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표의 반란’ 일어날까
  • 김원식 국제문제 칼럼니스트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7.13 13:54
  • 호수 1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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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 빗나간 ‘브렉시트’, 美 대선도 ‘숨은 표’에 관심

여론조사가 ‘브렉시트’ 예측에 실패했듯, 미국 대선에서도 예측하기 힘든 ‘숨은 표’가 변수로 떠올랐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지지자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 AP 연합


“계산이 안 된다.” 올해 11월에 실시되는 미국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한 미국 정치분석가가 말한 뜻밖의 답변이다. 결론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인데, 왜 ‘계산(calculation)’이라는 표현을 썼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래도 힐러리야 어느 정도 계산이 된다. 하지만 트럼프를 보면 그가 어디로 튈지가 아니라 어디서 또 얼마만큼의 지지 세력이 쏟아져 나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찌 보면 이 분석가의 분석이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과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의 대결로 사실상 확정된 미 대선판의 현주소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미 대선에서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의 경선 과정에서 단연 반란에 성공한 인물은 도널드 트럼프다. 민주당의 힐러리도 버니 샌더스라는 돌풍을 만나기는 했지만, ‘샌더스 돌풍’이 힐러리를 꺾지는 못했다. 그에 비하면 ‘트럼프 돌풍’은 기적에 가까운 맹위를 떨쳤다. ‘이단아’ ‘막말의 대명사’로 출발한 트럼프가 결과적으로 유력한 공화당 예비 후보들을 차례로 꺾고 사실상 공화당 대선후보로 등극할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막말 퍼레이드는 계속되고


이민자 등 히스패닉계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과 여성 비하의 몰상식한 발언에도 그의 지지세는 오히려 커져만 갔다. 백인 중심의 블루칼라층의 불만을 노린 트럼프의 초기 대선 전략이 그대로 적중한 셈이다. 정치분석가들은 최근 트럼프가 사실상 대선주자로 확정된 이후에는 본선에서 공화당 주류의 표를 얻기 위해서라도 조금은 브레이크를 밟을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아직도 거침이 없다. 인종차별 발언에 대한 숱한 우려에도 불구, 최근 법적 소송 사건으로 자신의 법정 출석을 명령한 판사에게 “친(親)멕시코계”라는 인종차별 발언을 해 공화당 주류를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지게 했다. 더 나아가 미국이 이라크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운 사담 후세인에 대해서도 그가 살아 있었으면, 테러리스트들이 줄어들었을 것이라며 “후세인이 테러리스트를 죽인 일은 아주 잘한 일”이라고 치켜세웠다. 사실상 공화당 후보로 등극했음에도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는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가 이렇게 막말에 가까운 발언을 계속하는 것에는 고도의 전략적 셈법이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어차피 대선은 트럼프와 힐러리 양자 대결로 갈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누가 더 자신의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가게 만들 것이냐가 당락을 좌우할 변수가 된다. 이에 트럼프는 앞뒤 가리지 않고 백인 중심의 저학력 노동자층을 향해 분노와 카타르시스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양당이 전당대회를 통해 후보를 확정하고 대선 본선이 시작되면 트럼프가 브레이크를 밟기는커녕 더욱 충동적인 발언을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트럼프의 반란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다.

 


‘반란의 선봉장 vs 기득권 수호자’ 구도


트럼프가 반란의 선봉장이라면, 힐러리는 기득권의 수호자가 되고 만 것이 이번 대선판의 또 다른 특징이다. 남편인 빌 클린턴이 대통령을 역임한 데다 오바마 행정부 1기 내내 국무부 장관에 재임한 클린턴에게 어쩌면 ‘기득권(establishment)’이라는 딱지가 붙은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당내 경선 과정에서 진보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샌더스 돌풍’이라는 예상외의 복병을 만나면서 힐러리는 기존 정치세력에 안주하는 후보로 각인되고 만 측면도 있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탄생 가능성과 절제된 발언에도 불구하고 힐러리가 반란의 선봉장인 트럼프와 거의 비슷하게 비호감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한다. 


이러다 보니 임기 말기에도 50%가 넘는 국정지지도를 받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오히려 오바마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을 위해 오바마가 트럼프의 저격수를 자처하고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미국 대선판을 결정한다는 막강한 대선자금을 확보하고 있고, 당락을 결정짓는다는 이른바 ‘경합주(州)’에서도 우위를 보이며,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인해 흑인이나 히스패닉 등 소수계층에서도 지지도가 높은 힐러리의 대통령 당선은 ‘떼논 당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 선거자금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막말 퍼레이드를 이어가고 있는 트럼프는 양자 대결에서 거의 힐러리의 턱밑까지 추격한 모양새다. 


더구나 최근 영국 국민들의 ‘브렉시트(Brexit)’ 결정으로 힐러리 대선캠프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영국에서 브렉시트를 찬성한 사람들은 기성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이민자에게 복지를 뺏기고 자유무역으로 일자리를 잃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미국에선 트럼프 지지층이 비슷한 계층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들 ‘숨은 표’는 기존 여론조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유럽연합(EU) 잔류를 예상했던 여론조사가 무너지며 이들 숨은 표로 인해 ‘브렉시트’가 결정된 꼴이다. 쉽게 말해 ‘트럼프 돌풍’이 ‘미국판 브렉시트’가 돼 실제로 트럼프 당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바로 이 점을 노리고 백인 노동자층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 


물론 브렉시트를 결정한 영국 국민들이 다시 재투표를 요구하는 등 역풍(逆風)이 불고 있는 것처럼, 오바마의 정책을 계승하겠다며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힐러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트럼프가 고도의 전략으로 이러한 ‘숨은 표’를 노리고 있다는 분석도 팽팽히 맞서고 있다. 늘 정치나 선거에 무관심했고 한 번도 투표를 해본 적이 없지만 자신이 미국의 본류(本流)라고 믿고 있는 미국의 고졸 이하 백인 노동자층이 트럼프의 카타르시스적 발언에 반해 대거 투표장으로 몰려나온다면, ‘미국판 브렉시트’는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몰고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 대선 결과에 대해 “계산이 안 된다”고 답한 정치분석가는 “어쩌면 트럼프는 자신의 막말로 인해 잃을 표와 얻을 표를 이미 계산하고 있는 영리한 친구일지도 모른다”며 “그의 막말 셈법이 대통령 당선으로까지 이어질지는 몰라도 지금의 트럼프 위치까지 오게 한 것은 맞다”고 강조했다. 결국, 분노를 표로 바꾸는 트럼프의 전략이 성공할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미 대선 본선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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