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승리 확신한 이인제, 총리·당 대표직 제의 등 막판 협상 거부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8.05 09:52
  • 호수 1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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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래 정무수석 “昌 당선 가능성 전혀 없다” 주변 설득

“이회창(昌)은 안 됩니다. 당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뭐야, 이 XX.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후보를 바꾸자고. 어디서 그 따위 얘기를. 누가 그런….”


“총장님, 왜 이러십니까. 나는….”


“이 나쁜….”

 

제15 대선을 2개월여 앞두고 신한국당 박관용 의원과 조홍래 청와대 정무수석 간에 오간 대화다. 대화가 오간 장소는 서울 조선호텔 비즈니스 룸(YS의 경남고 후배로서 3선 의원 경력의 조홍래는 네 번째 정무수석). 

 

1997년 8월26일 신한국당사 대표실에서 회동한 이회창(昌) 대표와 이인제 경기지사(오른쪽). 1개월 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昌에게 패했지만 昌을 압도하는 지지율에 고무돼서인지 이 지사 얼굴엔 자신감이 넘친다. 이날 만남이 좋은 결과를 낳을 리 만무했다.


정무수석이 나서 ‘反昌’ 운동

 

제15대 대선 당시 김영삼(YS) 대통령의 ‘이인제(IJ) 지원’은 한국 현대 정치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건’의 바탕이다. YS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역사의 교훈이라는 점을 감안, 당시를 담담하게 회고했다. 

 

“조 수석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왔다. 급히 만나자고 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기에 내 오찬장소와 가까운 곳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본론’에 들어갔다. ‘昌이 (대선에 당선) 되기엔 글렀다’고 말했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대번에 알아챘다. 아들 병역 문제로 지지율이 어떠니 운운하면서 얘기를 더 이어가기도 전에 내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내 서슬에 놀란 그는 ‘총장님, 왜 이러십니까’하며 벌떡 일어서서는 출입문을 밀치고 ‘달아났다’.” 

 

박 전 의장은 “공당(公黨)이 정식 절차를 거쳐 선출한 후보를 바꿔치려는 시도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면서 “너무도 화가 나 조 수석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벌컥 했던 것”이라고 술회했다. YS의 IJ 지원과 관련, 이처럼 딱 떨어지는 중견 언론인의 증언도 있다.   

 

“9월10일로 기억한다. 이인제 의원으로부터 꼭 만났으면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방금 전 고려대 특강을 마쳤다는 IJ는 ‘(외부엔) 처음으로 얘기하는 것’이라고 전제, 자신의 출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왔다. 보다시피 昌은 아들들 병역 문제로 발목이 잡혀 중도하차하게 될 것이라며, 비단 아들들 문제뿐 아니라 허물이 될 다른 시비 요소가 숱하다고도 했다. 직답(直答) 대신 ‘YS는 어떠냐’고 묻자 IJ는 ‘그분 뜻도…, 다 알고 계신다’고 힘주어 말했다. ‘다 알고~’에는 昌의 약점뿐 아니라 당선 전망이 흐린 昌의 대안으로서 IJ 불가피성과 이 모든 것에 대한 YS의 ‘양해’를 함축하고 있었다(8월말 여론조사는 아직 출마 선언도 않은 IJ가 30% 이상으로 선두). 

 

IJ는 자신만만했다. 허세가 아니라, 당시 전후 상황은 그럴 법했다. ‘결행은 언제’라는 물음에는 ‘곧’이라고 했던 IJ는 사흘 뒤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IJ와 단둘이 대좌했던 중앙언론사 정치부 K 부장은 ‘병풍(兵風)’이 IJ와 YS의 오판(誤判)을 낳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고 말한다. 昌의 트레이드마크인 ‘대쪽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히는 ‘흑색선전’과, IJ를 부추겨 완주(完走)토록 한 DJ의 선거 전략은 완벽했다는 것이다.

 

 

자신만만 昌, 뒤늦은 ‘IJ 출마 포기’ 시도 허사

 

당선을 자신한 昌은 JP(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어찌 못하더라도 IJ와 박찬종은 붙잡아야 한다는 주위의 조언을 귀담지 않았다. ‘병풍’에 휘말려 지지율이 곤두박질 친 8월 하순 이후, 추석 무렵 昌 지지율은 DJ의 절반인 15%에 머물렀고, 회심의 카드로 여긴 DJ 비자금 의혹을 터뜨린 20일 뒤엔 DJ 지지율의 3분의 1 수준 이하(35대10)로 떨어졌다. IJ 지지율 절반에도 못 미쳤다. DJP연합에 대응해 조순 민주당 후보와 단일화를 이뤘지만, 11월10일을 전후한 지지율도 DJ와는 5대3, IJ와는 5대4의 열세를 면치 못했다. YS가 ‘딴맘’을 먹을 만했다. 후끈 달아오른 昌은 ‘구악(舊惡)’의 상징으로서 ‘3김 청산’을 외치는 한편 IJ 설득에 나섰다. 구치소에 수감 중인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에게까지 지원을 요청했다.

 

“昌의 친동생 회성씨가 특별면회를 왔다. IJ가 출마를 포기하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IJ가 ‘아직’은 그런대로 순항하고 있지만 결국 DJ한테 좋은 일만 시키는 결과가 될 게 빤함을 알기에 수락했다. 집히는 데가 있어서다. IJ 캠프 재정을 맡은 김운환 의원이 있었고, 그를 통하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김 의원은 내 말을 거부할 처지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작업’을 위해 내가 사흘만 ‘외출’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고맙다’며 자리를 떴던 회성씨는 이후 연락이 없었다.” 홍 전 수석은 자신의 ‘외출’조차 성사시키지 못한 것은 바보짓이라고 회상한다. 홍 전 수석의 이 같은 장담에는 IJ와 김운환 의원은 자신의 제의를 뿌리칠 수 없다는 확신이 자리하고 있다(홍 전 수석은 YS가 대통령 당선 뒤 대기업들로부터 받은 이른바 ‘당선 사례금’을 총괄한 ‘큰손’. 총무수석 이전부터 YS의 신임 아래 비자금을 관리한 홍 수석이기에 그의 신세를 지지 않은 여야 정치인이 별로 없었다. 이런 점이 사욕을 부리지 않았다는 사실 등과 함께 지금도 ‘대접’을 받게 하는 이유. 그는 금융실명제 실시 전 거액을 안기부 계좌에 넣어 보관했고, 이게 후일 ‘안기부 비자금’으로 알려진 돈이다).

 

11월 초순까지만 해도 昌을 앞지르던 IJ의 질주는 하순 들면서 제동이 걸렸다. 위기의식이 보수 지지층에 확산됐고 ‘정통 후보’는 역시 昌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인기가 하락한 YS가 지원하는 IJ에 역풍이 몰아친 탓도 있었다. 12·18 대선 전 마지막 여론조사(11월25일)에서 昌은 DJ에 1% 미만의 오차 범위까지 따라붙었다. DJ와 昌이 30%대를 웃돌 때 IJ는 20% 아래로 처지면서 2강(强) 1중(中) 구도가 그려졌다.

 

“이인제만 주저앉히면 되겠다 싶었다. IJ의 핵심 ‘꼬붕’인 김운환을 불렀다. 대선 나흘 전, 그러니까 IJ가 부산에서 막판 대규모 유세를 벌이기 전인 14일이다. 그에게 ‘이인제가 당선될 것 같나’고 묻자 그는 ‘되긴 뭘 돼요. 턱도 없지요’라고 답했다. ‘그럼 왜 생고생하느냐’고 되물으니 ‘그래야 뭔가 보장받지 않느냐’고 대꾸했다. ‘그렇다면 후보 사퇴시켜라. 내가 국회의장이건 당 대표건 책임질게’라고 다짐을 줬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섰다. 昌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昌 부인 한인옥 여사는 ‘너무 피곤하게 주무시므로 깨울 수가 없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그 시각에 전화를 걸 리도 없겠지만 이땐 앞뒤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무슨 말이오. 빨리 바꾸세요’하고 다그치자 昌이 나왔다. ‘(선거 상황이) 어렵다. 단 한 가지 방도가 있다. 이인제 사퇴다. (그게 되겠냐는 昌 질문에) 해보겠다. 모든 (협상) 권한을 내게 달라. 국무총리건 뭐건 원하는 자리를 약속하고 양보를 받아내 보겠다.’ 내일(실제는 오늘)이 지나면 모든 게 끝이니 단안을 내려달라.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지만) 昌은 협상을 전적으로 위임하겠다고 했다.” 당시 부산 지역을 책임지고 부산에 진을 쳤던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전언이다. 이전엔 이런 건의를 단박에 물리친 昌이지만 다급하자 달라진 것이다.

 

 

유세 청중에 홀린 IJ, 朴 의원과 만남 자체 피해

 

“김운환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 들어주겠으니’ 전하라고 했다. 그는 반색했다. 부산 유세를 끝내는 즉시 김 의원이 IJ와 함께 내가 기다리는 A호텔에 오기로 약속이 됐다. 그러나 IJ는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유세가 길어진다는 보고를 받고 그러려니 했는데, 자정이 30분이나 지나서 온 것은 김 의원의 전화다. ‘박 총장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까 IJ가 (아까와 달리)말을 바꿔 ‘내가 왜 가냐’며 거부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곤 자신의 유세버스를 타고는 다음 행선지 울산으로 향했다고 했다. 운집한 청중과 이들의 뜨거운 함성에 IJ가 잔뜩 고무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IJ가 ‘선거가 끝났다(‘이긴 것이나 진배없다’는 뜻)’고 여기더라는 말도 했다. 이젠 다 틀렸구나 싶었다.” 박 전 의장은 DJ가 부산은 물론 외지의 지지자들에게까지 총동원령을 내려 IJ 유세장에 나가도록 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털어놨다. DJ가 IJ의 중도하차를 막기 위해 엄청난 인파와 환호로 IJ를 흥분시켰고, 그 계산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울산으로 달려가 IJ 숙소에서 그를 만났다. IJ는 의기양양했다. 그때 부산 유세장에는 보이지 않던 IJ 부인 김(은숙) 여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당선자 부인’ 같았다. 호남에서의 ‘환대’에 이은 부산 유세의 ‘대성공’으로 당선을 확신한 듯했다.” 박 전 의장이 전한 김운환 의원의 상황설명이다. 박 전 의장은 훗날 IJ에게 “왜 막판 협상을 거부했느냐”고 묻자 “협상 얘기를 못 들었다”고 하더라고 했다. 박 전 의장은 IJ의 변명일 뿐, 김운환 의원이 그 중차대한 협상제의를 가로막을 리는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1997년 11월18일 시사저널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주최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 참석한 김대중 국민회의·이회창 신한국당·이인제 국민신당 후보(왼쪽부터)


선거의 核(핵) 대결구도와 제3후보

 

제14대 대선 때도 보수 색깔의 제3당 후보가 있었다.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그다. 방대한 자금력과 조직력의 현대그룹을 배경으로 한 정 후보는 민자당 김영삼(YS) 후보를 위협했으나 득표율 16.3%, 388만 표가 한계였다.

 

그런데 제15대 대선에서 제3당(국민신당) 이인제(IJ) 후보는 499만 표를 얻었다. 새정치국민회의로 간판을 바꾼 DJ 후보의 당선을 사실상 ‘보장’한 셈이다. 인기가 바닥을 헤맸다지만 현직 대통령의 IJ 지원사격은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고, 특히 여당 후보 昌의 영남표 독식 차단에 결정적이었다. IJ 파괴력이 14대 대선의 정주영을 훨씬 능가한 이유다. YS의 정치 고향 PK(부산·경남)는 2대1 비율로 IJ에게 표를 나눠줬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당과 ‘잠룡’들이 복잡한 셈법을 하는 가장 큰 이유도 이런 경험에서 비롯한다. 뚜렷한 선두 주자가 없는 가운데 ‘고만고만한’ 후보군의 각축은 ‘경우의 수’를 배가시킨다. 그만큼 예측을 불허한다는 얘기다. 때문에 ‘권력 분점·공유’가 내년 12월20일에 치러질 대선의 기본 개념이 되리라는 데 많은 이들의 전망이 일치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절충·제휴 협상이 여의치 않으면 ‘유력한’ 제3후보가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15대 대선전을 자꾸 리뷰하게 하는 소이(所以)다.

 

대결 구도에 따라 대선전 진행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므로 구구한 게 당연한데 이런 혼미 양상에서 핵심은 영남의 양대 축 TK(대구·경북)와 PK의 향배다. TK와 PK, 이들이 충청 및 호남과 어떤 조합을 이루느냐가 게임의 관건이다. 특히 TK를 본향으로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 하락과 ‘후보 난립’, PK 출신 문재인 전 대표가 더불어민주당 유력 주자로 부각되면서 ‘제19대 대선 방정식’을 더 난해하게 만든다. 이런 요소가 권력분점을 전제한 이원집정부제 개헌이 힘을 얻는 배경이지만, 대통령이 나설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국회 주도의 개헌은 난망이다. 여당이 러브콜을 보내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나 PK를 근거지로 하는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 호남이 기반인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 등의 연대·제휴 가능성이 두루 점쳐지는 것도 이런 상황의 소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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