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우리 5만원권을 찾습니다
  • 이성진 인턴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8.05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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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난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한국은행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문인이자 ‘현모양처’의 상징인 신사임당을 아로새긴 난 형제관계인 1만원권과 36살 터울이다.

한국은행은 날 1만원권보다 큰 덩치로 만들었다. 한국의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내 형제들인 1만원권과 5000원권은 점점 설 자리를 잃었다. 시중에서 쓰이는 화폐단위가 커지면서 고액권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 것이다. 애매한 화폐단위에 수표 친구들의 일자리는 늘어났다. 하지만 한번 사용 후, 폐기돼야하는 수표의 단점은 한국은행의 비용부담으로 이어졌다. 한국은행이 날 새롭게 디자인해 찍어낸 배경이다.

5만원권 환수율, 1만원권의 절반에도 못 미쳐

어느 순간부터 나와 같은 5만원권 친구들이 집에 잘 안 들어왔다. 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지폐 환수율을 살펴보면, 5만원권 친구들은 발행액과 대비해 올 상반기 50.7%를 기록했다. 2013년도 환수율은 48.6%, 2014년엔 25.8%, 2015년엔 40.1%에 그쳤다. 1만원권 형님들에 비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환수율이었다. 올해 상반기 1만원권 환수율은 무려 111.2%였다.
 


5만원권 화폐 발행잔액 상황을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화폐 발행잔액은 한은이 시중에 공급한 화폐 가운데 한국은행 금고로 다시 돌아온 금액을 빼고 현재 시중에 남아 유통되고 있는 현금이다. 올해 상반기에만 발행 친구들의 잔액이 전년대비 5조5197억이나 늘었다. 발행된 내 친구들(5만원권)의 잔액은 6월 말 기준 69조8433억원으로 전체 지폐발행 잔액(89조1276억원)의 78.4%를 차지한다.

우리 5만원권 친구들이 자꾸 사라지자, 세상에서는 우리가 지하로 숨어들어가 나오지 않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샌가 ‘상당량의 5만원 지폐가 장롱 속에 숨어있는 것 아니냐’ ‘기업인과 부자들의 비자금으로 쌓이고 있는 것 아니냐’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었다. 현금을 보유하거나 큰 금액이 오가는 시장거래에서, 덩치 큰 내가 1만권 형님보다 용이해서이기 때문일 테다.

어느 순간부터 난 ‘검은 거래’의 주범으로 몰렸다. 지난해 고(故) 성완종 경남기업 전 회장이 5만원권 친구들을 비타 500상자에 넣어 이완구 국무총리에게 3000만원을 전달했다는 주장이 나왔을 때도, 사람들은 날 비난했다. 다수의 뇌물공여자들이 우리 5만원권 친구들을 담뱃갑이나 비눗갑, 사과상자 등에 넣어 전달한 것이 드러나며 우리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나는 부정재산축적에 유용하게 활용되곤 했다. 2011년 전북의 한 마늘밭에서는 5만원권이 111억원 규모의 뭉칫돈 형태로 발견되기도 했다. 이 돈은 밭주인 이아무개씨가 처남의 ‘검은돈’을 집안에 숨겼다가 액수가 늘어나자 땅에 묻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씨의 처남이 불법사이트를 운영해 모은 돈이었다.

안정적 경제성장의 따른 금리인상이 해결책 


우리 5만원권 친구들이 집을 찾지 못하고 시장을 배회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과세당국은 실물화폐를 추적하는데 애를 먹는다. 우리에게는 꼬리표가 달려있지 않다. 각자 어디서 숨 쉬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재산신고에 따른 세금도 염려 안 해도 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재산을 보유하거나 옮길 때 우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나로 인해 불투명한 지하경제가 자리 잡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경제연구원들은 안정적인 경제성장만이 가출한 우리를 집으로 돌려보낼 것이라 말한다. 김창배 한국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부정과 비리의 일환으로 거래되는 5만원권은 어쩔 도리가 없다”며 “원활한 경제구조와 일정수준의 금리유지가 5만원권의 환수율을 높이는 근본적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영무 LG경제연구소 연구원도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그는 화폐 환수율을 높이고자 무조건적으로 금리 인상을 단행하는 건 옳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금리 인상은 현금보유에 대한 기회비용을 높일 것”이라며 “안정적인 경제사정에 따른 자연스런 예금금리 인상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우리를 보고 이제는 ‘5만원권 폐지론’마저 제기됐다. 우리, 이 세상에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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