 한다.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경찰에 조폭 전문가가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