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리더십] “종교적 관용만 허용되면 정치 안정 유지할 수 있다”
  • 김경준 딜로이트 안진 경영연구원장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10.28 09:44
  • 호수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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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녜 빌럼, 네덜란드 國父이자 왕실의 시조로 추앙받아

오라녜 빌럼(1533~1584)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에스파냐가 지배하던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으로 에스파냐 왕실의 충직한 신하였다. 그러나 가톨릭의 종주국으로 네덜란드 지역에 종교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에스파냐에 대한 반란의 지도자로 변모해 네덜란드를 독립시켰다.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난 독립국 네덜란드는 대항해 시대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그의 후손은 오늘날 네덜란드 왕실이 돼 네덜란드 근현대사를 상징하고 있다.

 

 

오라녜 빌럼, 참을성 많은 ‘침묵공’

 

고대 게르만 계열의 부족들이 살았던 네덜란드 지역은 기원전 1세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에 편입됐다. 로마 패망 후 8세기에는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 대제의 영토가 됐다. 13세기부터는 인접한 프랑스 계열 부르고뉴 공작의 지배를 받다가 16세기 초반부터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으로 에스파냐 왕이자 독일 황제인 카를로스 1세(재위 1516~1556)의 통치를 받게 됐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통으로 에스파냐·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나폴리·시칠리아에 중남미 식민지까지 상속받은 카를로스 1세는 가톨릭 종주국의 왕으로 루터 등의 종교개혁에 반대했으나 네덜란드 지역 플랑드르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개인적 배경으로 종교문제에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왕위를 이은 아들로 에스파냐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는 투철한 종교적 신념으로 서유럽에서 신교세력을 격멸하고 가톨릭을 부흥하려는 종교근본주의 정책으로 전환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중세 말기에 봉건영주의 지배에서 벗어난 자치도시들로 출발한 플랑드르 지방의 역사적 배경에 네덜란드 출신의 가톨릭 사제로서 인문학자였던 에라스무스(1466~1536)가 가톨릭의 타락을 비판하고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부각되는 등 루터와 칼뱅 계열 반(反)가톨릭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에스파냐 본토와 동일하게 종교무관용 정책을 펼치면서 종교재판소를 통해 신교도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오라녜 빌럼 초상화

남프랑스 오라녜 지역 유력자가 선조인 네덜란드 귀족 빌럼은 카를로스 1세가 총애하는 유능한 신하였고, 펠리페 2세로부터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받은 가톨릭 신자로서 별명이 침묵공(公)이었다. 참을성 많은 그는 왕에게 종교적 관용을 청원하는 한편 네덜란드 신교도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노력했다. 1566년 빌럼이 신교도 귀족들과 종교재판의 개선을 청원했으나 무위로 끝나자 네덜란드 전역에서 에스파냐에 반대하는 소요가 발생했다. 이에 대응해 펠리페 2세는 1567년 공포정치의 대명사였던 알바 공작을 파견해 무력 진압을 시도하고 세금을 인상하는 등 강력 대응에 나서서 일단 소요를 진압했다. 이후 알바 공작은 반란과 신교도에 대한 응징에 나서 귀족을 포함해 지도자급 1000여 명을 처형했고, 왕이 임명한 총독으로 소요사태에 책임이 있는 빌럼도 법정에 소환돼 재판을 받고 모든 영지를 몰수당했다.

 

종교적 관용만 허용되면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던 빌럼은 더 이상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1568년 추종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기대했던 루터교 세력이 강한 독일 제후들의 지원은 없었고 군사행동도 알바 공작의 군대에 진압되면서 빌럼은 프랑스로 탈출했다. 전환점은 1572년 4월 영국의 지원을 받은 반란군의 함대가 네덜란드의 항구 브릴레를 기습점령하면서 찾아왔다. 반란군이 기선을 제압하자 네덜란드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신교세력이 확대되기 시작하면서,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부상한 빌럼의 지휘로 10년에 걸친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빌럼은 신교도가 많은 북부를 석권하고 남부를 공략하면서 남부와 북부를 통합한 정치적 독립을 추구했으나 가톨릭 신도가 많은 남부의 입장은 달랐다. 빌럼은 1579년 북부 7개 주만 참가하는 위트레흐트 동맹을 맺었고, 1581년 7월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해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수립했다. 남부는 일단 에스파냐의 영토로 남았으나 자치권이 확대됐고 후일 벨기에 왕국으로 독립한다.

 

빌럼은 필생의 염원이던 독립을 이루고 연방공화국의 초대 국가원수로 취임했으나 1584년 프랑스 출신 가톨릭 광신자에게 암살당한다. 빌럼 사망 이후 에스파냐는 독립하지 않은 남부를 근거지로 독립한 북부에 대한 공격의 수위를 더욱 높였다. 북부는 영국의 지원으로 전쟁을 계속해 나갔다. 에스파냐는 독립국 네덜란드의 배후세력인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를 응징하기 위해 1588년 무적함대를 파견했으나 오히려 참패를 당하면서 기세가 꺾였다. 1598년 펠리페 2세가 사망하면서 전의를 상실했다. 양국 간에 휴전과 전쟁이 간헐적으로 이어지다가 서유럽 최후의 종교전쟁인 독일의 30년 전쟁이 끝나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에서 네덜란드 독립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얻으면서 1568년 시작돼 80년간 지속된 독립전쟁은 종식됐다. 세계사적으로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영국의 청교도 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 대혁명에 선행한 시민혁명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80년간 지속된 네덜란드 독립전쟁

 

1581년 독립을 선언하고 1648년까지 오랜 기간 독립전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종교적 지배와 무능한 통치를 종식시킨 네덜란드는 활발한 대외진출로 눈부신 경제적 발전을 이뤘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 아시아 진출에 나섰고, 1612년에는 북아메리카에 후일의 뉴욕이 되는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하고 1641년에는 일본까지 항로를 확장했다. 17세기 전반기 네덜란드 선박 수는 유럽의 모든 선박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네덜란드는 1806년 나폴레옹 황제에 의해 프랑스 속국이 됐다가 1812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면서 정치적 공백상태가 됐다. 1814년 영국으로 망명해 있던 빌럼의 후손이 귀국해 입헌군주국을 수립하고 왕위에 올라 빌럼 1세가 돼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빌럼 선조의 영지 이름인 오라녜(Oranje)를 영어로 읽으면 오렌지가 된다. 가문과 과일의 이름은 연관성이 없지만, 네덜란드의 상징색은 오렌지 색깔로 정착됐다. 오라녜 빌럼은 독립국 네덜란드의 국부이자 왕실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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