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 망명을 두고 영국 언론은 ‘스파이 소설’을 쓰고 있다”
  • 권석하 영국 통신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8.29 09:01
  • 호수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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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호 망명 사건’ 관련 추측 보도 난무

영국에 있어 한국은 변방이어서 그런지 태영호 영국 주재 북한공사 망명을 다루는 영국 언론 기사는 읽다 보면 무성의하고 부정확하다. 동서냉전 시대에나 있었음 직한 ‘스파이 소설’ 같은 망명 사건이 오랜만에 영국에서 벌어졌으니, 이곳 언론이야 흥미 위주로 기사를 쓰긴 하겠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인터넷으로 간단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기사를 쓰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세계적 명성을 가진 가디언, BBC, 텔레그래프, 데일리 메일 등의 수석 외신기자 혹은 외교 전문기자들이라니 한국인 입장으로서는 다소 안타깝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기사들이 망명한 태 공사가 귀순 또는 탈북한 외교관 중에서도 가장 고위직이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미 1996년 장승길 주이집트 북한대사가 미국으로 망명한 전례가 있다. 7개의 침실과 2개의 거실을 갖춘 북한대사관의 침실 개수를 언론마다 다르게 보도하고 있다. 현재 228만 파운드인 대사관 부동산 가격을 13년 전 구입 당시 가격으로 그대로 표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방 숫자, 현 시가, 과거 매매가격 등은 인터넷에 북한 대사관 주소(73 Gunnersbury Avenue W5 4LP)를 검색하면 간단히 나오는데 그런 기본적인 과정마저 확인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렇게 시작된 태 공사 망명 관련 영국 언론 기사에 대한 필자의 불신은 한국 언론을 비롯해 세계의 모든 언론이 인용한 ‘선데이 익스프레스’ 마르코 잔안젤리(Marco Giannangeli) 기자의 기사까지 번졌다. 그는 자신의 기사를 ‘그레이엄 그린’ 작가의 스파이 소설 같은 특종이라고 표현했는데, 필자가 기사를 자세히 살펴보니 마치 기사가 직접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쓴 것처럼 너무 자세해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주류 언론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 일간지 기자가 어떻게 사건이 난 지 며칠도 안 돼 이런 고급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을까’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 기자의 기사를 한국 언론을 비롯해 세계 많은 언론이 인용했기 때문에 보다 더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그래서 필자는 잔안젤리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내봤다. 메일을 통해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보통 이런 종류의 정보기관이 개입된 작전은 오랫동안 비밀로 유지되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공개가 됐나’ ‘공사라면 그렇게 고위직도 아닌데 어떻게 영국 총리나 장관들이나 쓰는 특별기 BAe146이 뜨고 거기다가 공군 전투기 타이푼 2대가 호위를 할 수 있었나’ ‘생사가 달린 심각한 귀순 길에 골프채와 테니스채가 웬 말이고 막스앤스펜서 슈퍼마켓 식품 쇼핑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정보인가’.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귀순한 태영호 공사가 근무했던 영국 런던의 북한대사관 앞에서 8월17일(현지 시각) 한 카메라 기자가 촬영하고 있다.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귀순한 태영호 공사가 근무했던 영국 런던의 북한대사관 앞에서 8월17일(현지 시각) 한 카메라 기자가 촬영하고 있다.

 

‘프리엔케이’ 발행인 “추측성 기사” 일침

 

필자는 이메일 막판에 ‘분명 당신이 기막힌 상상으로 소설을 쓴 것이 아니냐’는 식의 무례한 질문도 덧붙였다. 이런 이메일을 보냈던 이유는 나로서도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우연히 영국에서 북한 관련 ‘프리엔케이 신문’을 발행해 온 김주일 국제탈북인연대 사무총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태 공사 망명 관련 선데이 익스프레스 기사에 단 다음과 같은 댓글을 보게 됐다. ‘추측성 기사입니다. 그래서 영국 메이저 신문들은 다루지 않습니다. 영국에도 가끔 수준 낮은 기자들 있습니다.’

 

이 댓글을 보고 정말 그 기사에 대한 의심이 더 강력하게 생겼다. 결국 생면부지의 김 총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해서 만났다. 그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한국 언론의 취재원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김 총장은 인터뷰에서 태 공사는 영국 정보기관이 아닌 한국 대사관과 접촉했고 독일이 아닌 영국에서 한국으로 바로 들어갔음이 분명하다고 잘라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잔안젤리 기자에게서 답신이 왔다. 그는 “해당 기사는 절대 소설이 아니고 자신은 국방과 외교 전문기자라 이번 작전에 직접 개입된 정보 관련 고위층으로부터 받은 정보이며 기사의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영국 정보 당국이 이렇게 빨리 정보를 공개한 이유는 성공적인 작전에 대한 공로(credit)를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필자가 의문을 가졌던 골프채와 테니스채는 운동을 핑계로 몸만 빠져나오기 위해 소지한 것처럼 해명했다. 쇼핑은 공사 부인의 특별 요청으로 거의 몇 분 만에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고 한다. 잔안젤리 기자는 공사 직위 수준에 맞지 않는 거창한 항공편 지원도 영국과 미국이 태 공사의 결정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은 증거라 했다.

 

 

잔안젤리 기자 “모든 내용 사실” 반박

 

이제 태 공사의 골프 이야기를 좀 해 보자. 2005년 7월 일부 한국 언론에 리용호 주영 북한대사(현 북한 외무상)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 5명의 골프 열풍이 간략하게 보도된 바 있다. 태 공사는 당시 일등서기관이었고 골프 멤버의 일원이었다. 그때 북한 외교관들을 골프 지도한 것이 영국 교민인 제이 권 골프 티칭프로(64)였다. 이들을 6개월 정도 가르친 권 프로는 특히 태 공사가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고 그래서 골프 매력에 흠뻑 빠지기 시작했다고 기억한다. 권 프로는 리용호 현 외무상의 딸 은별양도 골프를 가르쳤는데 은별양이 평양에 있는 엄마와 오빠가 보고 싶다고 우울해하는 것이 기억난다고도 했다. 당시에도 리 대사는 가족 전원을 동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태 공사는 아주 남자답고, 의리 있고 통솔력과 지도력까지 갖추고 있어 범상치 않았다고 기억했다.

 

더군다나 윗사람에 대한 충성심이 특별났는데 한번은 골프 연습을 하던 중 다른 직원들이 좀 떨어져서 연습을 하는 리 대사에 대해 빈정거리는 말을 하자 태 공사가 정색을 하고 야단을 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리영호 대사도 예의 바르고 인자한 선비 스타일이었다고 권 프로는 기억한다. 권 프로에게 북한 대사관 직원들 골프 지도를 부탁한 교포 사업가가 한국 기자들과 식사 중에 비보도를 전제로 전한 북한 외교관 골프 연습 이야기가 한국 언론에 보도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래도 북한대사관은 골프연습을 중단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서 계속했다. 그래서 정해진 약속 장소에 나가면 차창에 진하게 선팅이 된 차가 와서 권 프로를 태우고 다른 곳으로 가게 됐는데 사실 겁이 좀 나긴 했다고 한다. 첫날 차에서 내리니 리 대사가 “권 선생, 겁이 나셨지요?”라고 웃으면서 말을 건네는데 그 태도가 아주 은근하고 따뜻해서 흡사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고 권 프로는 기억한다. 흥미로운 점은 어느 날 당시 일등서기관이던 태 공사가 “권 선생, 골프 학습비를 받으셔야지요?”라고 하면서 영국 투자회사 영국인 간부 명함을 하나 넘겨줬다. 거기에 전화를 해서 골프 레슨비를 받았는데 내용을 알고 보니 그 영국 회사는 당시 동해 유전 개발에 개입돼 있어서 북한대사관의 경상경비를 충당해 주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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