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소문’에 기댈 수밖에 없는 독립영화의 악전고투
  • 나원정 ‘매거진 M’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9.07 11:05
  • 호수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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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작 《범죄의 여왕》 《최악의 하루》의 ‘대작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분투기

올여름 흥행작은 다 챙겨본 대학생 구아무개씨(22). 주말 영화 관람을 위해 예매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당황했다. 즐겨 찾는 멀티플렉스 극장에선 이미 본 영화들이 여전히 상영관을 장악하고 있어서다. 평일 퇴근 후 저녁, 모처럼 극장을 찾은 김아무개씨(33)는 한 ‘다양성영화’(상업영화의 상대적 개념으로 독립예술영화와 저예산영화를 아우른다)의 색다른 줄거리에 끌렸다. 그러나 낮 상영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보려면 자정 너머까지 기다려야 할 판. 결국 상영시간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는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고 말았다.

 

최근 극장가에선 이런 풍경이 허다하다. 국내 대형 투자·배급사들의 대작 영화가 줄줄이 흥행하면서 장기간 상영관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적인 폭염이 기록적인 흥행을 낳은 걸까.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7~8월 관객 수는 5517만 명. 동기간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특히 한국영화의 힘이 셌다. 좀비 액션 영화 《부산행》이 올해 첫 ‘천만 영화’로 등극한 게 신호탄이 됐다. 반공 영화 논란이 오히려 관객 동원의 불씨가 된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조선 마지막 황녀의 비사를 그린 《덕혜옹주》가 잇달아 관객 600만 명과 500만 명의 문턱을 넘어서며 흥행 바통을 이어갔다. 터널 붕괴 참사를 다룬 후발주자 《터널》의 기세도 무섭다. 9월1일 현재까지 이 영화의 관객 수는 총 654만 명. ‘빅4’ 네 편의 관객 수만 도합 3040만 명이 넘는다. 

 

영화 《범죄의 여왕》 © ㈜콘텐츠판다


《님아, 그 강을~》 《워낭소리》, ‘입소문’ 흥행 

 

여기서부턴 단순한 산수다. 앞서 언급했듯 7~8월 국내 총 관객 수는 5517만 명. 《나우 유 씨 미 2》 《제이슨 본》 등 외화와 한국영화를 통틀어 7~8월 박스오피스 10위권 흥행작들의 관객 수는 약 4512만 명에 육박한다. 그런데 같은 기간 개봉작 총 편수는 236편이다. 226편의 영화가 나머지 약 1000만 명의 관객을 두고 싸웠다는 얘기다. 당연한 소리지만, 박스오피스 10위권 밖 영화들도 저마다 체급이 다르다. 최대 716개 스크린에서 106만 관객을 모은 제작비 1억8500만 달러(약 2068억원)짜리 할리우드 대작(《스타트렉 비욘드》)이, 단돈 1300만원으로 제작해 최대 10개 스크린에서 관객 1000명이 다녀간 한국 독립영화(《시발, 놈: 인류의 시작》)와 맞붙는다. 한 투자·배급사 관계자는 “요즘은 대작과 다양성영화 관객층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극장에서 선택받은 영화만이 살아남는다”고 귀띔했다. 전국의 스크린 수는 약 1500개 남짓. 최근 들어 특정 대작 영화가 개봉 첫 주말 1000개 이상 스크린을 독점하는 건 예삿일이 된지 오래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규모가 작고, 스타가 부재한 독립예술영화들의 악전고투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CGV아트하우스
극과 극으로 양분된 시장에서 이변을 일으키는 건 늘 ‘입소문’이다. 2009년 늙은 소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로 200만 관객을 울린 다큐멘터리 《워낭소리》부터 2010년 눈물겨운 백수의 취업 성공기로 97만 관객과 통한 김인권 주연의 《방가? 방가!》, 2년 뒤 관객 400만 명의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역대 국내 다양성영화 부문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다큐멘터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까지. 영화를 본 관객들의 자발적인 입소문은 극장들이 알아서 스크린 수를 더 늘릴 만큼 폭발적인 뒷심을 발휘했다.

 

올여름 대작들의 격전장에도 ‘입소문 난’ 개성 강한 수작들이 나왔다. 8월25일 나란히 개봉한 《범죄의 여왕》과 《최악의 하루》다. 《범죄의 여왕》은 100만원이나 나온 수도요금을 단서로, 서울 신림동 허름한 고시촌의 살인사건을 파헤친 블랙 코미디. 《1999, 면회》 《족구왕》 등으로 동시대 청춘들의 ‘웃픈’ 현실을 담아낸 젊은 영화인들의 창작집단 ‘광화문시네마’의 세 번째 작품으로 또한 주목받았다. 중견 여배우 박지영을 주연으로 내세워, 개봉 전 시사회부터 폭넓은 연령층의 지지를 받았다. 《최악의 하루》는 단편 시절부터 남녀 간의 감정을 그려내는 섬세한 감수성으로 각광받은 김종관 감독이 5년 만에 선보인 장편 로맨스 영화.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청춘시대》로 인기를 끈 한예리와 지난해 한국 독립영화계의 히트작 《한여름의 판타지아》로 얼굴을 알린 일본 배우 이와세 료 등이 주연을 맡아 여성 관객들의 호응이 높았다. 두 영화 모두 포털 사이트에서 10점 만점에 8점을 웃도는 관람 후 평가를 받을 만큼 완성도 면에선 합격점을 받았다. 개봉 첫 주를 맞은 지난 주말(8월28일)까지 각각 3만 명 남짓한 관객을 모으며 다양성영화 주말 박스오피스 2위(《최악의 하루》)와 3위(《범죄의 여왕》)에 안착했다. 그러나 개봉 2주 차에 접어든 지금, 두 영화의 희비는 엇갈리고 있다. 

 

개봉 전 호평으로 흥행을 예상했던 《범죄의 여왕》은 개봉 이틀째인 금요일(8월26일) 개봉관 수를 최대 270개까지 잡았다. PNA(Print & Advertisement, 홍보·마케팅·유통 등에 드는 비용)도 3억5000만원까지 썼다. 이는 순제작비 4억원의 저예산 영화로선 상당히 큰 개봉 규모. 손익분기점 관객 수는 약 20만 명으로 치솟았다. 그러나 관객 수가 생각만큼 들지 않자 “토요일(8월27일)부터 바로 상영관이 떨어져 나갔다”고 광화문시네마 김보희 프로듀서는 토로했다. 그는 “40대 이상 관객층의 호응이 좋은 영화인데, 이 연령대 관객들은 극장을 찾아가 현장에서 표를 산다. 미리 인터넷 예매하고 상영관을 찾는 30대 이하 관객들과 달리, 극장에 갔는데 맞는 상영시간대가 없으면 관람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개봉 첫 주부터 접근성이 나쁜 시간대로 교차상영이 시작되자 허탈하더라. 모든 스태프가 2~3년간 열심히 준비한 영화가 관객을 만나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광화문시네마가 준비 중인) 차기작은 제작비를 더 줄여야 하나 벌써부터 고민이 크다”고 했다. 

 

영화 《최악의 하루》 © CGV아트하우스

“결국 스크린의 안정적 유지가 관건”

 

대작에 비해 홍보가 어려운 다양성영화의 경우, 개봉 2~3주 차에 관객 반응이 뒤늦게 달궈지는 경우도 많다. 수년 전만 해도 장기 상영을 통해 뒷심을 발휘하는 깜짝 흥행작들이 생겼지만,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첫 주말도 아닌, 개봉 첫날 바로 호응이 있지 않으면, 개봉 2주 차 상영관 확보는 보장하기 힘들다. 《범죄의 여왕》 역시 2주 차 주말(9월3~4일) 감독·배우들이 무대인사를 돌며 표심을 끌어올릴 계획이지만, 상영회차가 줄고 상영시간대가 열악하리란 건 이미 각오하고 있는 바다. 

 

《최악의 하루》는 비교적 나은 경우다. 《범죄의 여왕》과 이 영화 둘 다 각각 ‘콘텐츠판다’와 ‘CGV아트하우스’라는 대형 투자·배급사가 관여하고 있다는 점은 같지만(콘텐츠판다는 투자·배급사 ‘NEW’, CGV아트하우스는 CJ E&M의 계열사다), CGV아트하우스는 CJ CGV 멀티플렉스 내에 자체 상영관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하루》의 개봉 첫 주 스크린 수는 200개 남짓. 《범죄의 여왕》보다는 적지만, 상영시간대는 더 전략적이다. 평일에 혼자 보는 관객이 많다는 것에 착안, 주말보다 평일 상영회차를 늘렸다. CJ CGV 멀티플렉스에선 비교적 고른 시간대에 상영되고 있다는 것도 꾸준히 관객을 모으고 있는 비결이다. 

 

이 영화의 순제작비는 3억여원. 이 영화를 홍보하고 있는 영화사 무브먼트 진명현 대표는 “20~30대 여성 관객의 선호도가 높은 것을 감안해, 포스터 등을 가급적 예쁘게 꾸미고 인스타그램 등 SNS 홍보에 집중했다. PNA 비용을 가급적 줄여, 손익분기점은 8만~10만 명에 맞췄다”고 했다. 개봉 일주일 만에 관객 수가 그 절반에 가까운 4만 명에 육박했으니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진 대표는 “배급사가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어 안정적으로 입소문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귀띔했다. 다양성영화의 흥행도 결국 스크린을 얼마나 전략적으로, 안정감 있게 유지하느냐에 달렸다는 얘기다. 

 

영화 《워낭소리》 © 인디스토리

한 독립영화 프로듀서는 대작들의 틈바구니에 치여 제대로 상영조차 되지 않는 다양성영화의 현실에 대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이대로 가다가는 개성 강한 작은 영화들은 설 자리가 없다”고 토로했다. 반면 극장들은 “개봉 영화가 너무 많아 상영시간을 나눠주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아직은 “시장의 논리에 맡겨야 한다”는 쪽이 우세하지만,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극장이 흥행의 패권을 쥔 지금의 상황을 그대로 두고 봐서 될 일일까. 대책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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