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그리고 박근형
  • 나원정 ‘매거진M’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9.29 19:17
  • 호수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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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코미디 이어 액션까지 70대 노배우의 투혼 《그랜드파더》로 남우주연상 수상도

지난 7월 제20회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부천영화제) 폐막식에서 배우 박근형의 이름이 불렸다. 그는 한국 판타지영화를 시상하는 ‘코리아 판타스틱’ 부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같은 부문 후보로 오른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이제훈, 《날, 보러와요》의 이상윤 등 쟁쟁한 후배 배우들을 제치고. 4월 개봉한 《날, 보러와요》는 섬뜩한 실화를 소재로 깜짝 흥행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제훈은 올 초 방영된 tvN 드라마 《시그널》로 큰 인기를 누렸지만, 아무도 박근형의 수상에 이견을 제기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보자. 70대의 노배우가 국내 영화제에서 주연상을 거머쥔 건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더구나 최근 박근형의 주 무대는 TV 드라마였다. 그가 영화제에서 마지막으로 호명된 건 1991년 강우석 감독의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받았을 때였다. 올해로 연기 경력 57년 차. 출연한 영화와 드라마만 200편 남짓이다. 그러나 올해 부천영화제에서 그가 트로피를 거머쥔 저력은 그저 노배우의 연륜만은 아니었다.

 

배우 박근형 © 연합뉴스


《테이큰》의 리암 니슨 연상케 해

 

박근형에게 트로피를 안긴 건 《그랜드파더》라는 영화다. 지난 8월31일 극장가에도 개봉됐다. 영어로 ‘할아버지(Grandfather)’라는 뜻의 친근한 제목이지만, 결코 안심해선 안 된다. 연출을 맡은 이서 감독이 이른바 ‘센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이기 때문이다. 2009년 그의 연출 데뷔작 《사람을 찾습니다》는 어느 동네의 연쇄 실종사건의 끔찍한 진실을 파헤친 지독한 스릴러였고, 지난해 선보인 송일국 주연의 《타투》에선 사이코패스에게 납치당한 타투이스트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여과 없이 담아냈다. 《그랜드파더》 역시 만만찮다. 원작이 된 시나리오의 제목이 《인간사냥》이었다니, 그 수위를 짐작할 만하다. 부천영화제의 추천 평을 빌리자면, “사회에서 배제되고 낙인찍힌 참전 노인과 청소년을 하드보일드 액션 속에 담아낸 수작.” 한마디로, 고통받고 짓밟힌 자의 무서운 반격을 그려낸다.

 

이서 감독이 주인공 ‘기광’ 역에 1순위로 박근형을 떠올린 이유도 첫째가 그의 강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같은 1940년생이어도, 최불암과 박근형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은 전혀 다르다. 굳이 비유하자면, 박근형은 하비 케이틀,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처럼 선이 굵고 개성이 강한 과다. 전기 영화(《화가 이중섭》)부터 가족 드라마(《엄마 없는 하늘 아래》), 정치 스릴러(《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멜로(《별들의 고향 3》), 코미디(《가문의 영광》), 애니메이션(《저스틴》) 등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도 배우로서 그가 지닌 큰 강점. 

 

“카메라만 들이대도 배우 같은” 서구적인 외모도 감독들의 마음을 빼앗는 데 한몫했다. 그의 서구적인 외모에 대해선 얽힌 에피소드도 많다. 오죽하면 그가 생애 최초로 연기한 캐릭터가 연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매부리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었을까. 중앙대 연극영화과에서 연출을 지망했던 그는 조연출을 맡아 준비하던 이 연극에서 샤일록 역을 맡은 최종원이 갑자기 하차하면서 대신 무대에 올랐고, 이를 계기로 연기자의 길을 걷게 됐다. 

 

2012년 부패 권력을 파헤친 SBS 드라마 《추적자 THE CHASER》의 냉철한 재벌 ‘서 회장’ 역으로 뜨겁게 각광받은 이후, 드라마 《황금의 제국》 등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회장님’ 이미지를 굳혀온 그가 《그랜드파더》에선 정반대의 약자 입장에 섰다는 것도 재미있는 반전이다. 하긴 《추적자 THE CHASER》의 서 회장이나 《황금의 제국》의 ‘최 회장’도 자식에겐 한없이 마음 약한 절절한 아버지였고, 그래서 더 미워할 수 없었다.

 

은퇴한 아버지(이면서 할아버지)가 나쁜 놈들을 향해 엽총을 드는 《그랜드파더》의 설정은 언뜻 배우 리암 니슨을 액션 스타로 재발견한 영화 《테이큰》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이에 대해 박근형은 딱 잘라 부인했다. “조직범죄에 맞서는 상투적인 이야기였으면 안 했다. 《그랜드파더》는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한 데서 벌어지는 한 가족의 소통의 부재를 파고든다. 저예산 영화지만 메시지가 강하고,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역할이라 출연을 결심했다. 드물게 노년의 일을 그린 작품이라, 더더욱 열심히 했다.” 

 

영화 《그랜드파더》의 한 장면 © 인벤트 디·디스테이션


극중 역할 위해 6주 걸려 대형 1종 면허 따

 

《그랜드파더》는 노인들의 고독한 현실뿐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 등 새로운 시대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의 완고함까지 다 담아내는 영화다. 첫 장면은 노인들이 모인 어느 공원의 일상적인 풍경으로 시작된다. 선거 유세를 위해 공원을 찾은 정치인에게 노인들은 춤을 춰보라며 짓궂은 장난을 친다. 그때 나무 뒤에서 벌떡 일어난 한 사내가 산통을 깬다. 정치인에게 다짜고짜 관등성명을 대라고 횡포를 부리는 그는 베트남전 참전용사 기광. 퇴역 후 한때 사냥꾼으로 일했던 그는 이제 고물 버스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공장까지 출퇴근시키는 일을 한다.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도 여전히 근육이 튼실하게 붙은 팔뚝과 우람한 몸집은 첫눈에 그가 여느 노인들보다 월등한 육체를 지녔음을 암시한다.

 

기광은 가족도 없이 홀로 맨밥에 물이나 말아 먹는 신세다. 간혹 참전용사 동료를 만날 뿐, 팍팍한 성정은 그를 더욱 외롭게 만든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아들이 자살했다는 것.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어릴 적 딱 한 번 본 손녀 보람(고보결)을 만나지만, 고등학생인 손녀를 위해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우연히 아들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걸 알게 된 기광은 보람의 곁에 머물며 아들의 주변을 파헤치기 시작하고, 이내 참혹한 진실을 맞닥뜨린다. 죽은 아들과 위험에 처한 손녀를 위해, 그는 엽총을 들고 자비 없는 복수의 여정에 나선다. 

 

박근형이 매일 아침 30분씩 스트레칭을 한다는 건 tvN 여행 버라이어티 《꽃보다 할배》 시리즈로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습관처럼 꾸준히 해 온 운동도 많다. 하지만 기광 역을 해내기 위해선 준비할 게 적지 않았다. 체육관에서 근육운동을 해 몸집을 불렸고, 버스 운전기사라는 직업적 설정을 위해 6주가 걸려 대형 1종 면허도 땄다. “현장에 버스 면허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촬영 중 움직일 때마다 내가 운전을 하고 다녔다”며 그는 웃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촬영한 날은 방 안 공기가 37도에 육박했다. “정신이 어지러웠다. 두 번씩이나 응급실에 가서 처치를 받았는데 죽는 줄 알고 무섭고 겁도 났다. 근데 또 살아 나오더라. 그래서 또 돌아가 일을 했다.” 

 

2013년 6월28일 배우 박근형이 tvN 새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 제작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연합뉴스


“너만의 독창성 가지라” 후배들에게 충고

 

그는 현장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배역에 몰입하는 배우다. 올해 박근형이 출연한 또 다른 영화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조성희 감독은 “(박근형은) 감정 표현을 위해 쉬는 시간에도 극중 묶여 있는 포박 그대로 몇 시간을 참고 버티는 등 현장에서 살아 있는 연기 교과서로 불렸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서도 박근형은 자신의 딸들과 손녀들을 구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노인으로 등장한다. 1년에 10편 넘는 연극무대에 오르며 스스로 다진 이러한 엄격함은 그가 영화와 드라마를 통틀어 매해 대여섯 편 넘는 작품에 출연하면서도 연기에 있어 한 번도 허점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저 성실한 연기자로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후배들에게 따끔한 조언을 빼놓지 않기로 유명한 박근형은 “너만의 독창성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의 강한 마스크가 작품마다 늘 박근형다움과 동시에 새로운 정서를 품을 수 있었던 이유다. “후배들과 작업하면서 내가 직접 시범을 보이거나, (나를) 흉내 내게 한 적은 전혀 없다. 50년 넘게 연기하며, 나 스스로도 작가라고 생각해 왔다. 배우는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역할을 창조하는 작가다. 남을 흉내 내선 안 된다. 왜 쓸데없이 평생을 그렇게 사나?” 한 남성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다. 

 

지론만큼 그는 필모그래피도 독보적으로 채워가고 있다. “한국에 노인 인구는 많은데 노인 소재 영화는 없다”고 일침을 놨던 그는, 최근 치매 노인의 휴먼 드라마를 그린 영화 《장수상회》에도 출연했다. 배우 윤여정과 호흡을 맞춘 강제규 감독의 이 영화에서 그는 그해 어떤 한국영화보다 더 가슴 따뜻한 로맨스를 연기해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꽃보다 할배》 시리즈에선 “아내 없는 나는 상상도 못한다”며 ‘사랑꾼’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이 핸섬한 로맨스그레이 배우의 다음 로맨스 영화를 기다려도 좋다는 뜻이다. 

 

자수성가한 기업가이자 강직한 아버지 역으로 출연 중인 SBS 드라마 《사랑이 오네요》에 이어, 차태현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사랑하기 때문에》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박근형. 나이에 갇히지 않는 상상력으로 늘 새로운 역할을 꿈꾸는 이 배우의 전성기는 언제나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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