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A 판결로 균열 커지는 아시아 공동체
  • 모종혁 중국 통신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7.27 11:13
  • 호수 139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 극단적 애국주의에 몸살…아세안·일본 등 이해관계 따라 분열 양상

지난 7월17일 낮 중국 허베이(河北)성 탕산(唐山)시의 한 KFC 점포 앞.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동시에 몰려들어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구호를 외쳤다. “미국·일본·한국·필리핀 상품은 사지도, 먹지도 말자!” 한 시위 참가자는 “당신이 먹는 것은 미국의 KFC이고 버리는 것은 조상의 얼굴이다”며 “KFC 불매운동으로 미국의 남중국해 개입에 대한 불만을 보여주자”고 주장했다. 플래카드에는 ‘미국·일본·한국·필리핀을 배척해 중화민족을 사랑하자’고 쓰여 있었다.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듯했던 시위는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소식이 퍼져 나가면서 중국을 달구었다. 20일까지 창사(長沙)·항저우(杭州)·양저우(揚州)·롄윈강(連雲港)·린이(臨沂) 등 11개 도시에서 동조 시위가 발생했다. 참가자도 10대 청소년부터 50대 장년층까지 다양했다. 일부 도시에선 시위대가 매장에 들어가려는 손님의 출입을 막고 내부까지 난입해 농성을 벌였다. 결국 KFC 매장은 영업을 중단해야 했고, 경찰이 출동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7월14일(현지 시각) 홍콩의 미국 영사관 밖에서 친중 시위대가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의 판결을 지지한 미국을 비난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중국에 불어 닥친 ‘국수주의 광풍’

 

7월12일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가 중국의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리면서, 그 후폭풍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폭풍의 먹구름은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뒤덮고 있다. 먼저 중국에서는 국수주의의 광풍이 불고 있다. 남중국해 문제 및 사드 배치와 관련된 4개국 상품의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그 첫 표적이 KFC였다. KFC가 중국에 진출한 미국 프랜차이즈 중 매장이 가장 많고, 설립자 캐리커처가 전형적인 미국인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PCA 판결 당일에는 다롄(大連)시의 한 지하철 안에서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남성이 구타당했다. 한 중년 남성이 미국 운동화를 신었다고 시비를 걸며 ‘한젠(漢奸·매국노)’이라 욕하고 때리는 장면이 다른 승객이 찍은 동영상으로 공개된 것이다. 주변 승객들은 구타를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강 건너 불 보듯 구경만 했다. 이 사건 후 애플 휴대폰을 부수어 자신의 애국심을 표출하는 동영상이 줄지어 등장했다. 이런 극단적인 행동은 나이키와 애플이 중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미국 브랜드라는 점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중국인들의 분풀이는 상품에 그치지 않았다. 자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람에게도 매질을 가했다. 그 첫 대상은 대만 배우인 다이리런(戴立忍)이었다. 다이는 중국 영화 《다른 사랑은 없다(沒有別的愛)》의 주연으로 발탁된 상태였다. 그러나 한 누리꾼이 2014년 대만 대학생들의 입법원(국회) 점거 시위와 홍콩의 도심 점거 시위를 지지하는 다이의 사진을 공개하면서 ‘대만독립분자’로 몰렸다. 다이는 “나는 대만독립분자가 아니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15일 중국 누리꾼들의 거센 압박에 못 이겨 하차했다.

 

일본 배우이자 모델인 미즈하라 기코(水原希子)가 그 뒤를 이었다. 중국인들은 미즈하라가 2013년 중국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의 사진 작품에 대해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라고 클릭한 일을 트집 잡았다. 현재 미즈하라는 중국에서 각종 잡지 및 광고의 모델로 활동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결국 미즈하라는 16일 사과 동영상을 올렸다. 그는 “친구가 올린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다가 취소했고 그 친구도 부적절한 게시물을 삭제했다”고 해명하며 사과했다.

 

중국인들의 병적인 국수주의에 대해 같은 문화권인 대만과 홍콩에서조차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미즈하라가 지난 1월 걸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출신 멤버 쯔위와 똑같은 굴욕을 겪는 데 주목했다. 쯔위는 지난해 11월 한 인터넷방송에서 대만 국기를 흔들었는데, 중국 누리꾼들로부터 “대만 독립을 지지했다”며 맹비난을 당했다. 이에 쯔위도 동영상을 통해 사과한 바 있다. 두 사람이 겪어야 하는 동병상련에 대만과 홍콩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래서 16일 등장한 것이 ‘제1회 대(對)중국사과대회’다. 이 대회는 대만 사회운동가 왕이카이(王奕凱)가 페이스북에서 주최했다. 참가 자격은 대만 및 홍콩 거주자와 세계 각국의 화교로, ‘사과’ 이유를 적어야 한다. 결과는 8월1일 발표된다. 이미 개설 하루 만에 응모 글이 3000개나 올랐고, 시간당 수십 개가 쏟아지고 있다. 대만과 홍콩 누리꾼들이 유머와 풍자로 중국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실제 응모 글은 ‘대만의 하늘이 너무 푸르러서 중국에 미안합니다’ ‘홍콩인이 중국인에게 외국산 분유를 너무 많이 팔아 사과합니다’ 등 중국의 현실을 비판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7월13일(현지 시각) 카오슝항에서 디화함의 남중국해 출항을 앞두고 함상에 올라 병사들을 격려하고 있다.


 

 

PCA 판결로 아세안 각국 입장 엇갈려

 

이런 중국 요소 외에도 PCA 판결은 대만 정계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PCA가 난사(西沙·파라셀)군도에서 가장 큰 타이핑다오(太平島·이투 아바)를 섬이 아닌 암초로 판결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의 인공섬 7개를 포함, 남중국해에 있는 200여 개의 지형물을 모두 암초로 판단했다. 타이핑다오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잠수함 기지로 썼다. 이를 종전 후 1946년  대만이 점령해 실효 지배해왔다. 현재 민간인은 거주하지 않고, 약 100여 명의 해경 대원과 군인이 주둔 중이다.

 

그동안 대만은 타이핑다오 주변에 대한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주장하며 타국 어선을 쫓아냈었다. 문제는 미국과 일본이 PCA 판결을 존중하라며 중국을 압박하면서 대만이 딜레마에 빠진 점이다.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집권 전부터 친미·친일 정책을 공언해왔고, 동남아시아를 향한 신남향(新南向)정책도 추진 중이다. 그러나 PCA 판결로 인해 대외정책을 추진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됐다. 각계에서 차이 총통이 미·일을 무시하고 타이핑다오를 방문해 영유권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비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PCA 판결은 아세안(ASEAN) 각국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자국의 이익에 따라 사분오열됐기 때문이다. 현재 캄보디아·라오스·미얀마 등은 중국의 입장을 지지한다. 이에 반해 베트남·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은 PCA 판결 결과를 수용한다. 이 때문에 PCA 판결 직후 아세안은 공동성명을 논의했으나, 친중 국가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갓 출범한 아세안경제공동체(AEC)가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난 것이다. 이로 인해 24일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서 개막해 1주일 동안 열리는 아세안 관련 다자회의는 어느 때보다 큰 진통이 예상된다.

 

일본도 불안하다. 당초 일본은 PCA 판결이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댜오위다오(釣魚島·센카쿠열도) 문제에서 호재라고 봤다. 그동안 일본은 서태평양의 환초인 오키노토리(沖ノ鳥)를 섬이라 우겨왔다. 오키노토리는 수면 위로 올라오는 면적이 약 3.3㎡에 불과하다. 그나마 1987년부터 공사를 벌여 콘크리트 인공섬을 만들었다. 이를 근거로 일본은 오키노토리 주변 40만㎢에 EEZ를 일방적으로 설정했다. 이번 PCA 판결 결과에 의거하면, 오키노토리는 한낱 암초일 뿐인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