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Insight] 홍수 주민 볼모로 도박하는 김정은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9.28 15:00
  • 호수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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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수해 지원의 정치학…이면엔 북핵 氣싸움

함경북도 북부지역에서 발생한 북한 수해가 남북관계의 새 뇌관으로 등장했다. 예상보다 큰 피해를 두고 남북한이 날카로운 감정싸움을 벌이고 있는 데다, 우리 사회 내부에서는 수해 지원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북핵 문제로 가뜩이나 꼬여 있는 한반도 정세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8월말에서 9월초 사이에 쏟아진 집중호우와 북·중 국경 두만강 범람으로 입은 피해는 사망 138명에 400여 명 실종인 것으로 현지 유엔 실사단은 밝히고 있다. 가옥 2만 채가 무너졌고 14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60만 명이 식수와 보건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국제기구의 보고도 있다. 피해가 극심했던 함경북도 회령시 외곽을 방문한 무라트 사힌 유니세프 평양사무소장은 외신에 “이번 홍수는 함경북도 주민들이지난 60년간 경험한 것 중 최악”이라고 강조했다.

 

9월12일 북한 매체가 함경북도 수해 복구작업에 모든 역량을 동원하자고 연일 독려하고 나섰다. 사진은 노동신문에 실린 복구 현장으로 향하는 돌격대원 © 조선중앙통신 연합


북한 매체 “해방 후 처음 겪는 대재앙”

 

북한도 사태 수습에 부산한 분위기다. 조선중앙TV는 요즘 정규방송 사이사이마다 선전포스터 형태의 격려 영상을 내보내며 조속한 수해 복구를 강조하고 있다. “모든 건설 역량을 북부지역 수해 복구 전투로 투입하자”는 취지다. 북한은 수해 발생 초기에는 피해상황을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명과 재산 손실이 예상외로 큰 데다 국제기구의 관심이 쏠리자 피해 사실을 공개했고, 현장 사진 몇 장도 관영매체를 통해 내보냈다. 피해 지역이 중국 측에서 관측이 가능한 국경지대란 점도 북한이 공개를 결정한 배경이란 해석도 나온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도 자신의 업적 과시 사업으로 야심 차게 추진해 온 여명거리 건설을 중단시키고 건설 인력과 장비를 수해 복구 현장에 투입했다는 게 관영 매체들의 설명이다.

 

이런 상황에서 9월13일자 노동신문에 실린 김정은의 군부대 농장 방문 사진이 도마에 올랐다. 대북 전문가들이 정밀 분석한 결과, 그가 타고 온 차량이 영국제 최고급 SUV 제작사인 랜드로버의 레인지로버 모델인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최고 2억원을 호가하는 이 차량은 최근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가 김아무개 부장판사에게 뇌물성 선물로 제공해 세간의 화제가 됐다. 함경북도 주민들이 수해로 한창 고통스러워할 시점에 최고지도자 김정은이 고급 차량을 타고 공개 활동에 나섰다는 점에서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북한 매체 스스로 “해방 후 처음으로 겪는 대재앙”이라고 전하는 참담한 상황에서 김정은은 즉각 수해 현장을 찾지 않았다. 대신 농장과 과수원 등을 찾아 풍작을 거뒀다는 식으로 선전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무엇보다 수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고받았을 9월9일 핵실험 버튼을 눌렀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핵실험으로 대북제재가 부쩍 강화되면 수해 지원이 어려울 것이란 점을 뻔히 알면서도 보란 듯이 강행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측면을 주시해 온 우리 정부는 현 상황에서 대북 수해 지원은 어렵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인다. 김정은이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을 감행하며 국제사회를 우롱하는 상황에서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라 해도 잘못된 사인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인식은 9월22일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박 대통령은 “북한이 큰 수해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복구보다 5차 핵실험에 매달리고 그것도 모자라 또 신형 로켓 엔진 시험에 성공했다고 좋아하는 것을 보면 북한 주민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정권 유지와 사리사욕만 생각하는 현실이 기가 막힐 뿐”이라고 비판했다. 5차 핵실험을 계기로 박 대통령의 대북 인식이 더욱 강경해졌음을 감지할 수 있는 언급이다.

 

북한의 수해를 지원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이려던 우리 대북지원 단체들도 딜레마에 빠졌다. 59개 기관이 참여하는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는 9월9일 오전 긴급상임위원회를 개최해 대북 수해 복구 지원사업을 결의했다. 하지만 회의 말미에 북핵 실험 긴급 뉴스를 접하고 아연실색했다는 얘기다. 김정은의 핵실험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비판여론이 고조되면서 대북지원에도 싸늘한 시선이 쏠려 동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북한은 유엔의 관련 기구를 비롯해 동남아 국가 등에 긴급구호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손을 벌리지 않고 있다. 미국에는 지원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중국에는 제안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다. 이를 두고 유엔과 미국 주도의 대북제재에 중국이 참여한 것을 북한 당국이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홍수 피해지역 복구에 투입된 북한 군인들 © 조선중앙통신 연합


핵·미사일 도발 거침없이 이어질 기세

 

북한은 한발 더 나아가 한국에 대해서는 “우리의 핵탄두가 서울을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 수도 있다”며 위협 수위를 한껏 올리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우리 군 당국이 북핵 공격 징후가 나타나면 평양을 초토화하겠다는 보복 작전을 공개하자 ‘서울 불바다’ 발언을 들고나온 것이다.

 

김정은의 핵·미사일 도발 행보는 당분간 거침없이 이어질 기세다.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대북제재를 우습게 보는 북한 정권에 대해 초강력 제재를 강구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대치 국면에서 탈출구를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과거 남북관계가 꼬인 상황에서 수해 지원을 둘러싸고 인도주의적인 화해의 모멘텀을 마련했던 시절은 다시 오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만큼 남북 대치나 한반도 긴장이 위험수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평양의 국제기구 관계자들은 함경북도와 양강도가 북한에서 식량이 가장 부족하고 영양 실조율도 가장 높은 지역이란 점에서 우려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지역이 겨울에 영하 25도까지 기온이 떨어져 수재민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긴급한 지원과 복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핵·미사일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 주민들의 삶을 볼모로 국제사회와 도박을 벌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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