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Insight] ‘노동당’보다 강한 ‘장마당’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7.07 14:03
  • 호수 139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정은, 2012년 집권 후 장마당 통제하지 않아

북한 장마당에서 주민들이 돈을 주고받고 있다.


 

“미국 할아버지가 최고 인기다. 그다음은 중국 할아버지인데, 우리 할아버지는 꼴찌를 면치 못한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 공공연히 오간다는 이 말은 김일성의 초상이 그려진 북한 화폐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100달러짜리에 그려진 미국 정치가 벤자민 프랭클린과 100위안에 박힌 중국 초대 주석 마오쩌둥에 미치지 못한다는 얘기다.

 

북한 경제의 중심에 미 달러가 자리하는 이른바 달러화(dollarization)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은 장마당이다. 1달러의 공식 환율은 북한 돈 106원인데 장마당에서는 암달러 시세로 7950원에 거래되고 있다는 게 국가정보원의 국회 정보위 보고 내용이다. 80배 정도 차이가 난다. 북한의 평균 월급이 3000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평균 급여 수준이 50센트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북한 원화의 가치가 형편없음을 알 수 있다. 쌀 1kg이 8000원 수준에 거래되는 걸 비교해 봐도 마찬가지다.

 

 

‘고난의 행군’이 만든 新경제 풍속도

 

상황이 이렇게 된 건 식량난을 비롯한 북한의 경제가 엉망이 되고, 배급체계가 붕괴했기 때문이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이후 대홍수와 기근으로 200만~300만 명(북한 전체인구는 2400만 명 선)이 아사(餓死)했다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가 시발점이다. 

 

당시 장마당은 북한 주민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산소호흡기 역할을 했다. 처음엔 농민시장 형태를 띠었다. 협동농장이 아닌 텃밭이나 뙈기밭에서 기른 배추·감자 등 농작물을 내다 팔았다. 이후 점차 옥수수빵이나 국수 같은 쪽으로 폭을 넓히더니 최근에는 거래 품목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과자와 비누·칫솔·샴푸 같은 생필품이 등장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전언이다. 초코파이와 ‘막대커피’로 불리는 믹스커피, 천하장사 소시지 등 한국 제품도 거래된다는 얘기다. LED TV와 냉장고·세탁기까지 부유층 사이에서 은밀하게 팔린다는 전언인데, 삼성 냉장고의 경우 ‘SAMSUNG’에서 ‘SAM’을 떼어내 ‘쑹(SUNG) 냉장고’로 불리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는 것이다.

 

북한에도 정권 수립 초기 3일장·5일장 같은 우리 전통 재래식 시장이 열렸다. 하지만 김일성 권력이 자리를 잡은 1958년 8월 개인 상업이 금지되면서 폐지됐고, 국영 유통이나 협동상업 형태로 바뀌었다. 주민들의 생필품 수요에 제대로 맞추기 어렵자 1964년 농민시장 형태로 장마당이 운영되기도 했다. 

 

북한 당국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장마당에 대해 단속과 허용을 오락가락하는 정책을 폈다. 2009년엔 장마당의 자본가 그룹인 ‘돈주’의 자금을 털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반발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2012년 집권 이후 장마당 세력에 대한 별다른 통제를 가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다시는 인민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공언한 김정은이 시장 세력의 존재를 묵인해주는 것이란 해석이 제기된다. 

 

시장이 번창하면서 당국도 해결 못하는 식량과 생필품의 조달 창구로 자리 잡자 주민들은 “조선에는 2개의 당이 있는데 노동당보다 장마당이 세다”는 말까지 한다는 얘기다. 장마당의 확산은 개혁·개방을 주저하고 있는 김정은 정권에 변화를 선택하라는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