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육상경기의 스탠드 풍경은 시대에 따라 변했다. 1990년대만 해도 성조기를 내건 미국인들은 마치 '육상은 우리의 것'이라는 얼굴로 즐거워하며 스타디움을 장악했다. 지금은 레게음악을 틀어놓고 리듬에 몸을 맡긴 채 자국 육상대표팀의 유니폼을 입은 자메이카 관중들이 대세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흥겹게 관람석을 차지하고 있다. 주변의 관중들도 춤을 추고 노래하는 이들을 보며 "뭐 어쩔 수 없지"라는 표정을 짓는다.
한때 육상의 꽃인 단거리 스프린트 종목을 지배했던 나라는 미국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메이카가 그 패권을 쥐고 있다. 관중석의 헤게모니 교체는 트랙의 권력 이동 탓이다. 2008년부터 이번 리우 올림픽까지 남녀 100m 금메달은 자메이카가 석권하고 있다. 특히 남자 100미터에 출전한 우사인 볼트는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100m 3연패에 성공했다.사실 자메이카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라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사인 볼트의 역할이 크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자메이카 출신은 세계 단거리 육상계를 평정하고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100m에서 9초79를 기록해 1위를 차지했지만 도핑으로 금메달을 박탈당했던 벤 존슨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그를 캐나다 선수로 알고 있지만 사실 태어난 곳은 자메이카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00m에서 우승했던 린포드 크리스티(영국)는 영국의 자존심으로 불렸지만 그 역시 자메이카 태생이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100m 우승자이며 한때 9초84의 세계 기록을 보유했던 도노반 베일리(캐나다) 역시 자메이카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모두 육상을 계속하기 위해 젊었을 때 자메이카를 떠나 다른 국가로 이주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처럼 카리브해에 자리한 인구 280만명의 작은 나라에는 유독 스프린트에 자질 있는 젊은이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다. 세계 스포츠계가 주목할 만한 부분이었다.
마이클 존슨이 거슬러 올라간 ‘빠름의 비밀’자메이카의 뿌리는 아프리카에 있다. 16세기 스페인령이 된 자메이카는 부족한 노동력을 서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데리고 오며 조달했다. 현재 국민의 대다수는 이들의 후예다. 과거 미국 CBS 뉴스캐스터가 "육상에서 우수한 흑인 선수가 많은 것은 노예 제도 때문"이라고 발언했다가 커다란 반발을 사고 퇴출된 적이 있을 정도로 어떻게 보면 민감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점은 이제 자메이카 내에서도 인정한다. 자메이카를 세계적인 육상 강국으로 만드는 데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는 하워드 애리스 전 자메이카 육상연맹(JAAA) 회장은 현직에 있을 때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식민지 시대에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나이지리아와 가나 등 서부 아프리카에서 노예가 건너왔고 우리 국민의 90%가 그 자손이다. 우리의 신체 능력이 우수한 점은 거기에서 유래하고 있다."케냐와 에티오피아 등 장거리 종목에서 좋은 선수를 많이 배출하는 동아프리카 지역은 고도가 높고 날씨가 시원한 편이다. 반대로 서부 아프리카는 낮은 고도에 더위가 무척이나 강한 게 특징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주민들은 이곳에 정착하고 지내면서 땀을 빨리 배출하기 위해 몸의 표면적이 점점 넓어졌다. 점점 그렇게 표면적이 넓은 근육질의 몸으로 변화되어 갔다고 한다. 이런 몸의 적응력 탓에 스프린트에 어울리는 사람들 역시 증가하게 됐다. 이처럼 스프린트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신대륙으로 건너오면서 더욱 혹독한 과정을 겪었다. 우사인 볼트가 육상 단거리를 석권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로 불리던 사람이 마이클 존슨(미국)이었다. BBC는 마이클 존슨과 함께 그의 뿌리를 찾아가는 다큐멘터리 'Michael Johnson: Survival of the Fastest'를 만들었다. 마이클 존슨은 자신의 출생지인 텍사스주 댈러스의 공공도서관을 찾아 아버지의 조상이 1800년대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을 알게 된다. 이를 계기로 존슨은 미국 전역과 자메이카을 직접 찾아 육상 선수와 역사학자 등을 만나며 자신의 뿌리, 그리고 흑인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간다. 자신의 빠름의 원천을 찾아가는 작업이었다.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잡힌 흑인들은 배에 실리는 아프리카 서부 해안까지 남녀노소 관계 없이 밧줄로 연결된 채 며칠 동안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배에 오르고 나서는 뜨거운 선실에 밀집해 넣어졌고 마치 수화물처럼 끼인 채 오랜 시간을 지내야 했다. 물과 식량이 부족한 환경이었고 혹시나 사망하게 되면 바다에 버려지는, 그런 취급을 받으며 몇 주를 인내해 대서양을 건넜다. BBC의 다큐는 이렇게 말했다. "노예로 신대륙에 끌려온 흑인들은 살아남은 시점에서 이미 신체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었던 셈"이라고. 자메이카는 이런 흑인들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일종의 집합지 같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