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시국수습 고육책으로 총리에 기용된 이회창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23 13:42
  • 호수 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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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昌 갈등은 예고된 것…제15대 대선 패배 전주곡

 

1993년 3월 국가기강확립 보고회의를 주재하는 김영삼 대통령. 좌우로 황인성 총리와 이회창 감사원장이 배석했다. 황 총리는 쌀 시장 개방에서 비롯한 소요사태에 책임을 지고 재임 9개월여만인 12월 물러났다. 후임 총리는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던 ‘대쪽’ 李 감사원장


 

역사에서 ‘~면’이라는 ‘if 가정(假定)’은 부질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if를 동원해 상황을 반추해본다. 교훈을 얻는다는 이유가 대부분이다. 특히 간발의 차로 승패가 엇갈리고, 이로 인한 명암이나 파장이 엄청날 경우다. 제15대 대선은 여기에 딱 어울리는 케이스다. 1노3김(노태우·YS·DJ·JP)이 자웅을 겨룬 1987년 제13대 대선도 ‘~면’이 자주 대입되는 대상이다. “양김(YS·DJ)이 후보단일화를 했더라면 민주화가 앞당겨졌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그러나 이야말로 부질없는 가상 논의다. 두 사람의 대권 의지가 너무나 확고했으므로 양보는 애당초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면 오히려 다른 후보가 되는 게 낫다’는 배타적 경쟁의식이 뿌리 깊었기에 단일화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가정할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 얘기다. 15대 대선은 그런 측면에서 딱 들어맞는다. 가정을 시도하기에 요소요소들이 제격이고, 무엇보다 오늘의 정치현장에서 배울 점들이 많아서다.

 

“속 썩인다” 昌 감사원장 임명 반대 거세

 

소수파 DJ가 이념적으로 가장 배치되는 JP와 연대해 대권을 거머쥔 자체가 극적이었다. 하지만 그 DJP연합이 거둔 성과가 ‘39만 표 신승(辛勝)’이었고, 이 39만 표는 여러 요소들 중 하나만의 변화만으로도 쉽게 무너질 여지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우선은 국민신당 이인제(IJ)가 올린 492만5000표다. ‘역사적’이라는 DJP연합을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표다. 그리고 IJ 대선 완주(完走) 배후에는 현직 대통령 YS가 있다. ‘YS의 IJ 지원’은 ‘YS와 이회창(昌) 불화’와 이음동의(異音同意)다. 아들 현철의 구속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YS는 IJ의 승리를 착각했다. 昌과 DJ를 앞지르던 IJ의 기세가 일시적인 것임을 몰각했다. 보수진영의 昌과 IJ가 동시 출마하면 구도상 DJ를 도저히 꺾지 못한다는 선거판 기초 중의 기초를 잊었다. ‘천하의 정치9단 YS’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확실한 방증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DJ는 IJ의 중도하차를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선거 막판 부산대 유세장에는 IJ를 ‘간접 응원’하기 위해 DJ 지지자들이 총동원되기도 했다. ‘YS의 막후 지원’에다 ‘DJ의 총력 지원’까지 업은 IJ는 당선을 자신, 昌 쪽의 막판 협상제의를 걷어찼다. 결과는 DJ 승리, JP의 공동정부 2대주주 등극, YS에게는 가장 기피하는 인물의 대통령 당선, 昌은 대선 3연패의 시발, IJ는 경선 결과 불복(不服)으로 반대 진영에 정권을 진상한 ‘반칙과 배신’이라는 낙인이다. 이 밖에도 ‘昌이 아들의 병역 문제 이슈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했더라면’이라는 등 15대 대선에는 ‘정치 교과서’에 실릴 만한 연구 대상이 무수하게 널려 있다.

 

“대통령이 집무실에 등청하면 30분 내지 1시간 동안 국정현안을 보고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게 내 일과의 시작이었다. 1993년 12월16일 아침, 대통령은 집무실에 나오자마자 총리를 바꾸겠다고 했다. 이회창 감사원장을 후임 총리에 임명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개각과 관련한 얘기는 있었지만 총리는 검토 대상이 아니었는데 그랬다.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YS는 밤새 생각한 끝에 그러기로 했다고 했다. 대통령이 결심했다는데 무슨 말을 할까마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9개월20일이 되는 즈음이다. 초대 황인성 총리에 대한 YS의 신뢰는 여전했다. YS는 황 총리 임명 전 나에게 자신이 국회의원 가운데 유일하게 평가하는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좋아한다고 했다. 그런 황 총리였고 특별한 과오도 없었는데 바꾸겠다니 의아할 수밖에. 더구나 후임 이회창 원장은 대통령이 매우 못마땅해하던 인물이다. YS는 ‘대쪽 판사’라는 평판에 따라 이회창 전 대법관을 감사원장에 임명했었다(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이 昌을 감사원장에 임명하자 YS의 지인인 김아무개 변호사가 ‘그는 대법관 시절 소수의견만 냈던 골치 아픈 X. 데려다 무슨 속을 썩으려고 하느냐’며 극구 반대했었다고 전하고 있다). 昌이 율곡비리 특감을 전개하고 언론의 호평이 잇따르자 YS는 자신의 선택을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昌이 안기부에 이어 청와대에 대한 특별감사를 하겠다고 나서면서 달라졌다. 昌은 법이 규정한 감사원의 독립을 근거로 청와대를 감사하겠다고 통보했다. 전례 없던 청와대와 안기부에 대한 특감 시도에다, 그마저 일언반구 사전 논의가 없었으니 시끄러운 것은 당연했다. 안기부는 ‘감사를 강행한다고 안기부 청사에 나타나면 총으로 쏴버리겠다’며 펄쩍 뛰었다. 보고를 받은 YS는 ‘그 노마 왜 이리 설치노’하며 짜증을 냈다. 하지만 昌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물러서기는커녕 그 와중에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감사하겠다며 통지서를 발송했다. 이 원장의 충정과 고집은 이해되지만 이 대목은 지나쳤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감사 문제는 정치적 파장 등 그 민감성으로 미뤄 청와대와 협의를 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전혀 하지 않았다.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화를 벌컥 냈다(당시 비서실 관계자들은 험한 욕설들이 바깥까지 흘러나왔다고 전한다). 그런 황인성 총리와 이회창 감사원장인데 황을 昌으로 바꾼다니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비서실장이던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전하는 昌의 총리 임명 전후 비사다. 

 

 

대통령은 매일 아침 30분 이상 박관용 비서실장으로부터 상황 보고를 받고 국정현안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황 총리 경질로 UR 소요 일거에 평정한 YS

 

“총리 교체와 관련한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당시 우루과이 라운드(UR)에 따른 쌀 수입 개방을 둘러싸고 벌어진 반대시위 등 격렬한 소요사태를 단칼에 정리한 것이었다. ‘사태 책임을 물어 총리를 경질하고 후임에 대쪽 감사원장 임명’으로 국면은 일거에 전환됐다. 역시 YS였다. 정치 고수(高手) YS의 상황 대처 능력은 놀라웠다. 자신을 거스르는 昌을 발탁하는 것쯤은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아무 상관없는 곁가지였다(YS는 대선 선거전이 한창일 때 ‘외국 쌀이 단 한 톨이라도 들어오면 대통령직을 내놓겠다’고 공약했었다. 이게 멍에가 된 것이다. 그러나 UR은 쌀 시장 개방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YS는 취임 첫해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담 참석차 미국 시애틀을 방문했을 때 UR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YS를 수행한 박재윤 경제수석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귀국 때까지 UR 서명 사실 보도 자제를 애소(哀訴)했다. 그로 인한 농민 반발 등을 우려한 때문으로, 청와대는 UR을 발표하면서 43조원 규모의 농업 지원 대책을 내놓았지만 반대시위가 전국에서 빗발쳤었다).”

대통령이 싫어하지만 시국 수습용으로 기용된 국무총리. 昌 총리를 정의하면 그렇다. 그러니 둘 사이가 원만할 리 없었다. 昌 총리의 ‘대쪽’이 바뀌지 않은 것이다.

 

“권위 도전을 용납 않는 YS의 불같은 성정과 昌의 대쪽 기질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을 것은 빤했다. 더욱이 昌의 총리 임명 배경을 잘 아는 나였기에 더 세심하게 배려했다. 昌이 대통령을 자극하지 않도록 권력의 순환 과정 등 청와대 얘기를 해주곤 했다. 그러나 판사 출신 昌의 생각과 자세는 총리 임명 전과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헌법 조항의 국무총리 권한을 확실히 챙기려고 했다. 국무위원 임명 제청과 해임 건의를 포함, ‘행정 각부를 통할(통괄 및 관할)하는 역할’을 하려고 했다. 대통령 중심제하 우리나라 특유의 총리 위치를 얘기해도 그의 관심은 ‘총리 권한’이었다. 昌은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겠다고 나섰다. 법조인 출신다웠다. 원칙에 충실, 그러나 정치인에게는 덕목이 아닌 한계도 된다. 대통령과 총리의 갈등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보수진영의 1997년 대선 패배의 싹은 이렇게 움텄다.  

 


YS와 DJ 지원 속에 완주한 이인제…500만 표로 이회창 발목 잡아

 

1997년 12월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DJ)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웃었다. 40.3%의 득표율에 1032만 표를 얻었다. 2위는 한나라당 이회창(昌) 후보. 38.7%로 993만 표를 획득했다. 표차는 39만 표에 불과했으나 두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이후의 파장도 컸다. 진보진영의 소수파 출신 DJ 대통령 출현은 한국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이후의 정치 상황과 행태도 달라지게 만들었다. 보수-진보가 호각지세(互角之勢)를 이루게 됐다. ‘정권 교체’가 언제고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켰고, 이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등 현 권력에 맹종하는 행태를 깨부쉈다. 이처럼 한국정치에 이정표적 위치를 차지하는 15대 대선의 또 다른 주인공은 김종필(JP) 자민련 명예총재다. 대통령이 아니었더라도 최소한 주연급이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던, 출신지역·이념상의 한계가 또렷한 DJ가 대통령이 되는 데 DJP연합으로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13·15대 대선 당시 DJ의 지역별 득표수로도 확인된다(괄호 안은 15대 득표수/단위: 만). DJ는 13대 때 대전을 포함한 충남에서 19만(79), 충북 8만(29), 부산 18만(32), 경남 8만(26), 대구 3만(16), 경북 4만(21) 표를 얻는 데 그쳤다. 강원에서도 13대 때는 8만에 지나지 않았으나 15대에서는 19만 표를 얻었다. JP가 ‘빨갱이가 아님’을 보증하면서 당선 기대치를 높인 증거다. 13·15대의 대결구도가 달랐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렇다. JP가 등판하지 않았던 14대 득표수를 봐도 기본에선 마찬가지다. 공동정부의 2대주주로 실세총리가 되고 각료 지명권을 가질 만했던 JP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DJP연합이 부각돼서 그렇지 크디큰 요소들은 따로 있다. ‘이인제(IJ)’와 ‘昌 자신’은 치명적 변수였다. 두 가지 다 김영삼(YS) 당시 대통령과 직결된다. 昌과 갈등을 빚던 YS는 예전부터 귀여워하고 기대하던 IJ에게 마음을 줬다. 특히 昌이 아들들의 병역 문제로 지지율 등락을 거듭하고 IJ 지지율이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그리자 선거 막바지에는 완전히 IJ 지지로 돌아섰다. 선거가 있던 1997년 4월까지만 해도 1위를 달리던 昌(4월7일 昌 20:DJ 15:IJ 6)은 대선자금 의혹이 불거지면서 ‘18:25:16:(박찬종 20)’으로 DJ에 밀렸다. 그러나 정식으로 신한국당 후보가 된 7월에는 40:26으로 DJ를 압도했는데 병역비리가 불거지면서 ‘15:25:31’로 다시 처졌고 DJ 비자금 의혹을 잘못 건드리면서 10%로 추락했다(DJ 34, IJ 28). 昌은 조순 통일민주당 후보와 합치면서 20%대로 올라섰으나 DJ(35)·IJ(28)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한국일보의 막바지 조사처럼 DJ(32.1)에 오차수준까지 따라붙었으나(IJ는 20)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물론 일부 언론사나 여론조사기관의 리서치에는 조작(manipulation) 흔적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슈와 상황에 따라 지지율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 출렁인 것은 확실하다. DJ를 옹위하는 몇몇 언론들이 병역 문제 ‘활성화’에 앞장서는 등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 DJ의 선거 전략 최우선은 IJ의 완주였다. DJ의 IJ 중도 포기 저지 시도는 주효했고 4수(修)만에 대권의 꿈을 이뤘다. 어느 누가 봐도 昌과 지지기반이 상당 부분 겹치는 IJ였고, IJ가 500만 표를 가져갔으니 昌 측에 어떤 충격을 가했을지, DJ 당선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따질 필요조차 없다. IJ야말로 ‘DJ 대통령 만들기 1등 공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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