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겨울 오는 걸 힘으로 막으려 한다”
  • 박혁진 기자 (phj@sisapress.com)
  • 승인 2016.09.08 20:00
  • 호수 140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근혜 정부의 레임덕 징후 네 가지

여당은 대통령에게 탈당을 요구하며 거리를 두려 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칼’을 휘두르던 사정기관의 일사불란함은 찾아볼 수 없다. 정보기관 내부에서 줄서기가 심화되고, 공무원 사회에서 더 이상 대통령의 ‘영(令)’이 서지 않는다. 모두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인지에만 관심을 가질 뿐, 현 대통령이 무엇을 하든 큰 관심도 없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울 마음도 없다. 자연스럽게 대통령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고 ‘국가’는 ‘절름발이 오리’처럼 뒤뚱뒤뚱 걷게 되는 불균형이 발생한다. ‘레임덕’이 시작되면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레임덕(lame duck). 사전적 의미로는 ‘다리를 절뚝이는 오리’이지만 정치에서는 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역대 어느 정부도 이 레임덕 현상을 피해 가지 못했다. 다만 레임덕이 가속화된 시점만 달랐을 뿐이다. 대체적으로 집권 4년 차와 5년 차에 친인척 비리가 터진 것이 레임덕의 신호탄이 됐다. 박근혜 정부도 어느덧 레임덕의 ‘타이머’가 울리는 시기인 집권 4년 차 중반을 넘어섰다.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은 ‘레임덕’이란 말을 극도로 싫어한다고 한다. 박 대통령을 비교적 잘 아는 한 정치권 인사는 “제왕적 대통령제에 익숙한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레임덕이란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레임덕이란 반대세력이 정부를 흔들기 위해 가져다 붙이는 ‘레토릭’ 정도로만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이런 바람과 달리 레임덕의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아직은 아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지만, 대체적으로 “이미 시작된 레임덕을 대통령이 억지로 막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한다. 시사평론가 유창선 박사는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이미 민심이 이반된 것은 분명한 것 같고, 다만 대통령이 여당과 사정기관 등을 억지로 장악해 레임덕을 막으려 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8월29일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청와대 제공


▒ 청와대 내부 무너진 기강

 

레임덕을 나타내는 직접적 표지(標識)는 공직사회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다. 특히 청와대라는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보좌하는 곳에서 기강이 서지 않는다면 이는 가장 확실한 레임덕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징후는 최근 우병우 민정수석의 신병 처리 문제를 놓고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처가 재산 문제가 불거졌을 때 여론에서는 우 수석이 사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흐르자 청와대 인사파트에서 이와 관련한 대책을 대통령에게 보고해야했다. 그러나 우 수석 보고서를 들고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할 비서실장 포함 수석비서관들이 아무도 직보(直報)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굳이 나서서 까다로운 문제를 책임지고 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 결국 한 수석비서관이 이를 보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야말로 기강이 무너진 대통령 비서실 모습이 그대로 노출됐다는 후문이다. 

 

공직기강을 책임져야 할 민정수석실도 비슷한 분위기다. 정부 부처에서 파견된 한 청와대 직원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 대통령이 퇴임할 때까지 함께 가는 이른바 ‘순장조(殉葬組)’로 남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병우 사태 후) 순장조로 남았다가는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게 생겼다. 하루빨리 청와대를 떠나 (원래 소속됐던) 부처로 돌아가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민정수석실 내부에서조차 “공직기강을 다잡아야 하는 민정수석이 검찰 조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공직자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겠느냐”며 “우 수석이 자진해서 사퇴하는 게 낫다”는 말까지 오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사원이 이번 추석부터 올 연말까지 시행하기로 한 ‘공직기강 100일 집중 감찰’ 역시 레임덕의 방증이다. 감사원 측은 이번 감찰이 “공직자가 연루된 뇌물 비리, 막말 파문, 성범죄 등 공직기강 해이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한 데 따른 조치”라고 밝혔다. 하지만 감사원 내부에서는 레임덕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분위기가 강하다.

 

▒ 여당 내 권력지형 변화

 

레임덕이 시작되면 여당은 인기가 없어진 대통령과 선을 그으려 한다. 현재의 여권 지형도 그렇게 변하고 있다. 친박과 비박으로 나뉘어 싸우던 새누리당에서 제3지대를 모색하는 의원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친박의 깃발 아래 모이던 물밑조직들의 ‘세(勢)’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흡사 2006년 말 열린우리당 내 자중지란이 이어지다 결국 민주당과 분당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레임덕이 가속화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여당 내 친박과 비박계 간 분열은 이미 지난 4·13 총선을 계기로 극에 달했다. 총선 패배의 원인이 청와대와 친박계의 공천 횡포라는 쪽에 무게가 실리면서 친박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나마 8월9일 전당대회에서 친박으로 분류되는 이정현 대표가 당선되면서 내분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착시현상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이 대표가 당선되는 과정에서 청와대와 친박계의 위기감이 그대로 드러났고, 이것이 레임덕의 또 다른 증거라는 것이다. 실제로 새누리당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는 지난 총선에서 친박 후보들을 밀었던 물밑조직 중 상당수가 비박계 주호영 후보를 밀었다고 한다. 비록 주 후보가 패배하기는 했지만 굳건했던 친박 지지층에 균열이 생겼다는 의미다. 

 

친박 의원들 사이에서도 미묘하게 분위기가 엇갈리고 있다. 특히 우 수석의 거취 문제를 놓고 친박 의원 중 일부가 청와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형국이다. 친박으로 분류되는 정우택 의원은 “현직 민정수석이 검찰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당연히 합당치 않다”며 “우 수석이 스스로 거취 문제를 판단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우 수석을 압박했다. 친박 핵심으로 분류되는 김도읍 원내수석부대표도 “현직 민정수석이 검찰의 수사 대상으로 있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상당히 고민이 된다”며 “우 수석이 억울한 면도 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대통령께 정치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본인의 거취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주군에 대한 ‘로열티’로 똘똘 뭉친 친박 의원들 사이에서 이런 다른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정권 중반까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김수남 검찰총장이 2월1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회의실에서 열린 전국 검사장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국정원, 고위직 줄서기 심화

 

정권 말이 되면서 국정원 내부에서 최근 야당 쪽에 줄을 대려는 고위직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국정원에서도 내부 단속에 열을 올리고 있는 분위기. 국정원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인사에 따르면, 지난 5월 있었던 북한 리영길 전 총 참모장 오보와 관련해 국정원 내부에 문책 인사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2월10일 국내외 언론은 리 전 총참모장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속보로 전하고, 일부 언론들은 이를 사설로까지 다룬 바 있다. 그런데 처형당했다는 리 전 총참모장이 5월초 북한 방송에 얼굴을 드러내면서 오보임이 확인됐다. 곧바로 통일부와 국정원의 책임론이 불거졌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국정원 북한 관련 파트에서는 대대적 문책이 뒤따르는데, 5월 이후 이 문제와 관련해 별다른 문책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가뜩이나 내부 단속 문제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직원들의 불만을 불러올까 우려한 국정원 윗선의 판단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비슷한 시기 있었던 인사에서도 국정원 대변인실 고위 관계자가 1급 자리인 경기지부장으로 영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전례가 없던 일로 국정원에서 내부 동요를 막기 위해 직원들에게 보여주려는 당근책의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전직 국정원 직원은 “최근 박근혜 정부 국정원에서는 신입 교육을 할 때 자나 깨나 정치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교육하는데, 정작 이명박 정권을 지나면서 고위직들의 정치지향은 더욱 심해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야당에 줄을 선다는 얘기가 국정원 밖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레임덕 현상”이라고 말했다.

 

▒ 사정기관, 정치인 수사 관심 줄어

 

정권 말이 되면 사정기관도 대형 사건을 가급적 맡지 않으려고 한다. 특히 정치인 관련 수사는 더욱 손대기 부담스러워한다. 정권이 어디로 넘어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밑바닥에서부터 감지된다. 검찰과 경찰 등에서 운영하는 정보팀이 가급적 정치인 관련 정보 수집을 꺼리고, 총장이나 청장에게 보고하는 것도 자제한다. 

 

두 가지 이유다. 어설프게 야당 정치인들을 수사했다가는 표적 수사라는 이유로 역풍을 맞을 수 있고, 그렇다고 해서 여당을 수사하는 것도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정권이 재창출될지, 교체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수사에 나섰다가 정권이 교체되면 수사에 가담했던 고위직 인사들은 대부분 영전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 굳이 그런 부담을 지고 싶지 않은 것이 사정기관 고위직 인사들의 비슷한 성향이다. 실제로 최근 검찰과 경찰의 정보팀 직원들은 여야 정치인 관련 비리 첩보보다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나 검경(檢警)수사권 독립 등 자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정보 수집 활동에 비중을 두고 있다.

 

정치인 수사를 기피하려고 하다가 어느 순간 사정기관이 대통령 친인척이나 측근들에 대한 수사에 나선다면 이것이야말로 레임덕의 가장 확실한 바로미터로 여겨진다. 그래서 법조계나 사정기관 주변에서 관심을 갖는 것이 우병우 수석과 이석수 특별감찰관, 그리고 박 대통령 동생 박근령씨, 올케 서향희 변호사와 관련된 사건이다. 만약 검찰이 우 수석이나 대통령 친인척을 기소하게 되면 검찰이 정권의 통제 밖으로 벗어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 부장급 검찰 간부는 “우 수석 사건을 검찰이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면 현 정부의 레임덕이 가속화될지 여부를 알 수 있다”며 “역설적으로 우 수석을 내치지 않는 것을 보면, 여기서 밀리면 레임덕이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지금의 대통령제에서 레임덕이라는 것은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대통령이 힘으로 이것을 막고 있는 것”이라며 “사드 문제로 보수 진영을 결합하는 것도 레임덕 방지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