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 박관용 “면담 회피는 ‘탄핵 유도’ 증거”
  • 박관용│前 국회의장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0.07 15:45
  • 호수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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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겁만 주고 끝냈으면 했는데…대통령 ‘사과 못해’ 회견과 남상국 사장 투신자살이 불 질러”

2004년 3월9일, 드디어 올 게 왔다. (새천년)민주당 의원 51명과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의원 108명이 서명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정식 발의됐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열린당)은 “의회권력을 장악한 지역주의·부정부패·냉전세력의 동맹에 의한 쿠데타적 음모”라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이튿날에도 여야 간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의사봉을 쥔 박관용 국회의장과 자민련을 이끄는 김종필(JP) 총재가 탄핵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탄핵 의결 정족수(재적의원 270명의 3분의 2, 즉 181명)를 확보해야 하는 민주·한나라당 지도부로선 일단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박 의장은 탄핵이라는 최악의 사태만은 피해야 한다며 청와대와 막판 절충에 나서고, JP는 탄핵을 강하게 반대했다. 자민련은 9일에도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만을 재차 요구하면서 관망 자세를 견지했다. 자민련 내부는 탄핵 지지가 압도적이었지만 JP는 단호했다. JP는 자신이 5·16군사혁명으로 정부를 뒤엎은 경험이 있기에 헌정 중단 사태가 초래할 위중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섭고,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다. 극단을 피하는 JP 특유의 스타일이 한나라당(특히 이회창 총재)에 대한 저간의 섭섭함과, 노 대통령의 ‘과격’을 걱정하면서도 노 대통령의 파격·열정을 긍정 평가하는 등 복합적으로 아우러진 결과로 보면 과히 틀리지 않을 터다. 탄핵안 의결을 위한 ‘재적 3분의 2’ 충족과 ‘야 3당의 합일’이라는 정치적 의미와 명분 축적 차원에서 불과 10명의 의원밖에 안 되는 자민련이지만 그 존재의미는 각별했던 것이다.

 

탄핵소추안 발의 다음 날인 2004년 3월10일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농성 중인 열린우리당 의원들 © 연합뉴스

3월11일 대통령 회견 후 자민련도 가세

 

“노 대통령은 언행에 경솔함이 있었다. 특정 정파나 세력의 입장에서, 편 가르기 시각을 갖고 세상을 봤으며 위헌·위법적 행위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임기 도중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할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대통령의 유고(有故)는 국민의 불행이다. 설령 못났다고 해도 대통령직은 존경받을 필요가 있다.” JP의 회고다.

 

“야당 지도부는 탄핵 대신 경고 결의안으로 대신하자는 내 제안을 거부하고 9일 저녁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그렇지만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밤새 궁리한 끝에 대통령과 직접 만나 담판을 시도하기로 했다. 10일 아침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 그냥 놔둬선 안 된다. 대통령을 만나 해결책을 마련했으면 한다’고 했더니 ‘지방출장 중’이라고 했다. 그날 오후 귀경한다고 했다. 그래서 ‘만나서 얘기하면 못할 일이 어디 있나. 오늘 저녁이건 내일 새벽이건 대통령을 모시고 나와라. 청와대가 됐건 국회의장 공관이건 상관없다. 내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3당 대표를 끌고 나갈 테니 만나자. 대통령에게 이 말을 꼭 전해 달라’고 신신 당부했다. 

 

그날 온종일 청와대의 연락을 기다렸으나 감감 무소식이었다. 오후 5시가 돼서야 김 실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의장님의 뜻은 고마우나 지금 너무 지쳐 있어서 만날 수 없다고 하신다.’ ‘지쳐서 못 만난다니!!’ 탄핵을 막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제야 깨달았다. ‘이들이 파국을 원하고 있고, 탄핵 사태를 일부러 불러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김 실장이 ‘대통령께서는 내일 아침 기자회견을 하실 겁니다’라고 덧붙이기에 얼른 ‘기자회견 전에 각 당 대표와 먼저 얘기하는 게 순서가 아닙니까. 합의를 이뤄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내가 탄핵을 청와대와 열린당의 유인(誘引)에 의한 것으로 확신하는 소이(所以)다. 김 실장과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지만 그래도 행여나 싶어 기다렸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당시를 회고하는 박 의장에게선 지금도 안타까움이 넘쳐난다.

 

“11일 아침 의장실에서 대통령의 회견을 TV로 지켜봤다. 대통령은 준비한 회견문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탄핵 얘기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비리 혐의로 구속된 측근들에 대한 변명만 구구하게 늘어놓았다. 뇌물 수수로 구속된 자신의 친형 노건평씨를 비호하면서는 ‘대우건설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한 술 더 떴다. 한 기자가 탄핵을 끄집어내자 대통령은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총선을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고 정치적 결단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정국 최대 현안을 이런 식으로 뭉갠 것은 야당을 완전 무시한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야당에겐 계획된 도발이라는 표현이 틀리지 않을 게다. 이러기까지에는 여권 나름의 채비가 대단했을 것임에도 야당은 자신들의 세(勢)에 도취해 사태를 짐작하지 못한 듯하다. 함께 TV를 시청하던 야당 의원들 사이에선 욕설과 탄식이 쏟아졌다. 본회의장에서 여당 의원들과 대치하던 민주·한나라당 의원들이 외친 분노의 메아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조금 전 대통령이 언급한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의 투신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탄핵을 주저 내지 반대하던 의원들까지 격분, 입장을 바꿨다. 노 대통령이 그 직책을 수행할 만한 자격과 수준이 못 되는 사람임을 확신한 모양새였다. 관망하던 자민련 의원들도 탄핵 동참을 알려왔다.”  

 

JP는 대통령의 기자회견과 그 직후의 남상국 사장 자살을 기점으로 모든 게 달라졌다고 했다. 사실 자민련 의원들이 탄핵 대열에 끼지 않은 것은 JP의 지론에 공감하기보다는 JP의 카리스마 때문이었는데 이제 부질없는 게 돼버린 것이다. 10명 의원 중 8명이 탄핵을 더 크게 말했다. 노 대통령이 ‘탄핵을 모면하기 위한 사과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야당이 제시한 마지막 절충 카드(사과)를 차버리는 순간 JP의 카리스마는 거품이 됐다.

 

 

이해찬 “정말 할 거야?”에 “‘사과하라’고 전해”  

 

다음은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인 김경재 전 의원의 회고. “내가 탄핵 선두에 섰지만 사실 탄핵보다는 ‘겁주는’ 선에서, 엄포만 주고 마쳤으면 했다. 본회의 표결에 자신이 없던 것도 한 이유였다.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144명, 민주당 의원이 62명. 외형상 탄핵의결에 필요한 머릿수는 충분한 듯했으나 반대 의원이 만만치 않았고 구속 중인 의원도 7명이나 됐으므로 181명을 확보하는 게 간단치 않았다. 특히 표결이 무기명비밀투표로 이뤄지는 만큼 한 치의 방심이 대세를 그르칠 가능성도 농후했다. 혹시 모를 ‘반란표’를 대비해 3표 정도의 ‘여유 표’ 확보는 기본이었다. 차마 중도 포기할 수는 없고…. 내색은 안 했지만 조순형 대표도 망설였다.

 

유용태 원내총무는 홍사덕 한나라당 총무의 무용담과 지지 의원 현황 등을 알리면서 흔들리는 지도부와 소속 의원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분주했다. 홍 총무는 무소속 의원들과도 접촉하면서 ‘사실상 탄핵이 된 노 대통령을 의회에서 반드시 탄핵하도록 하십시다’고 독려했다. 신중론을 편 소장파 의원들 설득도 그의 몫이었다. 결정적 키를 쥔 박관용 의장이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까 ‘감시’하고 본회의장 점거 여당 의원들을 들어내기 위한 경호권 발동 요청 등 그의 역할은 막중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 회견으로 분위기는 일신됐다. 반대하던 추미애 의원(현 더불어민주당 대표)까지 뛰어들고 자민련이 가세하는 등 탄핵 열기가 고조됐다. 지금 와서는 딴소릴 하는 추 의원이지만 ‘김(경재) 선배 이래선 안 돼요’하며 소추문안을 다듬는 등 열혈투사였다(“추 의원은 ‘노 대통령의 탄핵사유를 쓰기로 말하면 줄이고 줄여도 책 한 권은 될 것’이라고 했다”는 얘기가 올해 8월 더불어민주당 대표 경선 때 상대의 공격 자료로도 등장). 교도소에 수감 중인 민주당 의원 2명을 합쳐도 2~3표 부족한 듯싶던 정족수는 이제 걱정 대상이 아니었다. 

 

탄핵은 안 된다며 나를 수시로 찾아오던 김근태 열린당 총무 발길도 줄었다. 나는 수석부총무실에 상황실을 설치하고 동정을 살폈다. 열린당으로 떠난 이해찬(후일 국무총리)·임채정(후일 국회의장)은 이 방에 죽치고 앉아 바둑을 뒀다. 이쪽의 동정을 살피기 위한 게 빤했지만 밀어내지 않았다. 이 의원이 ‘(경재)형, 정말 (탄핵)할 거야?’ 하면 나는 ‘(대통령한테) 가서 빨리 얘기하라니까. 화살 떠났다고’라고 대꾸했다. ‘적군’인 이·임 두 의원을 사령부에 들인 것은 이상했지만 그래도 ‘낭만’이 있던 시절이기에 가능했다. 밤 2시까지 ‘한 판만 더’를 거듭하던 이들은 ‘그만 가라. 날더러 사꾸라라고 한다’며 등을 떼밀자 그제야 떠났다. 이어 찾아온 김근태 총무에게는 ‘정말 탄핵된다. 노 대통령 자제시키라’고 당부했다.” 

 

 

‘허술한’ 탄핵 사유

 

탄핵의 두 선봉장, 홍사덕 한나라당·유용태 민주당 원내총무(왼쪽). 수시로 의견을 조율하며 공동전선을 폈다. © 연합뉴스
2004년 3월9일 야당은 소속 의원 159명(한나라당 144명 중 108명, 민주당 62명 중 51명)의 서명을 받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헌법과 법률을 수호해야 할 국가원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특정정당을 위한 불법선거운동을 계속해 왔고, 이로 인해 2004년 3월3일 헌법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헌정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을 위반했다는 판정과 경고조치를 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숙하기는커녕 오히려 이 경고를 무시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선거법에 관계없이 특정정당을 공개지원하겠다고 하여 민주헌정의 근간인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초헌법적이고 초법적인 독재자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국회는 이러한 법치주의 부정 사태를 방치할 수 없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은 본인과 측근들의 극심한 권력형 부정부패로 인해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상황을 초래했고, 노무현 대통령의 불성실한 직책수행과 경솔한 국정운영으로 인한 정치 불안 때문에 국정이 파탄지경에 이르러 국민을 극도의 불행에 빠뜨리고 있다. 이로써 노무현 대통령은 더 이상 나라를 운영할 자격과 능력이 없음이 극명해졌으므로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의 행복과 나라의 장래를 위해 탄핵소추안을 발의한다.

탄핵소추안은 이렇게 전제하면서 △헌법과 법률을 위반해 국법질서 문란 △자신과 측근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인해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법적 정당성 상실 △국민경제와 국정을 파탄시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세 가지 사유를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또 국법질서 문란과 관련해서는 △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국민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발언으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 △노사모나 국참 0415의 행사에서 ‘시민혁명’ 발언 등으로 법 불복종운동 △한 일간지에 보도된 열린우리당의 총선 문건에서 보듯 청와대의 조직적 선거 개입 △민주당을 반(反)개혁정당으로 규정해 헌법상 국가의 정당 보호 의무 위반 △국회의원 선거에 무단 개입해 헌법상의 삼권분립 정신 파괴 등을 적시(摘示)했다.

 

국법질서 문란, 최소한의 법적·도덕적 정당성 상실, 국정 파탄 등 탄핵 사유의 머리글자들만 보면 탄핵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각론 내지 ‘디테일’에 이르면 뭔가 허술한 감도 없지 않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등의 발언이 ‘국가원수로서 품위를 스스로 훼손하는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데는 많은 이들이 수긍한다. 그러나 대통령을 탄핵할 만큼 위중한 것인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여론도 이런 추세였다. 60% 이상이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면서도, 65% 이상이 ‘탄핵은 반대’라고 했다. 야당 내부에 탄핵 반대 내지 신중론이 적지 않았던 것은 이런 민심 소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야당은 탄핵을 밀어붙였다. ‘언제 적 대통령이라고 감히 거대 야당을~’ ‘대통령 만들었더니 뛰쳐나가’라는 노 대통령에 대한 ‘깔봄’과 ‘반감’이 뒤엉킨 결과쯤으로 봐도 무방할 듯싶다. ‘하는 짓거리가 맘에 안 들어 혼냈다’ ‘적당히 혼내고 넘어가려 했는데, 사과조차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사태가 커졌다’는 평가가 적확할 수 있다. 

 

‘사과’마저 거부한 노 대통령의 태도는 논외로 하고, 과거 역대 대통령들이 유사한 총선 관련 언급을 했음에도 시비에 그쳤던 경우를 상기하더라도 그렇다. 탄핵 총대를 멨던 조순형 민주당 대표 자신이 김대중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 창당이나 총선 승리 독려 발언 전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점에 비춰 봐도 과히 틀린 지적은 아니다. 또 이 중차대한 탄핵사유서를 작성하면서 ‘언론보도에 따르면~’ 식의 안이한 자세를 취했던 이면에서도 그런 기류가 읽힌다. ‘경범죄에 사형’을 내렸다는 지적이 나름의 설득력을 갖는 게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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