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용 회고록]“與 지도부는 ‘말리는 시늉’만…”
  • 정리=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0.14 09:44
  • 호수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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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용 의장 “진정성 없는 행태 확인 후 본회의 사회 결심”

“좋다. 그렇다면 표결로 갈 수밖에.” 이틀 밤을 ‘절대 고독’ 속에 뜬눈으로 지새우고 난 11일 새벽, 표(票)로 결판내는 것 이외는 다른 도리가 없음을 확신했다고 박관용 당시 국회의장은 털어놨다. 그리고 갈 바엔 당당하게 가리라 작심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에 대한 사상 초유의 탄핵이 불러올 사태는 빤했다. 파국(破局)-. 이는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이 대원칙을 고수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원칙이었다. ‘국회의장으로서 주어진 역할을 회피하지 않는다’였다. 내게 탄핵 의사봉을 피해 갈 방법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정당한 절차를 거쳐 정식 발의된 의안을 깔아뭉개는 것은 당치 않았다. 그 순간 의회는 죽는다고 생각했다(박 의장은 전날 강용식 국회사무총장이 ‘탄핵소추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는 대신 법사위원회를 거치도록 해 냉각(冷却)시간을 벌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이를 4당 대표에게 제안했으나 모두에게서 거부당했다는 것. 야 3당은 ‘공연히 김만 뺀다’는, 여당은 ‘탄핵 논의 자체를 인정 못해’라는 게 이유였다고).” 박 의장은 국회본회의 ‘탄핵 의사봉’을 잡기로 결심한 이후에도 혹시나 하면서 벼랑 끝 극적 반전을 고대했다. 11일 대통령 기자회견과 12일 김근태 열린당 총무의 ‘메시지’를 기대한 것 등은 그런 고뇌의 흔적들이다.

 

3월11일 국회본회의 사회를 위해 본회의장에 들어선 박관용 국회의장. 정동영 대표를 비롯한 이해찬·신기남·유시민·김부겸 등 열린당 의원들이 박 의장의 의장석 진입을 막고 있다. 아직 국회질서유지권이 발동되지 않은 시점. © 연합뉴스


 

김원기에게 “정치스승이라며 그리 가르쳤어”

 

“청와대는 10일 나를 포함한 4당 대표와의 직접 담판 제의를 외면했고 이때 ‘여권이 탄핵을 바라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래도 행여 하는 마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다음날 기자회견을 기다렸다. 그러나 대통령은 탄핵을 막을 마지막 탈출구인 (야당이 제의한) 사과마저 차단했다. 사실상 최후통첩이었다. 막가자는 것임을 재확인하게 됐다. 

 

대통령 회견 뒤 국회가 들끓던 오후 열린당 김원기 의원이 의장실에 들어섰다. 그가 ‘꼭 이래야 돼? 어제 청와대에 전화해서 협상을 주선하겠다고 했다던데 한 번 더 그런 거 해보면 안 되겠어?’라고 했다(열린당 초대 당의장인 김 의원과 박 의장은 나이도 한 살 차이인 데다가 11대 때 같은 민한당 소속으로 의원 생활을 해왔기에 말도 트고 지내는 사이). ‘이봐 그러면 못써.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그럴 거면 어제 그토록 간곡히 얘기할 때 왜 안 들었어. 저 의원들 좀 봐. 늦었다고.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더하자. 당신이 대통령의 정치스승이라던데 그렇게 가르쳤어. 어떻게 멀쩡한 당을 쪼개. 대통령 만들어 준 정당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고 뛰쳐나갔는데 그냥 보고만 있을 사람이 있을까. 그래놓고 이런 사태가 올 것을 몰랐다고. 자업자득(自業自得)이지. 혼자만 잘낫다고, 너(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명색이 당 원로라면서.’ 내가 한바탕 쏴붙이자 그는 ‘허! 참’을 연발하다 의장실을 나섰다. 그가 진심으로 청와대와의 주선을 권유했다면 더 험하고 어려운 일도 마다 않았을 터다. 

 

하지만 막판까지 자기들로서는 할 만큼 했다는 흔적이나 남기기 위한, 그냥 해보는 소리인 것을 알기에 더 야속했다. 사실 그에 앞서 노 대통령의 후원회장이던 신상우 평통수석부의장도 찾아왔었다. 그는 ‘(탄핵을) 꼭 해야 하느냐’며 만류했지만 내 개인 의지로 탄핵을 어찌할 단계는 이미 지났었다(박 의장은 동갑내기 친구인 신상우 부의장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하는 등 신 부의장과 각별한 사이).” 박 의장은 의사봉을 잡기로 했지만 경호권 발동만은 피하려 했다고 했다. 

 

“열린당은 탄핵안 저지를 위해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호권 발동 없이 탄핵안을 처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도 알았다. 하지만 지난날 물리적 방해 제거를 이유로 발동했던 경호권·질서유지권이 의정사에 남긴 상처를 생각하면 내키지 않았다. 홍사덕 한나라당·유용태 민주당 총무는 나의 망설임을 읽었는지 경호권이나 질서유지권 발동을 더욱 강력히 요구했고 김근태 열린당 총무는 육탄(肉彈)저지를 공언했다. 11일 오후 나는 두 차례 본회의장 의장석으로 향했다. 그러나 열린당 의원들은 결사적으로 길을 막았다. 결국 ‘오늘은 물러간다. 그러나 내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의장 직무를 수행하겠다’고 선언한 뒤 의장실로 돌아왔다. 

 

이때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의장실에 들어섰다. 탄핵 사태만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내 의중을 꿰고 있던 그는 ‘내일은 더 어려워질 게다. 그러니 오늘 회의를 속개해 끝장을 내자’고 채근했다.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냐. 날치기 사회는 못한다’고 고함을 쳤다. 야당 지도부는 이날 오전 대통령 기자회견 이후 격앙된 분위기를 곧장 표결로 연결시키는 게 유리하다고 보는 것이 분명했다. 남경필·정병국 의원 등 탄핵 반대 내지 신중론을 주장하던 한나라당 소장파도 대통령의 ‘사과 못한다’에 발끈해 대거 탄핵에 가세하는 등 의결 정족수 181을 훌쩍 넘어섰으니 기세등등할 만했다(회견 전만 해도 한나라당 지도부는 탄핵 반대 의원들에게 ‘해당(害黨) 행위 엄벌’을 경고해야 할 정도로 탄핵안 통과를 자신 못한 상태). 상대가 집권 여당이고, 여론 추이도 심상치 않은데 자칫 고삐를 늦추다가 다른 돌발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니 그러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의장으로서 나는 고려할 게 많았다. 나에겐 국가와 국민과 국회가 입게 될 상처를 최소화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퇴청하려고 의장실을 나서자 이번엔 야당 의원들이 길을 막았다. 의장 공관으로 퇴근했다가 여당 의원들이 내일 등청을 막으면 낭패라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의장실에서 밤을 새웠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말이 이런 것을 가리키는구나 싶었다.” 박 의장은 그러나 어느 한순간 편해졌다고 술회한다. 나름의 최선을 다했고 이제는 남은 책무를 다하면 그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과 품위 지키려 노력

 

“12일 새벽 6시엔 술 취한 40대 남자가 지프로 본관 입구를 들이받고 불을 지르는 해프닝도 있었다. 앞으론 더한 아수라장이 연출되겠지… 의사당 주변을 둘러보니 북새통도 이런 북새통이 더 있을까 싶었다. 내외신 기자들과 각 당 사무처 요원들과 의원 보좌관들로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 이 혼란을 바라보며 내가 마지막 고심한 것은 질서유지권을 발동하느냐, 마느냐였다. 그 흉측한 과거의 모습 때문에라도 이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이때 의장실 밖이 소란스러웠다. 의장 비서실에 들어선 김근태 총무와 한나라당 의원들이 대판 다투고 있었다. 내가 ‘김 총무를 들여보내’라고 소리쳤지만 야당 의원들은 막무가내였다. 나는 혹시라도 ‘김 총무가 무슨 절충안을 가져온 게 아닌가’ 했고, 야당 의원들은 바로 그 같은 이유 때문에 김 총무의 의장실 출입을 가로막은 것이다. 비서를 호출, ‘즉각 김 총무에게 내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고 전화를 걸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비서가 직접 김 총무에게 내 뜻을 전했지만 전화는 없었다. 그의 의장실 방문은 ‘쇼’였다. 파국을 막기 위해 막판까지 노력했으나 야당 의원들의 저지로 무위에 그쳤다는, 언론플레이용 ‘그림’을 만들기 위한 게 확실했다. 그래도 김 총무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믿었었는데…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정치적 이해득실을 떠나 국가 장래가 걸린 중차대한 국면에서 이래선 안 되는데…. 이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됐다. 오전 11시 국회 사무총장을 불렀다. ‘사회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오.’ 질서유지권 발동 지시였다. 대다수 의원들의 의견이 집약된 안건을 처리하는 것은 의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다. 당당하게 맞서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과거 의장들은 방망이를 친 뒤 도망치듯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볼썽 사나운 장면을 연출했었다. 이를 아주 못마땅해 했던 나는 의장석에 서서 사회를 보고, 끝나면 의장석에 의연(毅然)히 좌정(坐定)하리라 결심했다. 어떤 고난이 몰아쳐도 대한민국은 앞으로 나가야 하고 그렇게 되도록 내 온 정성을 다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여당 의원들이 통로를 막고 난리를 쳐도 대한민국 국회의장으로서 품격을 지키라’고 나 자신에게 당부했다. 그러기 위해 발걸음도 천천히 떼기로 하곤 그런 모습을 미리 머릿속에 그렸다.” 

 

 

국회 경호권과 질서유지권

 

국회 질서 확보에 동원되는 수단은 경호권과 질서유지권 두 가지.

 

국회법 144조는 ‘의장은 국회 경호를 위해 국회운영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일정한 기간 국가경찰공무원의 파견을 요청할 수 있으며, 국회 경위는 회의장 건물 안에서, 경찰은 회의장 밖에서 경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경호권>.

 

국회법 제145조는 ‘의원이 본회의 또는 위원회 회의장에서 회의장의 질서를 문란하게 할 경우 의장 또는 위원장이 이를 경고 또는 제지하고, 응하지 않을 경우 퇴장시킬 수 있다’고 돼 있다<질서유지권>. 질서유지권은 국회경위 동원 권한(내부경찰권)과 특정 의원의 국회 출입을 금지시키는 권한(의원가택권)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권한 행사 주체와 관련해선 경호권은 국회의장만이, 질서유지권은 국회의장과 상임위원장이 발동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또 동원 대상이 경호권은 경찰(과 경위), 질서유지권은 국회 경위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경호권이 질서유지권보다 수준이 한 단계 높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회의장엔 국회 경위만 들어갈 수 있으므로 경호권과 질서유지권이 실제 행사될 때는 구분이 모호하다. 회의장 내부를 기준으로 보면 경호권이든 질서유지권이든 큰 차이가 없다. 평소 국회 건물 안은 국회 경위가, 밖은 국회경비대(경찰)가 경비하는데 경호권이 발동돼 국회경비대와 외부 경찰이 동원되더라도 건물 안은 전적으로 국회 경위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탄핵안 의결을 앞두고 긴장이 고조되던 3월11일, 박관용 국회의장을 ‘확보’하기 위해 국회의장실을 점거한 여야 의원들. © 연합뉴스


 

특이한 사례는 1958년 4대 국회 ‘2·4 정치 파동(보안법 파동)’ 당시 무술경관 300명을 하루 동안 임시 경위로 임명, 회의장에 투입한 경우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은 국가보안법을 밀어붙이면서 무술 경관으로 하여금 야당 의원들을 감금토록 하고, 국회의사당 정문을 폐쇄시킨 뒤 자유당 의원만 출석한 회의장에서 국가보안법 등을 처리했는데 이 와중에도 ‘회의장은 국회 경위 소관’ 원칙을 지키려 했던 노력이 황당하면서 기특(?)하다. 1952년 이승만 독재를 위한 ‘발췌개헌’ 때는 군경(軍警)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비밀투표가 아닌 기립 방식으로 투표토록 하는 흉악무도를 서슴지 않았지만 경찰의 회의장 진입은 없었다. 헌병대가 야당 의원들을 버스에 태워 통째로 끌고 간 ‘부산정치 파동’ 장면은 이 난리 직전의 일이다.

 

역사적으로 경호권과 질서유지권은 각각 5차례 발동됐다. 그러나 둘 다 대국민 이미지가 나쁘기 때문에 국회의장이나 위원장들은 그 행사를 극도로 회피했다. 특히 경호권은 더욱 고약하므로 12대 국회 이후엔 발동된 적이 없다. 경호권이 앞서의 4대 국회 보안법 파동이나 10대 국회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 12대 국회의 유성환 의원 체포동의안 때 발동된 사실이 말해주듯이 ‘방망이를 친’ 본인에게 ‘날치기’는 기본이고 반의회주의자 낙인(烙印)이 찍혔다. 그런 점에서 의장 대신 의사봉을 잡아야 했던 보안법 파동의 한희석 부의장, 유성환 제명 파동의 최영철 부의장은 ‘불운’한 케이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박관용 의장이 경호권 발동을 부담스러워했던 게 괜한 일이 아니다. 경찰을 동원한댔자 회의장 내에는 못 들어오므로 외곽 경호 부담을 던다는 측면 이외는 큰 도움이 못 되기도 했지만 이래저래 13대부터는 경호권 행사 기록이 없다. 박 의장 이후 질서유지권을 발동한 의장은 그나마 18대 김형오 국회의장뿐이다. 나머지 3건은 ‘여야 대치 안건’ 처리를 위해 상임위원장(17대 이경재 환경노동과 김원웅 통일외교, 18대 박진 통일외교)이 행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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